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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35] 영주시 고현동 아랫귀내

단산사람 2014. 11. 30. 18:05

소고 사당 · 의소세손 태실이 있는 마을 ‘아랫귀내’
우리마을 탐방[35]고현동 아랫귀내
[497호] 2014년 11월 20일 (목) 18:36:22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 고현동 마을전경
6070 세대들의 추억의 귀내보트장
동소나무 동제, 마을 안녕 기원

고현동 아랫귀내 가는 길
서천사거리에서 순흥방향으로 200m 쯤 올라가면 Y자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우측으로 약 100m 쯤 가면 가흥정수장이 나오고 이어서 철도건널목을 건넌다. 여기서부터 고현동 ‘아랫귀내’다. 소나무 빼곡한 산줄기가 두 팔을 벌려 마을을 감싸 안고 있어 아득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는 마을이다.

집들은 산자락을 따라 길쭉하게 자리 잡았고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새마, 귀내보트장, 귀내본마, 사당마, 태봉마 등 산줄기와 언덕을 경계로 마을 이름이 구분된다.

   
▲ 마을표석
몇 개 안 남은 단풍잎이 가을을 붙들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던 지난 9일 아랫귀내를 찾았다. 이 마을 경로당 앞에서 권영동 통장, 박찬일 전 노인회장, 박찬우 소고 종손, 박유서 반남박씨 종친회장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의 유래
지금부터 500년 전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 반남박씨 형(珩)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터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마을 앞 둔덕에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로 시냇물이 유유히 흘러 풍광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 괴(槐)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괴천(槐川)’ 또는 ‘괴내’ 라 부르기도 하고, 오래된 나무라고 해서 옛 고(古)자에 내 천(川)자를 써서 ‘고천(古川)’ 또는 ‘고내’라고 부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귀내’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고현동의 유래는 이렇다. 귀내에서 순흥 방향으로 약 1.2 km 쯤 가면 ‘장수고개’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에 소금장수와 생선장수들이 등짐을 지고 산고개를 넘나들었다고 하여 장수 상(商)자에 고개 현(峴)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상현(商峴) 또는 ‘장수고개’라 불러왔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고천(古川)의 고(古)자와 상현(商峴)의 현(峴)자를 따서 ‘고현(古峴)’이라 했다고 한다.

서천의 발원지 귀내
영주는 동(東)에는 내성천이 흐르고 서(西)에는 서천이 흐른다. 서천의 시작은 귀내다. 서천은 초암사에서부터 흘러 온 죽계천과 순흥 태장에서 흘러 온 홍교천, 그리고 죽령과 희방사 계곡에서부터 흘러 온 남원천 등 세 물길이 귀내에서 만나 ‘서천’이 된다.

귀내에서 발원한 서천은 구성산을 굽이돌아 휴천으로 흘러가다가 무섬마을에서 동천(내성천)을 만나 내성천이란 이름으로 흘러가서 낙동강에 합류된다.

   
▲ 소고사당
소고 사당과 종택
귀내에는 영남 제1의 선비로 손꼽고 있는 소고 박승임의 사당과 종택이 있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은 영천군 두서리(杜西里, 斗西里) 현 ‘뒤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원당마을과 한정에서 보내면서 학문을 익혔고, 1540년(중종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의 관직생활과 목민관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는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다.

   
▲ 육우당
소고 사당은 원래 두서(뒤새)에 있었는데 귀내보트장 인근 산자락으로 옮겨졌다가 수해로 터가 훼손되어 해방 후 현재 위치로 이건했다고 한다. 사당 옆에 소고 종택이 있다. 종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양옥 2층 건물이다.

100년 전에 지은 한옥이 허물어지는 바람에 30년 전 2층 슬라브집을 지었다고 한다. 사당과 육우당(정자)은 한옥이다. 박찬우 종손은 “국내외 사학자·교수들이 이곳을 많이 방문하고 있는데 종택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며 “한옥 종택으로 재 건립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괴정

   
▲ 태봉
의소세손 태실
귀내마을 경로당에서 마을 안 쪽으로 들어가면 ‘괴정(槐亭)’이란 정자가 있고 그 동편에 혼자 우뚝 솟아있는 작은 산봉우리가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봉을 ‘태봉’이라 부른다. 이 태봉은 영조대왕의 왕세손의 태실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소생 의소세손[懿昭世孫, 휘(諱) 정]의 태실인 것으로 2008년 확인됐다.

의소세손은 영조 26년(1750)년에 태어나 1751년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1752년 요절했다. 이 곳에 있던 태와 태비는 일제가 조선 왕실의 기운을 꺾으려고 서삼릉(경기 고양)으로 옮겨 갔으며 현재 태석(태봉의 정상)만 노출 된 상태로 남아 있어 흙을 덮어 두었다.

서삼릉 태실출토 태지명문에 의하면 의소세손의 태는 영조 26(1750)년 8월 17일 탄생하였으며 12월 25일 태를 영천(영주)에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60년대 귀내보트장
귀내보트장의 추억
1960~70년대 유원지가 없던 당시 ‘귀내보트장’은 청춘남녀들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고 화전놀이를 하거나 계모임을 하는 등 영주 제1의 관광명소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연못도 축소되고 보트 타는 사람도 없어 지금은 매운탕식당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귀내보트장 새 주인 고상민(46) 씨는 “못 둘레를 공원으로 꾸며 캠핑장을 만들고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을 준비 중”이라며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시설을 완비하여 옛 명성을 다시 찾겠다”고 말했다.

핑구재 전설
마을 입구에서 관사골(영광여중)로 넘어가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2차선 도로로 포장됐다. 옛사람들은 이 고개를 ‘핑구재’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겨울에 풍기에서 내리치는 찬바람이 이 고개를 스치면서 핑핑 소리를 낸다고 하여 고개 이름을 ‘핑구재’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 동소나무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동소나무
귀내보트장 동편 산자락에 수백 년 수령의 동소나무가 있다. 이 마을 권영동(67) 통장은 마을의 자랑 첫째를 동소나무로 꼽았다.

“시내지역에서 동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은 우리마을 뿐”이라며 “우리마을은 정월대보름날 자시(子時)에 동소나무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고 했다.

정초에 제관을 정하고 도가를 정해 정성껏 장만한 제수로 동제를 올린다고 한다. 갑오년(2014) 동신제 제관과 집사는 다음과 같다. 제관 공동석, 축관 박동서, 도감 박남댁·감호댁, 건립 권재현·이동욱·황진오·편창호 등이다. 이튿날은 음복을 나누고 윷을 논다.

   
▲ 권영동 통장
   
▲ 박찬일 전 노인회장

아랫귀내 사람들
아랫귀내에는 124세대에 300여명이 살고 있으며 노인인구는 70여명 된다고 한다. 박찬일(83) 전 노인회장은 “예전에는 반남박씨가 30여호 넘게 살았지만 지금은 15호 정도 산다”고 하면서 “권영동 통장을 중심으로 합력하여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 박찬우 소고종손
   
▲ 박유서 종친회장

이 마을 임매희(64)씨는 “우리 마을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선비술이 있다. 노란빛이 아름다운 ‘오정주’는 솔잎, 구기자, 천문동, 백출, 황정 등이 골고루 들어가 몸의 기운을 북돋우는 영주 대표 술”이라고 했다.

권영동 통장은 “우리마을에는 억대 선진농업경영인이 두 사람 있다. 박동서(60대)씨는 대농으로, 박찬웅(50대)씨는 약용버섯재배로 억대 수익을 올리는 농가”라고 자랑했다.

   
▲ 권태임 할머니
   
▲ 김필희 씨
이 마을 권태임(84) 할머니는 “6.25 전쟁 중에도 마을을 지켰고, 보릿고개를 넘으면서도 살아남았다”고 했고 김형윤(69)씨는 “베풀고 나누는 인심 좋은 전원마을”이라고 자랑했다.

   
▲ 남갑순 씨
   
▲ 김형윤 씨
김필희(80) 할머니는 “20살에 번계에서 시집와 60년을 귀내서 살았다”며 “귀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했다. 5년 전 이 마을로 이사 왔다는 남갑순(78)씨는 “우리 경로당은 편하고 행복한 경로당”이라며 “함께 밥해먹고 고스톱도 치고 운동도 같이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우면서 재미있게 지낸다”고 했다. 
   
▲ 임매희 씨
   
▲ 고상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