2013(癸巳年) 두레골 성황제(城隍祭)
Ⅰ. 시작하면서
1. 유계 선생과 두레골
영주의 역사 기록은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 선생이 1625년에 편찬한 영주지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며, 근대사의 기록은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 선생이 1967년에 발간한 ‘영주향토지’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최근 영주의 전설을 KBS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고 있는데 청도 김씨 가문의 ‘대호 이야기’나 공주이씨 가문의 ‘천하명의 이석간’이야기 그리고 반남박씨 가문의 ‘서릿골 족제비의 보은’ 이야기 등 모든 전설이 영주향토지에 근거해 영주시사에 실렸고 인터넷으로도 널리 전파되었다고 본다.
유계 선생이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고을명이 이합·집산됐던 영주의 역사, 인물, 문화의 기록을 찾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 문헌마저 마땅치 못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남긴 것이 ‘영주향토지’이다. 선생은 후세들에게 바른 역사의식과 교육을 위해 절대적인 업적을 남기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감사와 경의를 드린다. 오늘 유계 학술발표회를 준비하면서, 선생께서 찾아 헤맸을 두레골 골짜기를 사진으로 찍어보기도 했고 서낭당 기둥을 어루만지면 금성대군을 추모하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2. 아주 별난 두레골 성황제
성황제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 중의 하나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을 지켜준다는 성황신(서낭신)께 드리는 대동제(大同祭)이다. 우리고장 순흥(順興)에도 18마을에 18개 서낭당이 있어 예외 없이 두레풍습의 일환으로 성황제를 드리고 있다. 특히 순흥초군청 성황제의 특이한 점은 제의(祭儀) 대상이 두 곳이라는 점이다. 정월 열사흗날(음1.13) 오전 7시(辰時)경에는 순흥고을 주산(主山)인 비봉산(飛鳳山)을 진혼신(鎭魂神)으로 삼은 본당(本堂)에 제사를 올리고, 이어 보름날 (음1.15 子時)에 두레골에 모신 만고충신이요 절의(節義)의 상징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모신 상당(上堂)에 다시 대동제를 올린다. 제물은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황소이며, 이때 희생(犧牲)을 양반(또는 어른)으로 의인화(擬人化)해 제물로 드리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두레골 성황제가 이처럼 특별한 것은 비운에 승하하신 단종대왕을 기리며 왕위 복위에 앞장섰던 금성대군을 신(神)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두레골 성황제에 대한 많은 연구와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전통이 조금씩 변천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看過)할 수 없다. 그래서 두레골 성황제의 2013년 현재의 제의를 관찰하고 기록하여 역사에 남기고자 한다.
Ⅱ. 두레골 성황제
1. 두레골의 위치
두레골은 현 행정구역상 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곡3리(웃질막)로 되어있다.
이곳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나무꾼이 나무하러 다니던 길목으로 산신각이 있어 산신령님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고 새옹에 밥을 지어 먹기도 했던 곳인데 지금으로 치면 나무꾼 쉼터라 할 수 있다.
1457년 세조(수양대군)는 조카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냈다. 단종의 또 다른 삼촌인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를 주장하다 순흥으로 유배되어 위리안치 됐다. 순흥의 금성대군은 소백산 고치령 넘어 영월로 사람을 보내 단종의 안위를 살폈는데 이 때 밀사들이 다니던 길이 바로 두레골로 통하던 길이었다.
두레골은 자재기재를 넘어 좌석, 고치령으로 통하는 길과 국망봉으로 오르는 길, 그리고 점마재를 넘어 배점으로 가는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다. 몸을 숨겨야 하는 집단의 경우 유사시 퇴로가 확보된 지리적 요충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일제 강점기에는 의병과 광복군들이 여기를 거점을 활동했고 6,25 전에는 빨갱이들이 이곳에 은둔해 있다가 밤이면 민가에 내려가 만행(蠻行)을 저지르기도 했던 본거지 이다. 1949년 가을 소백산 빨갱이들이 단산면 병산리 행갈마을에 내려가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불질러 행갈마을을 풍비박산(風飛雹散)내기도 했던 역사도 있다.
2. 두레골 성황제의 유래
두레골 성황제의 유래는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의 혈석(피묻은돌)에서 부터 시작된다.
조선 후기 어느 때 순흥 고을에 사는 권씨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 피묻은 혈석이 죽동 냇물에 있으니 이를 찾아 거두어 달라"고 하면서 돌의 모양도 알려 주었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죽동 냇가를 뒤졌더니 과연 그 돌이 발견되었고 이 혈석을 가까운 죽동 서낭당에 안치하게 되었다.
죽동 서낭당
그 후 순흥사람들은 매년 정월보름날이면 정성을 모으고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올렸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 경 이 지역에 사는 이화라는 선비의 꿈에 또 금성대군이 나타나 “이 곳에 일본인들이 와서 오줌을 누고 침을 밷고 욕하니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된다. 나를 두레골로 옮겨 달라”고 현몽한다.
그래서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국망봉 바로 밑 두레골로 옮겨서 모시게 되었는데 이 때 이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 바로 상민(常民) 자치기군인 순흥초군청이었다.
3. 순흥의 수호신이 된 금성대군
혈석을 두레골에 모시니 이곳에는 원래 있던 산신각과 금성대군당(상당). 이렇게 두 성황당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게 되었다.
순흥초군청은 매년 정월보름날 성황제를 올리는데 제례의 의식이 성대하고 아주 특별했다.
초군의 모습
4. 어른 모시는 날
우리나라의 여러 성황제 중에서 제물로 황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는 곳은 이 곳 뿐이라고 한다. 소를 잡아 진설할 때까지 과정이 아주 길고도 정중하다.
순흥초군청의 수장을 좌상이라고 하는데 좌상은 정월 초삼일 초군청 회의를 소집하여 성황제 제관을 선정하고 제례 절차를 의논한다. 여기서 제관으로 선정되면 매일 죽계에 나가 목욕재계하여야 하고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2013년 제관은 본당주인 손병연, 상당주인 김낙임(좌상), 축관 박종찬(총무), 손기영(초군), 임병상(초군) 이상 5명이다.
제관의 집에는 금줄을 걸고 잡귀의 근접을 철저히 차단한다. 이 기간동안 여성의 순흥 방문은 절대금하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정월 초팔일이 되면 제물로 바칠 황소 한 마리를 선정하게 되는데 2013년에는 단산면 사천2리 띄기마을 한우축사의 황소로 선정됐다. 이를 ‘어른모시는 날’이라고 하고 황소는 거세하지 않은 튼실한 어른으로 정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어른이 정해지면 한지 전지에 ‘근봉(謹封)’이라고 써서 소등에 붙이고 이날부터 좌상 부부가 아침‧저녁으로 띄기까지 가서 문안 재배하고 쇠죽(식사)을 올린다. 지금도 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려면 많은 비용이 드는데 그 당시 소 한 마리를 마련 한다는 것은 순흥사람 모두가 성심을 다해 성금을 모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금성대군에 대한 숭모 열기가 대단했다는 것과 순흥 사람들이 대동․·단결하는 제례였음을 알 수 있다. 2013년 어른 모시는 비용은 6백만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5. 비봉산 본당제
순흥초군청이 14일 밤 12시(보름날 0시) 두레골 성황제를 지내기 위해서 음력 13일 비봉산 본당제를 먼저 지내야 된다. 정월 13일 해 뜰 무렵 초군들이 성심을 다한 성스러운 불(이하 성화, 聖火) 상자와 제수를 지게에 지고 비봉산 본당에 오른다.
성화 봉송
비봉산 본당
성화를 신위 앞에 안치하고 본당주인이 바가지에 담은 물을 솔가지로 뿌리며 “부정을 풉니다” “온갖 잡신을 물러나시오” 라고 외친다. 잡신을 몰아낸 후 본당 앞 20여 미터에 금줄을 친다. 금줄은 본당에 15발, 본당 앞 나무에 15발, 산신각 6발, 술할미 1발 합이 37발이다. 1발의 길이는 새끼줄을 양손에 잡고 양팔을 펼쳤을 때 왼손 끝에서 오른 손 끝가지의 길이(약 1m 50Cm 정도)를 말한다. 제관들은 본당 안으로 들어가 1차 진설(제물을 제상에 올려 자리 배치함)을 하고 본당주인은 삼신당신위(三神堂神位)와 순흥안관성황신위(順興按官城隍神位), 서배위신위(西配位神位)와 동배위신위(東配位神位)에 고깔을 씌운 다음 실타래를 건다.
비봉산 본당 신위
그리고 신위 뒤쪽에 가로로 만든 횃대에 폐백을 드린다(건다). 신위에 올리는 의례에서 고깔은 관(冠)을 뜻하고 실타래는 장수(長壽)를 의미하며 폐백은 신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순흥안관성황신위’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손병연 본당주인은 “순흥의 여러 성황신 중 가장 높은 신위”라고 했다. 여기서 드리는 폐백은 한지를 15Cm 너비로 접어 횟대에 걸어두는 것이다.
제례 준비를 끝낸 제관들은 먼저 산신각으로 가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는 본당주인을 초헌관으로 삼상향과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로 술잔을 올린다. 산신제를 지낸 후 본당으로 내려온 제관들은 신위 양쪽에 촛불을 밝히고 2차 진설(비닐을 벗기고 밥과 국을 올림)을 한 후 제례가 시작됐다. 제례 순서는 기제사와 같았는데 삼상향, 강신례, 초헌례, 축, 아현례, 종헌례, 첨작례, 유식례(삽시정저), 진다례, 음복례 순으로 지내는데 마지막으로 소지를 올리는 것이 기제사와 다르다. 본당 축문은 초군청 총무가 독축하는 데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계사정월 정미삭십삼일 기미경주손병연 감소고우 비봉산순흥본당 신령근이앙고 순흥도호부 태평안녕상향
(維歲次 癸巳正月丁未朔十三日己未 慶州孫炳然 敢昭考于 飛鳳山順興本堂神靈謹以仰告 順興都護府太平安寧尙饗)
끝으로 제관들은 소지를 올리는데 “이소지는 ○○○의 소지올시다” 라고 중얼거리며 올린다. 제일 먼저 대통령, 도지사, 시장, 국회의원, 면장, 조합장 등의 이름으로 올리는며 나라의 통일과 번영, 지역민의 평안과 풍년농사 등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린다. 그리고 난 후 개인별 소원이나 가족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소지도 올린다. 소지 올리기가 끝나면 퇴주한 술을 술할미(신위 동편에 있는 사람 머리만한 돌)에게 붓는 것으로 본당제는 끝난다. 제례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하는데 막걸리를 한 잔씩 돌린다. 이날 올린 폐백과 고깔, 실타래는 다음해 까지 그대로 둔다. 비봉산 본당 제례가 끝나면 초군은 성화상자를 선두로 제물을 지게에 지고 본당 주인댁으로 향한다. 옛날에는 걸어서 1시간 가량 걸렸지만 지금은 차로 10여분 만에 본당 주인집에 도착한다. 본당주인집 대문 앞에는 본당주인 부인이 짚단을 세워 불을 붙이고 잡귀를 쫒는 의례를 행하는데 초군들은 불을 타넘으면서 잡귀를 불사르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성화가 집에 도착하여 잡귀를 불사르는 모습
집안에서는 본당주인 부인과 부녀자들이 합장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성화를 맞이한다. 성화가 방에 도착하면 본당주인이 성화를 끈다. 모든 제관은 방으로 들어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음복을 나눔으로서 본당제의 모든 순서는 끝나고 이 후는 상당(금성대군당) 성황제 준비에 들어간다.
6. 두레골로 출발의식
음력 정월 14일 새벽 2시 좌상과 제관들은 8Km 쯤 떨어진 단산면 사천2리 띄기마을로 어른을 모시로 떠난다. 어른 앞에 도착한 제관들은 어른께 재배하고 아침 식사를 올린다. 새벽 3시 반 경 어른을 모시고 좌상댁 대문 앞에 도착하면 좌상 부인(우정녀)과 본당부인(이길근)이 멍석을 깔고 냉수 한 그릇을 소반에 차려 놓은 다음 어른을 향해 큰절을 네 번 올린다.
좌상 부인이 어른께 재배
어른이 좌상댁 집앞을 출발하는 의식을 ‘어른 출타하신다’라고 하는데 4시 정각 제례 행렬이 좌상댁 대문 앞을 출발한다. 두레골로 출발할 때 성화(聖火,성스러운불, 참기름불)가 제일 앞서는데 이는 올림픽 성화 봉송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좌상댁 사랑방에서 점화된 성화는 상자에 안치되고 초군에 의해 봉송된다. 맨 앞차에 성화와 좌상이 타고 그 다음차에 어른과 본당주인이 그 다음차엔 제관들, 그 뒤를 이어 참제자, 취재진들이 뒤를 따른다. 좌상집 앞에는 좌상부인을 비롯한 제관 부인들이 합장하고 절을 하며 두레골 성황제가 무사히 잘 치러지기를 기원하는 데 제례 행렬이 보이지 않을 때가지 절을 한다.
여기서 성화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성화(聖火)’라는 이름은 필자가 붙였다. 본당주인과 좌상에게 “이 불의 이름이 있느냐”고 물의니 “신성서러운 불이라”고 했고 또 “종짓불, 접싯불”이라고도 했다. 모든 의식에는 의식을 밝히는 불이 있다.
아마도 초군들은 기름 중에 가장 귀한 참기름으로 불을 밝히면서 정성스런 성황제를 올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올림픽 성화도 같은 의미인 것 같아서 초군들의 생각이 참으로 깊고 선진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화상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신성스러운 것이 참으로 많다. 성화는 쌀 서되 세 홉으로 편(백설기)을 만들었고 그 위에 성화 종지를 안치한 다음 불이 꺼질 가봐 미역으로 편을 한 바퀴 둘러서 바람막이로 사용하고 있다. "왜 미역을 둘렀느냐“는 질문에는 “전해오는 예”라고 답했는데 문헌에는 미역으로 국을 끓여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성화는 제례 의식이 모두 끝날 때 까지 상당을 밝히고 집에 도착하여 끄게 된다. 여기서 참기름 성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가장 귀한 분에 대한 예라고 볼 수 있다.
7. 목욕의례
제례 행열은 순흥면을 빠져나와 소수서원과 선비촌 앞을 지나 단산방향으로 향한다. 질막재를 넘어 단산면 단곡2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두레골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좁은 길로 이어져 가다보면 단곡3리 웃질막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목욕소에 이르게 된다. 제례 차량들은 모두 도로변에 정차한다. 이곳은 좌상댁(순흥)에서 약 7Km 쯤 떨어진 지점으로 옛부터 제관들이 얼음장을 깨고 목욕하는 곳이다.
지금은 차로 이동하지만 옛날에 걸어서 올 때는 선비문화수련원 앞에서 좌측 골짜기로 올라가다가 잔고갯재를 넘어서 이 목욕소에 이르게 되는데 빨리 걸어도 2시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어른(소)이 밤길을 걸어갈 때 잘 걷지 못하면 “어른요, 천천히 쉬어서 가시더” 라고 말하기도 하고 “시간이 바쁘니 좀 빨리 가시더” 라고 하면서 이곳에 이른다고 한다.
2013년(계사년) 음력 정월 14일 새벽은 영하 8도의 추운날이었다. 제관들은 목욕소 옆 냇가에 불을 피우고 5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정각 5시에 상당주인부터 차례로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목까지 물에 잠기면 “어이- 시원하다” 라고 소리지르고는 물 밖으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는다. 그 다음은 본당주인이 목욕을 하고 다음은 제관 3명이 차례차례 목욕을 하고 나오는데 모두 다하는데 30분 정도 걸린다. 그 다음은 참제자와 취재진들도 모두 목욕를 해야 하는데 두레골 성황당 금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목욕의례를 통과해야 한다. 그날 MBC 대구방송 기자들과 영양박물관, 영주시민신문 기자 등 모든 취재진들도 잠시 잠깐이지만 목욕재계하고 취재에 임했다. 어느 해는 여성 기자가 취재차 왔었는데 목욕의례를 하지 않아 두레골 성황당 금줄 안으로 오르지 못하자 울고불고 야단이 나서 좌상이 보는 앞에서 양말 벗고 발을 담그고 웃옷만 벗고 세수한 후 취재에 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목욕 의례
8. 어른을 모시고 성황당에 오르다.
목욕의례가 끝나면 5시 30분 쯤 된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6시 20분경 먼동이 트기 시작하자 어른을 모신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6시 50경 상당 앞에 도착했다. 상당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어른을 모시는 일인데 좌상은 트럭 뒤로 가서 문을 열고 어른을 인도하는데 어른이 차에서 내릴 때 “어른요, 천천히 내리시이소” 어른이 차에서 내리면 “이쪽으로 오시이소”라고 하면서 어른을 참나무 아래로 모신다.
어른을 모신 후 성황당 마당에 불을 피워 추위를 녹히는데 요즘 학생들이 야영수련할 때 캠프파이어 하는 것과 같이 장장 18시간 동안 캠파이가 계속된다.
어른 모시기
9. 부정을 풀기와 성화 안치
“부정을 풉니다” “온갖 잡신을 물러나시오”
순흥초군청 김낙임 좌상은 바가지에 담은 물을 솔가지로 뿌리며 산신각과 상당 둘레를 돌면서 부정을 푼다. 좌상은 혈석에 두른 헌 금줄과 폐백을 걷어내고 새금줄을 두른 다음 폐백을 드리고 실타래를 건다. 집사가 성화를 봉송하여 혈석 앞에 안치한 다음 그 앞에 냉수 한 그릇을 올린다.
성화 안치
본당례가 끝나면 산신각으로 가서 작년에 드린 폐백과 실타래를 걷어 내고 새로 마련한 폐백과 실타래를 건 다음 냉수 한그릇을 올린다. 이제 제관들은 모두 협동하여 금줄을 치기 시작한다. 금줄은 왼새끼줄에 50Cm 간격으로 문종이(리본모양)를 끼운 것으로 금성대군당에 8발, 본당으로 오르는 입구 나무에 8팔, 산신각에 6발로 산신각 주변 8발 도합이 30발의 금줄이 쳐진다.
혈석, 성화, 냉수
10. 희생제의(犧牲祭儀)
희생제의는 두레골 성황제에서 가장 정성을 드리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의례이다. 제관들은 ‘제물돋우기’라고 부르는 희생제의를 행하는데 옛날에는 ‘재인'이라 하여 신분이 낮은 사람이 하였으나 지금은 도살(屠殺) 전문인인 와서 희생물을 살(殺)하는 행위인 ‘어른지우기’와 희생물을 제당에 바칠 수 있게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은 이날 오전 9시 경 부터 시작하여 3시간정도 걸렸다. 이 과정을 마칠 때까지 제관들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진행과정을 지켜보거나 제물 진설에 협력한다.
해체과정인 ‘돋우기’는 가죽을 벗겨 내면서 각 부분을 해체하는 것으로 ‘각뜬다’라고 한다. 본당 주인인 좌상은 가장 먼저 떼어낸 앞다리를 산신각 옆 나무에 매달고 간, 염통, 허파, 지라 등 내장은 옹가지(넓은그릇)에 담아 상당에 올린다. 그 다음부터는 일정한 규격으로 각을 떠주면 제관들이 적당한 양을 끈으로 묶어 상당으로 이동하게 되고 상당에서는 좌상이 상당 좌우 벽면에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소 한 마리를 모두 상당에 진설(쌓는다)하니 상당은 제물(소고기)로 꽉차 아주 특별한 제례임을 보여준다.
소 한 마리 모두 진설
11. ‘새앙’올리기
‘새앙’이란 말은 사전에도 없고 한자도 없다. ‘새앙’은 초군에서 전해 오는 말로 아마도 ‘새옹에 지은 밥을 ‘새앙’이라 하지 않나’하고 추정하고 있다. 새옹은 놋쇠로 만든 작은 솥으로 요즘 많이 사용하는 돌솥밥 그릇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나무꾼들이 나무를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산신각 앞에서 새옹에 밥을 지어 먹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새앙례는 옛날 나무꾼들이 새옹에 밥을 지어 먹기 전 “고시네” 하면서 밥 한 숱가락을 산신께 올렸다는 데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물돋우기’가 끝나면 새앙을 준비한다. 통나무를 세워 불을 피우고 숯불에 밥을 지어 오시(11-13시) 경 산신각에 새앙을 올리고 유시(17-19시) 경엔 상당에 새앙을 올린다. 제관 5명이 각각 새옹에 밥을 짓는데 현재는 노란색 양은냄비를 새옹으로 대용하여 밥을 짓는다. 제관들이 새옹에 밥을 지을 때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새옹은 돌을 쌓아 걸어야 한다는 것과 장작숯불로 밥을 짓는데 밥물이 끓어올라도 절대 뚜껑을 열지 않고 솔가지로 뚜껑에 물을 뿌린다는 것이다. 밥이 다 지어지면 제관들은 각자 새앙을 들고 산신각으로 가서 산신위 앞에 새옹 뚜껑을 열고 갈대로 만든 젓가락을 새앙에 걸친다.
산신각 새앙 올리기
상당 새앙 올리기
10여분 지난 후 새옹을 들고 내려와 제관들이 음복을 하는 것으로 점심 식사에 대신한다. 해질 무렵에 새로 밥을 지어 이번에는 상당에 새앙을 올린다. 예전에는 점심과 저녁 두 차례 산신각과 상당에 새앙을 올렸는데 최근에는 간소화되었다고 한다. 상당 새앙은 저녁 식사와 겸하게 되고 새앙이 끝나면 밤 12시까지 내장과 고기를 삶아 술안주 하여 전담을 나누기도 하고 제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
12. 상당 본제사
시계가 없던 당시 제의 시작 시간은 정원대보름달이 상당 앞 나뭇가지에 걸리는 나무시계를 사용했다고 한다.
제관과 참제자들은 열나흗달을 보며 달이 상당 앞 소나무 끝에 걸리기를 기다린다. 어느덧 달이 중천으로 떠올라 자시(23-01)가 되니 헌관과 참제자들이 두레골 계곡물에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다.
금성대군당의 진설 모습
좌상은 희생제물 외 제수(기제사와 같음)를 마지막으로 진설하고 나면 시각은 밤 12시에 이르고 제례가 시작된다.
밤 12시 상당제
초헌관(좌상 김낙임)의 삼상향과 참신에 이어 초헌례를 올린 후 모두 부복하면 축관(박종찬)이 독축을 한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계사정월정미삭 십오일신유 의성김낙임 감소고우 소백산두레골신령근이앙고 단종조충신금성대군정민공 절의충절여만고강상 순흥도호부초군공신전헌상향
(維歲次 癸巳正月丁未朔十五日辛酉 義城金洛林敢昭考于 小白山頭來谷神靈謹以仰告 端宗朝忠臣錦城大君貞愍公 節義忠節餘萬古綱常 順興都護府樵軍恭伸奠獻 尙饗)
아헌례(본당주인 손병연)와 종헌례(손기영, 박종찬, 임병상) 그리고 특별례로 김진영
부시장과 김정현 소수서원관장이 헌작했다. 첨작례, 유식례, 진다례를 올리고
제배한 후 헌관과 참제자들이 소지를 올렸다. 18년 째 성황제를 주관한 손병연
(아헌관)본당주인은 “첫 번째 소지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소지올시다” “국태민안과 국민행복을 비나이다” 로부터 시작하여 김관용 도지사, 김주영 영주시장, 장윤석 국회의원, 순흥면 기관단체의 이름으로 소지가 올라가고 재해방지와 풍년을
기원했다. 수 백장의 소지가 상당 처마를 타고 오르니 아주 특별한 성황제임을
실감케 했다.
소지 올리기
소지 올리기가 끝나면 철상을 하고 제수로 올린 고기를 포대에 담는다. 밤 1시경 제관들은 성화를 선두로 제례도구와 물품을 싣고 좌상댁으로 이동한다. 좌상댁에 도착한 성화는 좌상에 의하여 소화하게 되는 데 24시간동안 불을 밝히는데 참기름 2홉(400ml)쯤 소모되었다고 한다. 김 좌상은 촛불을 끄면서 “성화가 이동 중이나 상당에서 한 번도 꺼지지 않았으니 올해는 큰 행운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면서 만족하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로써 정월 초사흗 헌관선정회의로부터 시작된 초군청 성황제는 정월 보름 두레골 성황제를 끝으로 13일 간의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다.
제례가 끝난 후 김낙임 좌상은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두레골 성황제에 영주시와
소수박물관, MBC대구방송, 영주문화유산보존회, 영주시민신문, 영양박물관, 영주좋은영상 등에서 많은 관심과 지원을 보내줘서 힘이 난다”고 하면서 “전통을 보존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초군청 후계자들이 적극적인 참여를 보이고 있고 영주시의 지원·보존·무형문화재 지정 추진 등이 있어 더욱 힘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13. 순흥초군청 민속행사 대축제
두레골 성황제를 마친 시각은 밤 3시 경으로 제관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가 아침 7시 경 좌상댁으로 다시 모여 음복준비를 한다. 아침 식사시간에 맞춰 마을 사람들은 좌상댁으로 초대한다. 마을 사람들은 음복을 나누면서 그동안의 노고를 격려하고 좌상 부인 등 부녀자들의 손길에 감사인사를 한다.
음복을 마친 마을 사람들은 순흥초군청 정월대보름 민속행사가 열리는 선비촌 광장으로 간다. 선비촌 행사장에서는 김주영 시장, 장윤석 국회의원, 박남서 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과 순흥면민, 관광객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을 열고 이어서 두레골성황제 음복의례, 풍물공연, 관청세시풍속재현, 순흥도호부사행차, 성하성북줄다리기, 민속놀이체험, 초군청농악놀이 등이 열려 하루 종일 축제가 열린다.
순흥초군청 민속제
Ⅲ. 끝맺으며
순흥 초군청이 주관하는 두레골 성황제는 우리나라 성황제 중에서 가장 특이한 점이 많은 성황제이다. 정월 초하룻날 선비촌 민속행사장에서 만난 박백수(전 좌상) 순흥초군청민속행사추진위원장은 “두레골 성황제 같은 우수한 무형문화재가 있지만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해 안타깝다”고 하면서“인근 시군은 무형문화가 2-3개 있는데 영주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정월대보름 민속행사 개막식에서 장윤석 국회의원은 “순흥초군청 두레골 성황제와 정월대보름 민속행사는 무형문화재 지정은 물론이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가치가 있는 우수한 문화유산이다”라고 말했다.
두레골 성황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자락길 안내 표지판에는 「두레골 성황제는 제물로 황소 한 마리는 바치는 것과 성화를 밝히는 것, 엄동설한인데도 얼음을 깨고 목목재계 하는 것, 새앙을 올을 것 등 제의가 원형이 변질 되지 않고 있어 무형문화재 지정으로 손색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영주시장과 지역 국회의원, 영주문화원, 시의회, 순흥초군청이 합력하여 조속한 시일 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추진하여 초군청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또한 오늘 유계학술발표회가 두레골 성황제의 무형문화재 지정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