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원 (강촌에살다)에서 퍼온 작품입니다.
이상원님의 연구와 노력에 감사와 경의를 드립니다.
죽계구곡(竹溪九曲)
죽계구곡(竹溪九曲)을 찾아서
2011.6. 홀로
퇴계선생의 유소백산기(퇴계집)를 읽고 그길을 찾아 보고자 계획한지가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소백산기를 참고하여 죽계를 흐르는 아홉구비 구곡(九曲) 즉
죽계구곡(竹溪九曲)을 함께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고있었다.
어짜피 퇴계선생께서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그길로 지나갔으니까
산을 찾아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뒤돌아서면 뭔가 부족하고 차츰 잊혀져가는걸 느끼면서
이래서야 되겠나 싶어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자연적으로
선인들의 유람록에 관심을 두고 조사를 하고 답사를하고 다니다 보니
그래도 조금이나마 의미있는 산행길이 되었다
모르는 한자를 찾아보고 하나씩 배워가는재미도 솔솔하다
지난날 백두대간 일시종주를 하며 초암사로 내려오면서 다시한번더 생각하게 한 죽계구곡과
이황의 유소백산기가 다시금 이곳을 찾게 만들었다
점심후에 늦은 출발이라 풍기에 들러 간단히 김밥으로 차안에서 가면서 먹고는
죽계계곡에 들어선다.아무런 준비없이 무작정 찾아갔다.
그러다 보니 정보가 미약하지만 옛기억을 하나 하나 떠올리면서 찾아나선다.
이황
1548년 단양군수로 있다가 형이 충청도 관찰사로 오자 청송군수로 가기를 바랐으나
풍기군수로 간다
그당시의 순흥땅은 상당히 큰 도시라할수있다
1549년 4월 양력으로는 5월이겠다
평소에 산수를 즐겨찾는 퇴계선생께서 마침내 소백산을 오르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그때 나이 49세 이다. 주경유께서도 이 소백산을 유람할때의 나이도 49세였다
나역시 문득 돌아보니 나이 49세이다
아마도 그때의 시절로 돌아가 함께 호흡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소백산이 지금이야 비로봉이 최고봉이고 알려져 있지만
460여년전에는 국망봉이 아마도 소백산의 주봉이었지 싶다
유산기 어디에도 비로봉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는걸 보면
국망봉(國望峰)이야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들어가기에 앞서 ..
구곡시가의 창작은 기록상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의 운문구곡(雲門九曲)과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가 최초이다.
먼저 죽계구곡(竹溪九曲)은 누가 명명한지는 분명하지않다.
죽계구곡가도 남겨진것이 없고 다만 추측컨데 주경유(주세붕) 이나 퇴계이황이 이름을 붙이고
신필하(申弼夏)가 바위에 각자한것으로 추측할뿐이다.
나개인적으로는 주세붕이 명명한것이라 추측한다
3명모두가 풍기군수를 엮임한 사람들이다.
퇴계선생이 1549년 4월 소백산을 유람할때 지금의 초암사 앞 바위를 청운대라 이름을 붙였다.
청운대는 주경유께서 먼저 백운대라 이름붙인것을 퇴계는 백운대 백운암과 혼동되니
청운대라 이름하였는바 아마도 퇴계이황이 이곳을 찾았을때는 이미 구곡이 형성되어있었을것이다.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죽계를 따라 오면서 이미 구곡을 모두 거쳐서 초암사에 이르렀을것이고
이미 죽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죽계별곡이 있었다.
순흥지(順興誌)나 흥주지(興州誌)에 기록된 죽계구곡의 명칭이 조금씩 다르고
현지 답사결과 일곡에서 구곡까지 각자와 명칭이 현장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설명이다.
뭐 하나 연결되는것이 없었다.
순흥지(順興誌)의 죽계구곡을 따르면
1곡은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이고
2곡은 금성반석(金成盤石)이며
3곡은 백자담(栢子潭)
4곡은 이화동(梨花洞)
5곡은 목욕담(沐浴潭)
6곡은 청련동애(淸漣東崖)
7곡은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은 금당반석(金堂盤石)
9곡은 중봉합류(中峯合流)로
이 모두가 퇴계 선생이 소백산과 죽계계곡의 풍치(風致)에 심취(心醉)되어
산유(山遊)를 즐기면서 이름 붙인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순흥지나 흥주지를 비교하여 실제 바위의 각자와 비교해보면 어처구니가 없는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바위에 새겨진 각자위주로 찾아보기로 한다
이곳은 죽계천 상류부터 1곡 하류로 내려올수록 9곡이 형성되어있다
이렇게 형성된 구곡이 여러곳있다.
예를 들어 홍양호(洪良浩)의 우이동 구곡(牛耳洞九曲) ,오대익의 운선구곡(雲仙九曲)등이 있다
그래서 올라가면서 9곡부터 답사를 시작한다
九曲
배점교 아래로 지금은 콘크리트로 다리를 놓고 축대를 쌓아서 옛모습은 흐릿하지만 작은 폭포가 있다
이곳 언덕위 바위에 각자되어있다 竹溪(죽계) 九曲(구곡) 이라고 누가 흰페인트를 칠하여 찾기에는 무리가 없다
그리고 옆에 상수원 보호구역이고 상수원 관리소가 있다.
이곳이 중봉합류라하니 조금은 어떨떨하다
이곳에서 하류로 조금더 내려가야만이 합류되는곳이기에 뭔가 부족하다
九曲탁본 (참고자료)펌
八曲
팔곡은 올라가면서 각자를 찾으려 했는데 숲이 우거져 찾지를 못했다
그래서 자료를 검색하다보니 8곡의 각자가 있다
두어번 오르내렸지만 결국은 찾지를 못해 마음한구석이 찜찜한것 같아 발길이 안떨어졌는데...
집에 와서 보니 각자가 있으니...
그래서 팔곡에 부합되는 장소라도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어본다.
하지만 아직도 시원하질않아 다시함 찾아봐야속이 쉬원해질것이다.
8곡은 금당반석(金堂盤石)이라 하지만 어디에도 반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여러명이 앉을 만한 장소가 없다.이 8곡(八曲)도 부합되지않는것이다.
숲에 가려져 있었나?
팔곡이라 선명하게 보이는데 나에게는 왜 그렇게도 눈에 띄지않았지??
<참고자료> 펌사진
七曲
순흥지의 七曲 용추비폭(龍湫飛瀑)
아무리 봐도 용이 승천할정도의 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그만한 폭포 아래로 담이 있고 큰바위위에 노송 한그루가 자라고있고
그바위에는 어른 7~8명이 앉을수있는 반석이다
그리고 그위에 7곡이라 각자되어있다.
어쩌면 이리도 순흥지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주경유께서 지은 구곡과 신필하께서 새긴 구곡은 아마도 별개로 봐야할듯하다.
낙엽을 쓸어내고 물로 그려보니 선명하게 나타난다.
6곡으로 가기전의 계곡모습
六曲
6곡은 언뜻 보기에 양쪽에 큰바위가 수문장 처럼 지키고있다.죽계동천을 들어가는 쌍문처럼 ...저 오른쪽 바위에 6곡이라 각자되어있다.
점차 마멸되어 가지만 아직은 뚜렷하게 판독할수있다.
순흥지에 청련동애(淸漣東崖) 라고 불러진이곳은 맑고 잔물결이 일고 동쪽 언덕이다
전혀 주위와는 어울리지않는다
이끼로 덥어져 있었서 그런지 이곳 각자는 페인트칠이 안보인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바위에 페인트칠은 너무했다 풀잎으로 물을 젹셔 문지러보니 그런데로 선명하다
지금껏 다녀도 아직 탁본한번 하지않는다. 탁본보다 선명한 카메라가 있잔아..
물론 마멸되어가는것은 탁본을 해야 알수있는것이 많다. 그러나 요즘 먹 이라는것이 천연의 먹이 아닐진데 ...
五曲
아마도 오곡의 풍경이 가장 훌륭한것 같다
이리저리 바위를 스치며 지나온 물줄기들이 자연스럽고 아마도 초암사가는 옛길의 나무다리가 콘크리트로 되어있지만
옛날에는 나무 몇가지 꿁게 엮어 놓았을 것이다.
이곳 다리 중간 역할을 하는바위에 5곡이라 각자되어있다.
처음에는 이곳이 분명 맞으리라 확신하고 각자를 몇번을 찾아지만 못찾다가
내려오면서 다시 들어가서 찾은곳이다.
바위에 뚫여있는 구멍이 뭔가 ?
분명히 인공적인데 주술적인 성혈은 아닐것 같고
아마도 옛날 다리를 놓을때 중간 기둥을 설치하기위해 뚫은 구멍이 아닐까 생각한다.
四曲
5곡과 4곡사이는 지금 다리가 놓여져 있고 5곡은 주차장에서 올라가면서 다리 건너기전에 우측에 있다
다리로 올라와서 좌측 계곡으로 들어가면 조그만한 폭포가 나온다 아마도 이곳도 구곡을 정하기에 손색이 없는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이 없어서 그냥 올라보니 다리아래에 4곡이라고 쓴 각자가 멀리서도 보인다
누군가가 흰페인트로 글짜마다 칠을 해놓았다.
4곡은 폭포가 시원스럽게 펼쳐지는곳으로 위에는 현도로의 다리가 지나간다.
三曲
3곡은 4곡과의 거리가 100여m이다 초암사 가기전 화장실 아래에 있다.
큰바위사이로 폭포가 흘러내리고 그아래로는 짙푸른 담이 하나있다
시원함을 느끼는 장소이다. 가을 단풍철에는 어느계곡 못지않는 아름다운 곳이리라
이번 3곡의 각자는 어떻게 생각하면 찾기가 힘들었을텐데 우연히 쉽게 찾았다 三자가 언뜻 보여기에 곡은 마모가 심하고
물로 또 그려봅니다 선명하게 살아남니다
큰바위가 앞을 가로지러 막고있어서 진행이 불가하여 화장실쪽으로 해서 초암사로 향합니다
二曲
2곡은 초암사(草庵寺)바로앞입니다.
늙은 괴목이 하나있고 건너편으로 청운대가 있습니다.
초암사 다리 건너기전에 계곡으로 내려가니 바로 앞에 큰바위가 하나 들어옵니다
그래 저것도 뭔가 있겠다라는 심정으로 가까이 가보니 청운대라고 붙어있다
청운대(靑雲臺)
지난날 퇴계선생이 소백산을 유람할시 저바위 위에서 노닐며 초암사 중들이 가져온 술 두어잔을 마시고
소백산을 어떻게 올라갈까를 생각했던 바위이다.그리고 주경유께서 붙여놓은 백운대를 청운대로 바꾼다.
지금은 잡풀이 우거지고 올라가지 못할지라도 아마도 저위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아래로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아마도 무릉도원일것이다.
靑雲臺라는 각자와 우측아래로 二曲이 선명하다
一曲
1곡은 초암사에서 약 200여m상류쪽으로 올라가면 있다.
넓은 반석위로 계곡수가 흐르고 함박꽃사이로 우측에는 큰바위가 있고 앞쪽으로는 작은 폭포가 있다
우측 바위에 흐릿한 각자가 몇자 보인다.
우측으로는 申弼夏가 흐릿하게 보이고 나머지는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불가하다
아마도 탁본을 해봐야 보일듯...
폭포 우측의 작은 바위에 竹溪(죽계) 一曲(일곡)이라 선명하다
지금까지 바위에 새겨진 각자를 생각하면 잘보이는곳
그리고 물이 넘칠때를 생각하여 물결에 마모되지않게 위치를 잘잡아서 새겨두었다
자료 (펌) 사진
마무리 하면서.....
순흥지(順興誌)의 죽계구곡을 따르면
1곡은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이고
2곡은 금성반석(金成盤石)이며
3곡은 백자담(栢子潭)
4곡은 이화동(梨花洞)
5곡은 목욕담(沐浴潭)
6곡은 청련동애(淸漣東崖)
7곡은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은 금당반석(金堂盤石)
9곡은 중봉합류(中峯合流)로
1곡이 소수서원의 취한대라고 가정하여
죽계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이름을 붙여보면 어느정도 가설이 성립될수도 있을것 같다
2곡을 금성반석이라 가정하면 지금의 9곡 각자 아래 반석이 펼쳐지고 폭포가 있지만
지금은 축대로 인하여 많이 변했다.
아마도 소수서원 옆에있는 금성단이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의문이 살짝 들고 아마도 금성단과의 무슨연관이 있을것 같다.
조금은 대비가 되는것 같지만 어딘가 어색한것은 어쩔수없다
이곳이 중봉합류(中峯合流)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엉털이 같아서....
지금까지 구곡을 답사하고 다녀봤지만 순흥지의 기록과 각자의 위치가 너무나 엉뚱하다
아마도 영주시나 풍기의 학자들이나 관심을 가지신 분들의 관심을 좀더 많이 가지고
정립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지금은 소백산 자락길이 구곡을 모두 지나가는 코스로 지정되어있다.
하지만 구곡은 볼수가 없고 그어디에도 안내판하나 없다
그저 포장된 소로길을 따라 초암사에 이르는 길은
아무런 느낌도 자락길이라는 효과도 미미하다고 본다.
국립공원측과 연계하여 배점에서 초암사까지 구곡을 따라 소로길을 만들어
찾는이에게 보여준다면 뜻있는길이라 생각되어진다
다만 상수원 보호구역이다 보니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그것도 대책을 세우면 안될것도 없어보인다.
예를 들어 구곡의 위치가 지금의 포장길 바로옆에 1곡에서 9곡까지 있으니 물가에
전망대라도 만들고 더이상은 상수원 보호구역이니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볼수있도록 하는방법도 좋을듯하다 안내설명문도 좀 부착하고...
초암사에 잠시 들러보고 시간이 없어서 국망봉을 올라보려는 계획은 다음으로 남겨둔다.
아마도 퇴계선생의 소백산행 그길을 따라서 국망봉 올라갈날이 있으리라 다짐하면서 초암사 일주문을 나선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525
이탑은 통일 신라시대의 3층석탑으로 높이는 350cm이다
지대석 위에 이중 기단을 설치하고 각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1주씩의 안기둥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귀퉁이에서 힘껏 치켜올라갔다.
상륜부는 결실되었으며 상층기단 덮개돌은 일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완했다.
예천동부초등학교 제22회 동창화 카페에서 복사해 옴(2013.10.17)
이상원님, 글과 사진 귀하게 쓰겠습니다.
'행복한 학교 이야기 > 죽계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계 아기신록과 봄꽃 (0) | 2011.05.04 |
---|---|
죽계천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선비촌까지 (0) | 2008.06.22 |
죽계의 다리 (0) | 2008.06.06 |
죽계의 집 (0) | 2008.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