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고향의 봄’ 보내는 금광1리(깊으실) | ||||||||||||||||||||||||||||||||||||||||||||||||||||||||||||||||||||||||||||||||||||||||||||||||||||||||||||||||||||||||||||||
우리마을탐방[56]평은면 금광1리(깊으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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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다고 ‘깊으실’ 깊은 수궁(水宮) 속으로 평은면 금광1리(깊으실) 가는 길 영주댐 담수를 앞두고 평은초와 면사무소, 보건소, 치안센터가 평은리로 이주하고 이제 남은 집은 가정집 열 집 정도와 우체국, 농협지소만 남아 있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지금 고향에서 마지막 봄을 보내고 있는 섬이다. 이제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 집들은 철거되고 곧 담수가 시작될 것이다. 마을은 물속에 잠기지만 마을사람들의 기억을 모아 ‘깊으실’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지난 13일 오전 ‘깊으실’로 달려갔다.
역사 속의 깊으실 조선 중기 때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주지(榮州誌)에 의하면 금광1리 지역은 영천군 남면 진혈리(辰穴里)에 속했다. 진혈리 속방(屬坊)에는 금광(金光)[금강마을], 유점(鍮店)[놋점], 검암(儉巖), 묵암(默巖), 송평(松坪), 탄산(炭山)[문수], 조제(助梯)[문수]와 청령(請靈)과 멱곡(覓谷)[멱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광방(金光坊)은 조선 후기에 와서 진혈면 금광리가 됐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 천상면(평은, 동막, 금계지역)과 진혈면(금광, 유점지역)을 통합하여 ‘평은면’이라 칭하고 깊으실은 영주군 평은면 금광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인동장씨 깊으실 이거 유래 조선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 장말손(張末孫)의 증손인 장수희(張壽禧, 1516-1586)가 화기리에서 분파된 후 그의 아들 사계(沙溪) 장여화(張汝華,1566-1621)가 처가인 안동 내앞(川前)으로 자주 오가면서 마음속으로 정착지를 결정해 둔 곳이 금강(錦江, 금광2리)이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작고하자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4남 용경(龍慶, 漫然軒)이 1628년에 전계(箭溪, 조암동)에서 이거하였고, 이어서 3남 용현(龍見, 果毅校尉)이 1634년에 이거하여 금강마을을 이루었다. 그 후 금강에서 용강(龍江, 기프실 앞 유원지)으로 이거는 조선 인조(仁祖, 재위1623~1649) 때 용현(果毅校尉)의 둘째 아들 섭(王+燮)과 용강(漫然軒)의 일곱째 아들 유(瑜)에 의해서다. 그 후 섭과 유의 후손이 국도 5호선이 개통될 무렵인 1920년 경 용강에서 깊으실로 이거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거 당시 이곳에는 약간의 가구가 거주했다는 정황이 전해지고 있다.
깊으실의 연원(淵原) 금광1리는 심곡(深谷), 지포(芝浦), 깊으실로 통칭되고 있다. 깊으실은 아마도 심곡을 한글화(深 깊을 심, 谷 골 곡)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 왜 ‘깊으실’이 되었을까. 문수산에서 시원한 내성천이 얕은 여울로 흘러오다가 이 마을 부근에서 갑자기 깊어지기 때문에 ‘깊으실’이라 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마을이 내성천보다 낮아 ‘깊으실’이라 했다는 설과 골(谷)이 깊다고 해서 ‘깊으실’이라 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내성천 운포구곡(雲浦九谷)과 관련한 또 다른 연원도 있다. 옛 선조(1700년대)들은 운포구곡의 제9곡을 ‘지포(평은유원지 근처)’라 했다. 인동장씨 선조 와은(臥隱)선생 구곡시(九曲詩)에 의하면 ‘구심곡(舊深谷)’이라 하였으니 심곡은 ‘지포’보다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온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은면 100년사(史) 면사무소가 떠난 건물에는 아직 ‘힐링중심 행복영주’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다. 평은면사무소는 지난 3월 영주호이주단지로 이전하여 지난 4월 10일 새 청사에서 개청식을 가졌다. 면사무소는 1914년 3월 1일 개소(초대면장 김호영)하여 제45대 정기대 면장까지 100년 역사를 남기고 깊으실을 떠났다. 지역 원로들에 의하면 당시 평은리 교회 자리에 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착취와 부역 등에 시달린 마을 사람들은 면사무소 유치를 반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국도 5호선의 개통과 중앙선 철도의 개통 등 금광리가 교통의 중심로 떠오름에 따라 면사무소를 금광리로 이전했는데 이전 시기에 대해선 기록에 없다.
개교 90년 평은교육사 평은초는 2013년 12월 옛 영은초(평은리) 자리로 이전했다. 평은초 교사(校舍)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컨테이너 몇 동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2년 6월 1일 평은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평은면 문수면 일대의 학생들이 이 학교에 다녔다. 1938년 평은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평은공립국민학교, 1946 평은국민학교, 1995년 평은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1960-70년대에는 전교생 700명이 넘는 큰 학교였으나 1990년 이후 농촌인구 감소로 소규모 학교가 됐다. 2011년 영주댐 수몰로 폐교 위기에 이르렀으나 동창회의 노력으로 유지 결정됐고, 현재는 재학생이 40여명에 이르고 있다.
평은지서의 역사 평은지서 건물은 철거되었고 도로변 바리케이드가 옛 ‘평은지서’였음을 알려준다. 평은지서 연혁에 의하면 1907년 한일합방 전 일제가 송리원 시설관리를 명목으로 송리원에 헌병분경소를 설치했다고 하니 평은지서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42년 금광리에 경찰관주재소 설치, 1945년 해방 후 평은지서로 개칭, 1995년 평은파출소로, 2003년 8월 남부지구대 평은치안센터로, 2004년 신영주지구대 평은치안센터로 개편되었다가 이주단지로 이전했다.
평은농협과 평은우체국 평은농협과 평은우체국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은농협은 1970년 평은리농협협동조합으로 발족했다. 1975년 종합시설을 신축하고 연쇄점을 개점했다. 1983년 평은농업협동조합으로 명칭이 병경되었다가 2005년 10월 1일 영주농협과 합병했다.
평은우체국은 1965년 별정우체국으로 개국하여 집배원이 마을마다 집집마다 기쁜소식을 전했고, 전화가 없던 시절에 전보를 전해주는 등 주요 통신기관이었다. 90년대 이후 우편업무가 감소되면서 집배원 제도는 없어졌고 지금은 택배업무가 늘어났다. 영주농협평은지소와 평은우체국은 수몰을 앞두고 올 9월 경 평은리로 이주할 계획이다.
‘깊으실’에 남은 사람들 조덕래 이장은 “이주 전(2012)에는 50여호에 200여명이 살던 마을”이었다며 “이제 마을 사람들이 떠나면 담수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기 새마을지도자는 “금광1리는 물속에 잠기지만 금광·동호이주단지를 합하면 금광리는 명맥을 이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부터 평은정류소와 슈퍼를 운영해 온 신수학·석희자 부부는 “2012년 상반기까지 버스매표를 하고 사람들도 많이 드나들었으나 2013년 이후 차도 사람도 급격히 줄었다”고 하면서 “이주단지 단독주택으로 이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을 경로당에는 어르신 네 분이 끝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다. 김노미(82), 하기분(77), 석오길(84), 이영옥(72) 어르신들은 “다 떠나고 넷 뿐”이라면서 “살던 집이 무너지고 영감 손때 묻은 창고가 철거될 때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임대주택이 완공되면 모두 그리로 간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옛 지서 근처에 살았다는 장태윤(77) 어르신은 “옛날에는 길 아래 낮은 곳에 마을이 있었고, 구마이재는 전 보다 많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깊으실에 살다가 수몰지구를 피해 길 위로 이사한 장도생(87) 어르신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 수몰지역을 피해 산중턱에 집을 지어 이사 왔다”고 했다. 최순예(67)씨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1980년대)는 학생수가 400명이 넘었고, 학교 앞에는 가게와 식당이 즐비했다”고 말했다.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취재에 적극 도움 주신 조덕래 이장님, 신수학씨, 강병호 이주대책위원장님, 장태홍(향토사학자)선생님, 신수현(신광마을) 어르신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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