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고구려 문화
중국사회과학원이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변방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국책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고구려와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역사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가 이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우리 영주가 고구려 치하에서 경험한 역사의 과정들을 기술코자한다.
1. 고구려의 남진정책
삼성교립(三姓交立)에서부터 김씨의 독립적인 왕위세습제(王位世襲制)를 확보하고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라의 노력은 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활발해 져 갔다. 눌지(訥祗)·자비·소지(炤知)의 3대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부자상속이 이루어졌고, 이렇게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라제동뱅(羅濟同盟 433)을 결성한 신라는 고구려와 맞서는 형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국도(國都)를 통구(通溝)에서 대동강연안의 평양부금으로 옯기고, 대륙(大陸)의 송(宋)과 후위(後魏)가 대치해서 힘을 겨루던 그 틈을 이용해서 안심하고 남진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소지왕 11년(489) 기록에서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고 겨울 10월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의 이 과현은 영주시 상망동에서 지누로 너머가는 고개로서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인 이 과현을 너머왔다는 이 기록으로 보아서 당시 내이군(奈已郡)이 었던 영주는 신라의 강역이 었지만 소백산 밑의 급벌산군(伐山郡)이라 불리던 순흥 지방은 백제의 강역이 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순흥지방에 고구려 군이 들어온 것은 장수왕 69년(481)이며 이곳에서 신라와 맞서서 8년을 기다린다.
이때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고 있던 양 지점에는 상당 수의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은풍(殷豊)의 상을곡성(上乙谷城), 풍기의 토성(土城), 마군령 밑의 임곡성(林谷城) 등은 고구려군의 성이며 신라 측 성으로서는 고현성(古峴城 성재), 갈산성(葛山城), 용산성, 과현, 내성인 구성(龜城)이 있다.
이 과현 밑의 마을 이름을 예나 지금이나 망동(望洞)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적의 동정을 살피는 망을 보는 동리라는 뜻이며 서쪽 마을 이름을 술골(戌谷 숙골) 곧 군사들의 주둔지라는 뜻이다. 신라는 영주까지는 손에 넣었지만 소백산까지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큰 산 소백산을 관리할 만한 능력이 신라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한 신라의 영주 땅에 입성한 고구려는 1개월만에 신라의 북변 많은 고을을 점령했다.
문경·예천·봉화·예안·영양·청송까지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 고구려 군사들은 울진(蔚珍)·평해(平海)·영덕(盈德)까지, 영서(嶺西) 백제 땅을 따라 내러온 고구려군은 괴산(槐山)과 진천(鎭川)과 직산(稷山)을 점령하고 아산만(牙山灣)까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많은 지방을 차지한 고구려의 영지 중에서도 영주에 고구려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어 있었니 그래서 값진 문화유산을 영주에 많이 남겨놓았다.
2.
신라 북변과 영주를 침공한 장수왕은 2년 뒤(491) 몰하고 왕손 라운(羅雲)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부터 전선은 소강상태로 돌아갔다. 고구려와 신라 사이 적은 충돌은 있었지만 평화는 유지되어갔다. 그러나 신라왕 소지마립간은 울분을 견디지 못하여 실지의 땅 영주를 미복차림으로 여러 차례 몰래 다녀간다. 이를 두고 "영주가 신라의 땅이었기에 왕의 순행이 가능했다"는 견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영주에 고구려 군이 진주하고 있었기에 암행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었으며 관사에 머물지 못하고, 영주의 유력자 파로(波路)의 집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재위 22년 9월 영주 순행시도 파로의 집에서 머물면서 절색인 그의 딸 벽화(碧花)를 선물로 받아 서라벌로 대리고 간다.
몇 해 전까지 영주의 파로 집에는 호승 아도(阿道)가 종자 두 사람과 같이 머물고 있었다. 소지마립간의 수 차에 걸친 영주순행을 두고 이 아도를 통해서 불교를 접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역시 확증은 없다. 권력과 여자와 종교, 이 셋이 다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가설 때문에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이야기다.
벽화를 데리고 간 이해(500) 11월 소지마립간은 몰하였다. 소지마립간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재종제(再從弟) 지대로(智大路)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이가 지증(智證)마립간이다. 지증마립간은 국호를 계림(鷄林)에서 신라(新羅)로 고치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王)으로 고쳐 부르기로 하였다. 주·군·현(州郡縣)도 새롭게 정비하고, 한 고을을 장군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는 군주(軍主)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동해안 일부를 회복시킨 신라는 지증왕 6년(505) 실직주(悉直州 삼척)를 이사부(異斯夫)에게 맡겼으며, 군주 이사부는 다시 강능을 접수하고 지증왕 13년에는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항복 받게 된다.
이때부터 신라는 자신감을 얻게 되어 지증왕 14년 1월에 의성 안계에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북변의 잃은 땅을 찾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이때 신라의 국경이 소백산이 었다면 신라는 소경을 안동(安東)에 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동의 진산인 학가산까지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니 전방 지휘소를 의성에 둘 수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해(514) 7월에 지증왕이 몰하고 원자 원종(原宗)이 즉위하였으니 이가 법흥왕(法興王)이다. 신라는 계속하여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관복(官服)을 제정하는 등 많은 변혁을 시도해 나갔다. 상승해 가는 신라의 국운을 본 금관가야(가락국)가 투항해 온 것은 법흥왕 19년(532)의 일이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 2년 이사부가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관장하는 병부령(兵部令)이 되고부터 신라의 실지회복, 곧 영주, 예천, 봉화, 문경을 되찾기 위한 군사 작전은 가동되기 시작했다.
백제와 화친을 맺음으로서 군사력의 분산을 사전에 막았으며, 진흥왕 5년에는 중원(中原 충주)에 소경을 설치해서 국토확장에 사전대비를 해 놓았다. 이어서 군제(軍制)를 개편하여 왕경(王京)에는 대당(大幢)을 두고 각 주(州)에는 정(停 군부대)을 배치하는 등 기동성 있는 전력배치를 서둘러 진행해 갔다. 호족(豪族)들의 사병들을 병부에 예속시켜 정(停)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비상시에 대비하여 장정들에게는 동원령을 내려놓고, 각당(各幢)을 정에 증설하여놓고 병사들의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이같은 군사조직과 활동은 실지화복 뿐 아니고, 정복국가로서의 막강한 군사력으로서 통일전쟁에 대비한 군사조직으로 발전해 갔다.
4.고구려와 신라군의 격전장 마군령(馬軍嶺)
순흥과 영주 등 신라 북부에 고구려군이 반세기 가까이 주둔하고 있는 그사이 고구려는 이 지방에 새로운 문물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로서는 신사조였던 불교사상의 유입으로 주민들의 의식과 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일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고구려식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남겨 두고 간 이때의 문화유산으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국보78호 반가사유상이 있다. 이에서 천5백년 전 고구려의 예술이 얼마나 빼어났는지를 볼 수 있다. 오늘의 것과 비교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세련미와 감각적인 솜씨가 지금도 우리를 감탄케 한다. 상당부분 고구려화 되어간 당시 주민들의 눈에, 후퇴하는 고구려인의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온달(溫達)전에 그 진상이 실려 있다. 온달은 왕에게 나아가 「신라가 땅을 쪼개서 저희들의 군 현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원통히 여겨 노상 조국을 잊지 못하고 있으니 불초 저를 보내주시면 이번 걸음에 잃은 땅을 찾겠나이다」 하면서 달려왔다.
그러나 신라군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고 온달은 마군령에서 울면서 돌아섰다. 그리고 얼마 못 가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 격전장을 지금까지도 주민들은 말을 탄 군사들이 넘던 고개라는 뜻의 마군령이라 부르고 있다. 온달이 전사한 이 아단성이 마군령 바로 아래에 있다는 점과 평창 영월을 지나 영춘에 이른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 땅을 밟기에 이 재가 가장 가까운 지점이며, 높이가 해발 810m로서 넘기가 편하며, 남쪽에 골이 깊지 않아서 복병을 만날 위험이 없다는 점 때문에 고구려 군은, 넘어 올 때나 넘어 갈 때 항상 이 재를 이용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 지방 전설 또한 매우 소중한 사료로 남아있다. 신라로 들어온 고구려의 대사 한 분이 날이 저물어 소백산 너머의 첫 동네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산천을 돌아보고는 「이 땅은 불국토다」 가히 절터가 될 만하다고 했다. 그러고 얼마 후에 부석사가 이웃 마을에 세워졌으니 그분이 보통 대사가 아니라고 주민들은 믿고 있어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이 마구령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신라장군 거칠부가 젊었을 적 큰 뜻이 있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바랑을 매고 산천을 구경하며 다니다가 고구려를 엿보고자 하여 그 지역에 들어가 법사 혜량(惠亮)이 법당을 열고 불경을 설한다는 말을 듣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날 밤 법사는 거칠부를 가만히 불러들여 손을 잡고 조용히 일렀다. 「내 눈을 속이지는 못한다. 신라에서 왔느냐. 딴 생각이 있는 것 아니냐. 너의 그 매 눈에 제비 턱. 너는 반드시 큰 장군이 될 상이다. 네가 잡힐까 두려우니 어서 돌아가거라. 뒷날 나를 만나거든 나를 기억해 다오」하며 돌려보냈다.
나라 북변에서 고구려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신라군은 백제와 화친을 유지하면서 6년 동안 착실히 북진계획을 준비해 나갔다. 지흥왕12년(551) 죽령 이북 고구려의 10개군을 점령해 올라갈 때도 백제와 힘을 합쳤다. 거칠부가 신라의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의 고현(高峴)까지 올라갔을 그때 고구려의 고승 혜량은 그 문도 들을 거느리고 노상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읍하고 「지난날 법사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존하였는데 지금 뜻 박에 여기서 뵈오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거칠부의 수레를 같이 타고 서라벌로 온 혜량은 왕을 뵈옵고 신라의 승통(僧統)이 되었다. 혜량은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를 열어 신라불교를 이끌어 가는 큰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 법사 혜량이 부석사를 예언한 고구려의 대사로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3국을 통일한 신라가 망하고 후3국 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이 고구려의 뒤를 이어 다시 3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에서도 소백산과 이 마군령은 다시 한번 소용 도는 회오리가 일었다. 신라의 계승자임을 자랑하는 궁예(弓裔)가 이곳 부석사(당시는 世達寺라 불렀다)에서 선종(善宗)이란 법명으로 10 수년을 숨어서 커 난 곳이며, 백제의 후계자 견훤(甄萱)이 왕건에게 항서를 올린 등항성(登降城)이 또한 이곳 소백산에 있다.
신라가 통일을 이룬 이후, 다시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고려에 의해서 통일이 된 우리 겨레는 조선에 와서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다시 우리 조국은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이 소백산과 마군령을 보면서 눈물 없는 내일의 역사를 상상해 본다. 동시에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날조하려는 중국 동북공정에 대해서 부당성을 지적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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