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탄압 아픔 딛고 사과생산 중심 마을로 성장 | ||||||||||||||||||||||||||||||||||||||||||||||||||||||||||||||||||||||||||||||||||||||||||
우리마을탐방[6] 꽃피는 산골 봉현면 하촌2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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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제일 안전마을로 선정...방문객 줄이어 풍기 IC에서 봉현초등학교를 지나 히티재를 오르노라면 ‘여기가 사과 주산지 봉현면이로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도로변이 온통 사과밭이기 때문이다. 히티재를 넘으면 끝없이 펼쳐지는 사과농장 사잇길을 달리게 된다. 보이는 것은 모두 사과밭이요 굽이굽이마다 과수원길로 이어진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오면 유전리 ‘꽃피는 광장’을 만나고 이어서 노좌리와 하촌1리를 지나서 꽃피는 산골 하촌2리에 다다르게 된다. 마을입구에는 ‘농작업안전모델시범마을’이란 표석이 있고 여기서부터 하촌2리이다. 옥녀봉 아래 비스듬히 자리잡은 하촌마을은 경사지가 온통 사과밭이고 마을 앞을 흐르는 동천변 경작지에도 사과나무가 심겨져 있다. 봄꽃 만발한 지난 8일, 꽃피는 산골 하촌2리에서 마을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들었다.
■ 마을의 유래 = 이 마을 이우인(67) 노 총무는 마을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이 총무는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원래 마을의 이름은 화촌(花村)이었는데 일제가 하촌(下村)으로 비하해 ‘창지개명’이 됐다”며 “일제는 노좌에서 하촌까지 이르는 골짜기 전체를 ‘노재이골’이라고 칭해 하인들이 사는 동네라고 무시했다”고 일제 만행에 강한 분노를 표했다. 하촌2리는 배골(2,3반), 쟁피(1반), 신기(4반) 등 3개 자연부락으로 나누어져 있고 현재 42가구에 67명이 살고 있다. 배골은 배 노인과 관련이 있는 마을로 하촌2리의 중심이며 양지마와 음지마로 나눈다. 쟁피마을은 산초계열의 쟁피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신기는 도로변에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고 해서 신기(新基, 새터)로 부른다.
■ 보국대 강제징용 피해마을 = 보국대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고자 만든 조직으로 이 마을에는 보국대에 끌려 간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한다. 이 마을 안승원(70)씨는 일제 때 부모님이 강제 징용당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때는 1930년대 중반. 일제는 마을 사람들에게 ‘일본에 가면 잘 먹고 잘 살수 있으며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꾀여 반강제로 일본으로 끌고 가서 강제노역을 시켰다고 했다. 안씨의 부모가 끌려 간 곳은 ‘큐슈(九州)’라는 곳으로, 탄광 지하 막장에 들어가 위험한 일을 했고 어머니는 광부들 밥해주는 함바일을 했다고 한다. 10여 년간 일본에서 고생만 하다가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됐는데 돈 한 푼 못받고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안씨의 누나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안씨는 이 곳에 도착(1945년 8월) 직후 10월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안씨의 아버지는 진폐증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 마을 고영숙(85) 원로는 “일제 때 남자는 강제징용에 시달렸고 처녀들은 여자공출(정신대 차출)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다”며 “하촌에는 안씨 부모님 외에도 여러 사람이(보현어른, 감실어른, 상수아재, 태석이 아버지 등을 손꼽으며) 끌려갔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10여년 전 강제징용(보국대) 피해자 후손들은 피해보상요구를 해당기관에 제출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고 했다.
■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 14살 때부터 이곳에 살았다는 박의분(83) 할머니는 “어린시절 여기서 살 때는 모두가 가난했고 움집 같은 초가집에서 살았다”며 “이제 우리마을도 잘 사는 마을이 됐고 좋은 집들이 들어서고 있어 옛 새마을시대 집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했다.
18세에 이곳에 시집 와 여기서 일생을 살아온 송옥선(87) 할머니는 “옛날에는 이 양지마에만 40호에 100여명이 살았다”며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됐지만 보기 딱한 일도 있다. TV에 보면 부모를 내다버리는 현대판 고려장이 나오는데 이거 정말 너무한 세상”이라면서 혀를 찼다. 장 이장 부인 유애경(56)씨는 “제 고향은 풍기고 남편 고향은 예천이라서 중간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면서 밝게 웃는다. 유 씨는 “이 곳은 풍수해의 피해가 없는 명당이며 산이 높아 저녁 그늘이 일찍 내려 일조량 조절이 잘 돼 사과의 색과 맛이 전국 제일”이라고 말했다. 새터에 사는 최종국(64)씨는 “새터는 자라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라서 인재가 태어나고 장수하는 마을이라고 소문이 나 땅이 나오면 금방 팔린다”고 하면서 “이 마을에서 행정고시 합격자, 공인중개사 합격자 등이 많이 나왔다”고 했다.
■ 귀촌 늘고 초등생도 생겼다 = 이 마을은 아마도 ‘고향의 봄’ 노랫말의 배경이 된 마을 같다. 마을 앞 동천에서 하촌2리를 쳐다보면 울긋불긋 봄꽃이 꽃대궐을 이루고 있고 넓고 평평한 산비탈이 온통 사과나무로 덮혀 있다. 우리나라 사과 생산의 13%가 영주서 생산되고 그 중 38%가 봉현면에서 생산되며 그 중심에 하촌 2리가 있다. 드넓은 사과밭 사이로 지붕이 뽀족한 별장같은 집들이 보이는데 모두 귀농인들의 집이다. 귀농 6년차인 김택원(68)씨는 항상 즐겁고 행복하다. “산좋고 물좋고 꽃피는 산골에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고 있으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게 뭐 있겠냐”며 “있는 거 가져다 마을 사람들과 정나누기 하고 생산해 남는 거 도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산다”면서 하루하루를 만족해 했다.
이 마을에는 초등학생이 없었다. 최근 들어 2가구가 귀향해 유·초등학생 4명이 생겼다. 매일 아침 노란 통학버스가 마을에 오니 마을 사람들은 “오랜만에 경사났다”며 좋아하고 있다. 고덕운(78) 전 이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아이들로 북적였는데 20여년 동안 아이들 구경을 못하다가 아이들을 보니 마을이 살아나는 것 같아 보기좋다”고 했다.
하촌을 선진 마을로 이끈 장성희 이장 장성희(59) 이장은 30년 전 이 마을에 정착해 과수와 양봉으로 고소득을 올려 성공한 귀농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장 이장은 예천 호명이 고향으로 수도권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일찍 귀농을 결심하고 꽃피는 산골 하촌2리를 선택했다고 했다. 장 이장은 고령화된 주민들의 아들·손자 노릇을 하면서 점심 공동급식, 하촌지구밭정비사업 추진, 농작업안전모델시범마을 운영, 마을주민 순천향대 건강검진 실시 등 주민을 위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지역민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봉현면 이장협의회 회장직도 겸하고 있는 장이장은 특히 하촌2리를 안전모델시범마을 2013 농촌진흥청 평가 전국 1위를 차지, 전국 각지에서 견학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장 이장은 “동민들이 필요로 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자주 모이고 음식을 나누면서 정나누기를 하다 보니 두레정신이 살아났고 화합하는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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