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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마을 전경과 옛모습 | 인동장씨 장여화가 터를 잡아 400년 간 세거 “귀한 터 지키지 못해 조상 뵐 면목 없어”
평은면 금광2리(금강마을)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안동방향으로 가다가 평은리에서 내려 평은면사무소가 있는 금광1리로 간다. 금광1리(기프실)는 영주댐 수몰로 학교는 흔적만 남기고 평은리로 이주했고 면사무소와 우체국, 농협, 버스정류소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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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정 |
버스정류소와 우체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마을 가운데를 통과하여 구마이재를 넘으면 옛 평은역이 나타난다. 철길은 철거되고 역사(驛舍)는 골조만 남아있다. 멀리 금광교 건너 금강마을이 보인다. 불그레 가을빛을 머금은 금강마을은 아무 일도 없는 듯 가을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을 앞 산등성이에는 이 마을 17집이 이주할 택지조성 작업이 한창이고 영주댐이 만수되었을 때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잇는 현수교(용두교·용미교) 교각 공사도 진행 중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지난달 25일 오전 금강마을에 갔을 때 마을회관에서는 장이덕 이장, 장긍덕 이주대책위원장, 마을원로 장복화(74)·장문경(70)·장우덕(77)씨 등이 건축업자를 초청하여 건축에 대한 자문을 받으며 이주대책을 숙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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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헌 |
금강마을의 유래 금강마을은 조선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 장말손(張末孫)의 증손인 장수희(張壽禧, 1516-1586)가 화기리에서 분파된 후 그의 아들 장여화(張汝華,1566-1621)가 400여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마을 표석에는 조선 선조 때 사계(砂溪) 장여화가 전계(箭溪)에서 안동 내앞(川前)으로 가던 중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있는 승려를 구한 일이 있었다. 훗날 이 노승은 은혜 보답의 뜻으로 이 터를 잡아 주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계 장여화는 광해군 때 세월이 어수선함을 한탄하여 출세를 단념하고 이곳 금강마을 언덕에 심원정(心遠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글을 읽으면서 자연을 벗하며 지내고자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작고하자 공의 유지를 받들어 4남 용경(龍慶, 漫然軒)이 1628년에, 3남 용현(龍見, 果毅校尉)이 1634년에 뒤따라 입향했다.
행정구역으로 본 금강마을은 조선조 중기에는 영천군(榮川郡) 남면 진혈리(辰穴里)에 속했고 그 후 영천군 진혈면 금강방(錦江坊)이라고도 하다가 조선조 후기에는 영천군 진혈면 금강촌(錦江村)으로 불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주군 평은면 금광리로 개칭됐다.
고려시대 때 ‘금강사’라는 절이 있었다 입향조 장여화가 안동 처가로 가는 길에 만난 스님은 금강사(金剛寺) 스님으로 확인됐다. 지역민들은 이 마을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미륵불 등이 있어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2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영주댐 수몰지역 발굴문화재’ 중에는 고려말(1189)에 제작된 광명대(원판형 등잔받침) 테두리에 금강사(金剛寺)라고 새겨져 있어 전설 속의 절은 ‘금강사’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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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고택 |
한폭의 비단 같은 아름다운 금탄 금강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은 봉화 문수산에서 발원하여 1백여리를 흘러 이곳에 이르러 태극모양을 그리며 마을을 휘감아 흐른다. 그 모습이 한 폭의 비단을 펼친 듯 곱고 아름다워 ‘금강’이라 불렀다. 옛 선비들은 금강마을을 중심으로 빼어난 절경 아홉 곳을 정해 ‘운포구곡(雲浦九曲)’이라 했다, 구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 금강마을 앞 금탄(錦灘)이다.
제7곡 금탄은 아침저녁 햇살을 받을 땐 찬란한 여명(黎明)을 이루고 물여울은 비단을 드리운 듯 아름다운 광채를 발했다. 그래서 사계 선조의 손자 장신(張t신)은 호(號)를 금강(錦江)이라 했다고 한다. 이러한 금강마을은 명당 중 명당으로 명성이 높았고 입향 후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으며 근현대까지 국가적 인물들이 많이 탄생하여 인동장씨는 영주 향중의 중심 문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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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댁 |
금강마을 문화재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운곡서원유허비가 있다. 금강마을 선조들은 현 영주댐 근처 운곡에 서당(1723)을 세워 강학을 시작했고 운곡서원으로 승격(1780)되어 장여화와 장진의 위패를 봉안했다. 마을회관 옆에 있는 심원정(문화재자료 제578호)은 장여화가 세속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은거를 꿈꿨던 정자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인동장씨 고택(제233호), 만연헌(제568호), 장석우 가옥(유형문화재 제341호), 동편 강가에 의관댁(문화재자료 569호) 등 지정문화재와 영강정, 직방재, 금강사지, 서낭당 등 비지정문화도 있다. 이 문화재들은 지금 폐허 상태로 있다. 2015년 이후 수몰문화재 이주단지를 조성하여 이건하게 된다고 한다.
만연헌(漫然軒)의 종부 만연헌은 금강마을 입향조 장여화의 넷째 아들인 장용경이 건립한 정자다. 정자 뒤에 단아한 한옥기와집 한 채가 있다. 여기서 만연헌공의 12대 종부 김필현(79, 의성김씨) 여사를 만났다. 22세 때 안동 내압에서 외나무다리 건너 가마타고 시집 왔다는 김 여사는 “우리 선조들은 조상숭배에 일심전력 다하셨고 후손(가문)을 지키는 일과 가정교육이 매우 엄했다”며 “선조들이 남긴 집과 심은 나무들, 책읽는 소리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훈계말씀들이 들려오는 듯한데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려니 눈물이 앞선다”며 한참동안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여사는 시문에도 밝아 내방가사 한 수를 선사했다. “부석사 유람차로 만척청산 옥포동에, 준령태산 거행하니 고본절벽 학소대라…생략” 김 여사는 또 “여기서 나는 곡식과 채소와 과일은 맛이 달고 다르다. 꽃도 색깔과 향기가 다른 곳과 다르다”고 하면서 “이 귀한 터를 지키지 못했으니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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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덕 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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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긍덕 이주대책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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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현 종부 |
금강마을 사람들 금강마을 사람들이 마지막 가을걷이를 하고 있었다. 김순자(70)·김수자(65)·박병건(67)씨는 사다리에 올라 감을 따고 있었고 장성태(77)씨 부부는 콩 가지를 꺾어 거두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장이덕 이장과 장석우 고가 앞을 지나다가 기자가 30년 전 평은초 근무 당시 어머니회장이던 성형기(64)씨를 만났다. 그 집 평상에 앉아 옛 이야기를 들었다. 성 씨는 “마을이 융성할 때 150여호가 살았고 최근까지 30여호가 살았으나 다 떠나고 이제 이주를 기다리는 19집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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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화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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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애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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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덕 어르신 | 마을 경로당에는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老老 Care)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이 마을 김영순(72, 거촌댁)씨는 경로당 회장이다. 매일 밥하고 반찬거리를 장만해 어르신들의 점심준비를 한다. 12시가 넘으면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모여들기 시작하여 점심을 함께 먹는다. 소박한 점심상이지만 김 회장의 마음과 정성이 가득한 진수성찬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년 내내 점심 준비를 했다고 하니 대단한 효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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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경로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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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경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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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기 전 부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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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태 어르신 |
마을 원로 해저 할매(95)와 임상애(82) 어르신은 “18살에 시집 와서 몇 년 후 철도공사(중앙선)가 시작됐는데 어른 아이 모두 나가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그 후 외무다리가 없어지고 시멘트 다리(1971)가 생겼고 잠수교가 떠내려가고 10여년 전 지금 다리(2004)가 놓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