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스크랩] 6/25 전쟁과 모택동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

단산사람 2013. 2. 2. 21:07

6/25 전쟁과 모택동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  

종종 11월이면 평안남도 양덕군에 있는 중공군 묘지를 백발의 중국여인이 찾아오고는 하는데, 이 여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정권에서 직접 안내하며 예를 갖추기 바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유송림(劉松林) 또는 유사제(劉思齊)라고도 불리는 마오

 

쩌둥(毛澤東)의 첫째 며느리입니다.  비록 현재 중국정부의 요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북한에서 이 여인에 대해 신경을 써야할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남편의 묘소를 참배하는 유송림]


  왜냐하면 유송림의 남편인 마오안닝(毛岸榮)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여 그곳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을 획득하고 죽을 때까지 철권 통치자로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오쩌둥의 첫째 아들은 사실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일부자료에는 자원해서 참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지시로 그는 전쟁터로 나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마오안닝의 묘]


   우리입장에서야 10월 25일 등장한 중공군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중공군의 참전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만약을 대비하여 18개 사단으로 구성된 25만의 동북 변방군을 만주일대에 배치해 두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중순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여러 외교 채널을 통해 6·25전쟁에 개입할 것을 공공연히 천명하고는 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참전 이면에는 커다란 갈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태도를 평가절하 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대일본 전쟁 및 국공내전을 간신히 끝내고 국가를 건국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신생국이었으며 오히려 대만문제, 만주문제, 티베트문제 등 산적한 문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이 6·25전쟁보다 더욱 심각하게 느끼고 있던 난제들이었습니다.


[중국은 신생국이어서 국내에 산적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때 스탈린이 참전을 권유하는 전문을 보내왔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소련의 적극 개입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마오는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면 스탈린이 적어도 공군을 참전하여 줄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0월 12일, 소련의 지원이 불가함을 통보 받은 마오는 만주에서 출병 준비를 하고 있던 펑떠화이(彭德懷)를 소환해 참전 여부를 재검토하였습니다.


[결국 마오쩌둥의 결단으로 참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린바오(林彪)나 까오강(高岡) 등 권력 실세 대부분이 파병유보를 주장했을 정도였고 상황도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오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대국과 국경을 마주할 수 없다는 고래의 원칙에 따라 파병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은 마오의 전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오쩌둥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자 그의 장남을 참전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마오안잉은 그의 어머니인 양카이훼이(楊開慧)가 국공내전 동안 국민당군에게 피살당한 후 겨우 목숨을 건져 세상을 전전하다가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유송림과 결혼하였는데, 불과 1년도 못되어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하여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갔습니다.


[마오안잉과 유송림]


  하지만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껄끄러웠던지 펑떠화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그의 참전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전선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였던 마오안잉의 요구와 달리 후방의 사령부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사령부가 미 공군의 맹폭을 받아 11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마오쩌둥은 대의를 위해 유송림의 소원을 거절하였습니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마오쩌둥은 잠시 눈시울을 붉혔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고 간단히 말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유송림은 눈물로 남편의 시신만이라도 중국으로 가져 올 것을 마오쩌둥에게 부탁하였지만 해외 파병 중 전사한 중국군은 현지에 묻힌다는 전통을 깰 수 없고 수많은 중공군 전사자들과 형평이 마지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유송림이 북한에 있는 마오안잉의 묘소를 찾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아쉽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찾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몇 회에 걸쳐 유엔군 최고지휘부와 중국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의 아들들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그 역할을 다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피아를 떠나 자국의 국민들에게 지도층으로 모범이 되어줄 만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6·25전쟁사에는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는 있는데,  막상 이와 관련한 우리의 이야기는 찾기가 몹시 힘듭니다.


  물론 당시 국군 최고지도부의 대부분이 불과 30대에 불과할 정도여서 이런 경우는 구조적으로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군을 포함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빛을 발한 예보다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경악할 만한 권력층 비리를 찾기 쉽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6·25전쟁에 참전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처 : 어제와오늘과내일
글쓴이 : 홍순철 원글보기
메모 : 6,25 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