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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 31/장수면 호문3리 보통골(盃呑谷)

단산사람 2014. 11. 30. 17:19

선비숨결을 간직한 마을 호문리 보통골(盃呑谷)
우리마을 탐방[31] 호문3리
[493호] 2014년 10월 30일 (목) 11:04:02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 보통골 마을 전경

간재 이덕홍 선생이 태어난 마을
은둔 학자 장진이 지은 녹야당

       
▲ 호문3리 표석

장수면 호문3리(보통골)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가흥교를 건너 예천방향으로 가다가 두전교차로에서 내려 장수면 소재지 방향으로 간다. 장수면 소재지에서 반구교를 건너 옥계천변 도로를 따라 1km 쯤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높다란 호문3리(녹동·갈골) 표지석이 나타난다.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조금 가다보면 경북선 철도건널목이 나오고 이어서 호문1리 곰실마을 앞을 지나게 된다. 곰실 입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이리구불 저리구불 오르막길을 오르면 고갯마루에 이른다.

이 고개의 이름은 황사(黃巳)재라고 한다. 옛날 누런 구렁이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맞은편 산 중턱에 정자 하나가 보이고 그 안쪽에 비각도 보이고 있어 옛 선비들이 학문하던 마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좁은 골짝 사이에 있는 계단식 논들은 금빛들판을 만들었고 집들은 웃마, 중간마, 아랫마가 있는데 통틀어 보통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지난 12일 보통골에 갔을 때 중간마 삼거리에서 김선호(77) 어르신을 만나 마을 이야기를 듣다 보니 들에서 일하던 장대식(75)씨, 장용식(68)씨, 윤연옥(64)씨가 합류하여 논두렁에 서서 마을의 옛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 용두사

마을의 유래
영주지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때는 반남박씨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박성골(朴性谷)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에는 배탄동(盃呑洞)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왜 ‘배탄’이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조선 태종 13년(1414) 지방행정조직이 대폭 개편될 때 배탄동은 영천군 호문면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호문면과 두전면을 합병하여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을 녹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선조(재위 1567-1608) 때 진사 장진이 영월에서 그의 외가(반남박씨)가 있는 영천에 옮겨와 고을 서쪽 배탄(盃呑, 호문3리)에 자리를 잡아 녹야당(鹿野堂)이란 서재를 지은 후부터 녹야당의 녹(鹿) 자를 따 녹동(鹿洞)이라 하였다.

   
▲ 호문3리 경로당

보통골의 내력
지금도 이 마을을 보통골이라 부른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다른 마을로 시집 간 사람들은 ‘보통골댁’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버스승강장에도 ‘보통골’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럼 왜 보통골이 되었을까? 취사 이여빈이 1625년에 쓴 최초의 영주지에 의하면 ‘이 지역은 조선시대 때 영천군 서부지역 호문송리로 서면에 속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괴헌고택본 영주지에는 ‘호문송리(好文松里)는 군의 남쪽에 있다. 호문송리에 속한 마을은 웅곡(熊谷), 배탄(盃呑)과 소룡과 토계와 화기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이 마을 지명이 ‘배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20여년 동안 이장을 역임한 장현식(72)씨는 “옛 사람들은 배탄동을 배탄골이라 불렀을 것이다. 배탄골이 오랜 세월 지나오면서 배통골로 변하고 배통골이 보통골로 변해 굳어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통골의 내력을 알 수 없어 책을 찾고 인터넷을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었는데 장현식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보니 궁금증이 풀렸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 말씀이 그럴듯하고 ‘보통골’란 마을이름이 정겹게 들려온다.

   
▲ 간재선생 강생유지비

간재 이덕홍 선생이 태어난 마을
녹야당에서 왕고재 방향으로 50여m 거리에 간재 선생 강생(태어남) 유지비가 있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 선생은 평은면 천본리에 있는 오계서원을 창건(1570)한 인물로 유학자요 과학자였으며 시인이었다. 간재는 퇴계 선생의 총애를 받은 수제자로 호와 자를 다 스승이 지어 주었을 만큼 퇴계가 아낀 제자였다. 간제 선생 유지비에 기록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주 서쪽의 구룡마을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정기가 모여 깃들었으니 바로 간재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의 외조부 사직 박공(朴承張)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살았기에 선생은 1541년(중종 35) 이곳 외가에서 태어났다. 세월이 흘러 400여년이 지나니 사직공의 옛날 집은 헐리고 황폐하여졌으나 이곳에 사는 노인들이 여기가 간재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 하니, 어찌 시대가 변천하였어도 훌륭하던 정기가 희미하게 어리는 듯하니 이 터가 아니겠는가.

아! 선생은 품성이 온순하고 자태가 순수하며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착한 일을 즐거이 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천성이 그러함이오,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깊이 믿고 따르며 가르침을 독실하게 익히니 동문의 어진 분들이 주자의 제자 면재와 황간에게 견주어 소중히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지역유림이 뜻을 모으고 후학 권삼익이 글을 써서 1933년에 세웠다.

   
▲ 녹야당(서재)

은둔 학자 장진이 지은 녹야당
장진(1550~1640)은 단양장씨로 녹야당의 주인이다. 장진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장진은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게 되었다.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동료 선비들이 모두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중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진은 출세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산수간에 숨어 남은 생을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그는 낙향한 후 외가가 있는 영천에 옮겨와 고을 서쪽 배탄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서재를 지어 녹야당(鹿野堂)이라 하였다.

장진은 비록 타관에서 옮겨와 산 사람이기는 했으나 학문이 뛰어나고 신실하여 그와 교류하는 이들이 모두 당시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기봉과 유복기, 이황의 제자로 학행으로 이름난 간재 이덕홍 등이 있다. 간재와는 이종형제 사이로 학문으로 연결되어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됐다.

공은 세상사에 초탈하여 문을 닫고 지냈는데 90세에 노직이 내렸으나 ‘진사로 족하다’ 하고 사당에도 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 생강추수

보통골 사람들 
이 마을 이시동 이장(54)은 “우리마을은 57가구에 127명이 살고 있으며 벼농사를 주로하고 생강, 고추, 수박 등 밭농사가 많은 편”이라고 했다. 축사에서 소를 돌보다 만난 박인서(68)씨는 “축사가 전에 보다는 줄었다”고 하면서 “보통골에는 20여 가구가 400여 마리의 소를 사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우(80) 장수면 노인회장은 “옛날 어떤 임금이 영남 땅을 미복으로 순행하다 이곳 산수지리와 생김이 묘하다고 하면서 몇 번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였다 하여 왕고재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전해 줬다.

황순규(78) 할머니는 “왕고재골 좌측에 큰 바위가 있고 그 안에 굴이 있는데 예로부터 고려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면서 “그 안에는 여러 명이 들어가서 길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있다”고 말했다.

생강 추수를 하다 만난 장영섭(70)씨는 “우리마을에서는 생강농사를 많이 한다”면서 “작년에 비해 값이 좋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왕고재 골짜기 막장에 용두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기도도량으로 지역민들이 수시로 찾는 절이다. 이 절 수옥스님은 ‘제2의 만공스님이 되겠다’며 거문고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

장수면 호문3리 사람들

   
▲ 이시동 이장
   
▲ 이영우 장수면 노인회장

 

 

 

 

 

 

   
▲ 김선호 선생
   
▲ 장대식 씨

 

 

 

 

 

 

 

   
▲ 장현식 씨
   
▲ 장용식 씨

 

 

 

 

 

 

   
▲ 황순규 할머니
   
▲ 장영섭 씨

 

 

 

 

 

 

   
▲ 박인서 씨
   
▲ 윤연옥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