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영정 봉안했던 용천사 용천동에 있었다 | ||||||||||||||||||||||||||||||||||||||||||||||||||||||||||||||||||||||||
우리마을 탐방[5} 천하제일 십승지의 마을 풍기읍 금계1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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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 선생이 가삼을 제일 처음 심은 곳 부계밭 풍기읍 금계1리는 개삼터(처음 인삼을 심은 곳)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정감록의 마을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풍기읍에서 순흥통로 방향으로 가다가 굴다리를 지나 좌회전해 풍기북부초교와 경북항공고, 풍기향교 앞을 연이어 지나면 금계중이 보이고 도로 좌측에 ‘금계1리’ 표석이 나타난다. 이 표석에는 ‘금계1리, 풍기인삼 시발지’라고 새겨 놓았다. 표지석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나오는데 이 길로 들어서서 좌측으로 가면 부계밭·임실마을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가면 쇠바리 마을과 용천동으로 가는 길이다. 또한 이 길은 소백산자락길 제2자락길로 금선정에서 부계밭과 임실마을을 지나 유다리 방향으로 가는 ‘풍기인삼개삼터길’이다. 봄기운이 완연한 지난 3일 금계촌에서 이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의 유래와 개삼터의 내력 그리고 십승지지 이야기를 들었다.
▲ 마을의 유래 =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 구교리였다. 풍기향교가 처음 이 마을에 창건(1432년)됐다가 1735년에 교촌리 현 위치로 이건됐다. 이 때문에 이 마을은 구교리로 불리워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풍기면 금계1리로 편성됐다. 이 마을은 임실, 부계밭, 쇠바리, 용천동 등 네 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눠져 있으며 행정구역상 모두 금계1리로 돼 있어 풍기읍에서 큰 마을에 속한다. 임실마을은 이곳에 집을 짓고 아이를 임신하면 큰 인물을 낳는다는 전설에 따라 임실(姙室)’이라 했는데 일제 강점기 이후 ‘임실(任室)’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부계밭은 임실과 개천을 사이에 두고 동은 부계, 서는 임실이다. 부계(伏 알품을부, 鷄 닭계)밭은 정감록에서 십승지지의 으뜸이라고 하는 금계촌이 바로 이곳이다. 또한 부계밭은 주세붕 선생이 가삼을 제일 처음 심은 곳이기도 하다. 쇠바리는 임실마을 북쪽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뒷산 모양이 흡사 소의 발처럼 생겼다고 해 쇠바리라고 하며, 용천동은 신라 때 용천사라는 절이 있어 용천동이라 불렀다는 설과 마을 뒤산의 지형이 용이 하늘로 등천하는 형세여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역사 속에 나타난 금계촌의 기록들 = 풍기군지에 의하면 ‘군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등항성(登降城, 도솔봉 아래로 추정)이 있고 고려 태조가 이곳에 오른지 7일만에 백제의 항복문서가 도달했다’는 기록과 ‘태조의 영정이 지금도 용천사에 있는데 단정하고 엄숙하면서도 온화하고 영명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호감이 가는 참다운 제왕의 모습이다. 유학자 임제광(풍기군수, 1522-1525)이 본군에 사당을 짓고 그 영정을 봉안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화재가 나서 영정은 온전했지만 사당은 복구하지 못했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어 용천동에 있는 용천사에 왕건의 영정이 봉안돼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감록 십승지지로 주목받고 있는 금계촌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지형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금계촌 임실에 와서 무쇠 말뚝을 박아 혈을 질렀다고 전하고 있다. 이 또한 풍수지리와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이여송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두려워서 혈을 질렀다는 것이다.
▲ 십승지 후손들이 사는 마을 = 마을 원로들은 “금계촌은 정감록촌이라고도 하는데 부계밭과 임실에 사는 사람 중 열에 여덟 아홉은 정감록을 믿고 찾아 온 사람들이다. 이북지역에서 온 사람 중에는 평안도가 제일 많고 황해도, 함경도 순”이라면서 “이 곳 토착주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마을 회관에서 만난 박상우(77)씨는 “증조부께서 이북에서 내려와 풍기읍에서 한의원을 했는데 아마 1890년경으로 추정된다”며 “1960년대 박용만 국회의원이 증조부의 종손자였다”고 했다. 부친이 8살 때 평안북도에서 내려왔다는 차동근(75)씨는 “조부 때 정감록마을 찾아 왔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몸이 불편한 듯 안마기에 앉은 백명현(78)씨는 “우리 선조들도 북한에서 왔는데 처음엔 강원도로 왔다가 그곳에서 다시 풍기 금계촌으로 오게 됐다”고 했다. 마을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이전에 온 사람들은 금계촌에 많이 정착했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후에 온 사람들은 욱금동과 삼가동에 많이 정착하게 됐다”고 기억했다. 이날 경로당에서 만난 세 분 모두 정감록을 믿고 찾아온 2,3세대들로 금계촌의 옛 이야기를 들려 줄 마지막 세대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 인삼포 보기 드물고 부계밭에 사과 심겨져 = 금계촌에는 현재 75세대에 393명이 살고 있는 큰 마을이며 50대 젊은 세대들도 상당수 있어 활기찬 마을이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 마을 역시 사과농사가 제일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가을이면 금빛들판을 이루었던 문전옥답에도 사과나무가 심겨지고 언덕배기의 논밭도 모두 사과밭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천동 입구에서 사과 전지를 하고 있는 김동호(68) 씨는 “옛날 계단식 논밭에 모두 사과나무가 심겨졌다”며 “노동 투자에 비해 인건비라도 건질 수 있는 것은 사과뿐”이라고 했다.
부계밭에서 마스크 차림으로 농약을 치고 있는 문해복(58) 씨는 “1970년대에는 180여호가 살았던 금계촌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귀촌도 다수 있다. 65세 이상 노인이 절반 이상이지만 40~50대 젊은 사람도 많다”며 “보시다시피 인삼밭은 줄고 사과가 성하고 있다. 요즘 사과교육장에 가면 200명 이상 모이지만 인삼교육장에 가면 겨우 50명 정도 모인다고 했다. 또 ”사과 농사는 내 땅에 농사를 지으니 소득도 높은 편인데 비해 인삼은 멀리(충북·강원) 나가야 하고 인건비와 도지(賭地)를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했다. 이곳이 고향인 김재영(60)씨는 “500년 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 선생이 처음으로 가삼을 심은 터가 바로 여기 부계밭 앞들”이라며 “풍기인삼축제의 시작은 개삼터 고유제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제사를 지내는 곳이 바로 이 마을”이라고 했다.
지금은 살기좋은 세상, 10년후엔 어떤 세상 될지 ■ 할머니들의 수다-금계촌 사람들의 옛 이야기 “6·25가 나던 해 평은면 미림이에서 금계촌으로 17살에 시집 와 20살에 첫아들을 낳았지. 6남매 맞며느리로 시부모에 시조부모까지 모시고 4동서가 한 집에서 살았으니 20여명이 한집에 살았어. 그 땐 가난했지만 우리 4동서는 다툼 한 번 없이 우애있게 잘 살았지” 금계1리 쇠바리 모랭이에서 마늘밭을 매고 있던 김옥희(82) 할머니의 말이다. 김 할머니는 “지금도 동서들과 자주 전화를 하고 지낸다”며 “고생한 동서끼리 우애는 지금도 변함없다”며 대가족이 한 집에 살았던 이야기를 꺼집어 냈다. 쇠바리 경로당에서 만난 조옥란(90) 할머니는 “옛적에 먹을 게 없어 설익은 보리를 볶아 맷돌에 갈아 호박잎을 넣고 쑨 죽을 먹고 살았다”는 보릿고개 이야기를 한 후 “일제 때 일본 순사가 뻔질나게 드나들며 처녀 공출(정신대 차출)을 강요하자 아버지가 ‘정신대 끌려가느니 시집이나 가라’며 17살 난 나를 19살 많은 노총각에게 혼인시켰다”며 당시 일제의 만행을 들춰냈다. 최순이(77) 할머니는 “그 당시 농사일은 남자들이 하고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길쌈하며 고생스럽게 살았다”고 했다. 임월순(85) 할머니는 “젊을 때는 먹고 사는 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됐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어떤 세상이 될지? 어느덧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라며 가는 세월을 아쉬워했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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