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아! 6,25 / 낙동강 방어(1)

단산사람 2010. 2. 17. 13:33

생생 6,25/남침/낙동강 방어

16. 누가 더 빠른가 ???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이 하동을 공격하기로 결심을 굳히는데 채병덕 소장의 조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개전 초의 패배를 책임지고 참모총장(당시에는 총참모장으로 통칭)에서 해임된 후 단지 명칭만 있는 ‘경남지구편성군사령관’으로 좌천되어 있던 채병덕은 무어에게 하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공격부대의 안내역을 자임하였습니다. 무어는 채병덕의 의견에 동의하고 하동을 공격하여 가급적 오랫동안 확보함으로써 진주 방어를 위한 시간을 획득하려 결심하였습니다.


[미군의 무덤으로 변한 하동고개]


  제19연대에 긴급 배속된 미 제29연대 제3대대는 무어의 명령에 따라 26일 0시 30분에 진주를 출발하여 우여곡절 끝에 하동 동쪽 8킬로미터 지점의 횡천리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습니다. 야간행군을 위험하게 생각한 제3대대장은 하동으로 진입을 다음날로 미루고 횡천리에서 일단 숙영하였는데, 당시 제3대대 병사들은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을 한잠도 자지 못했을 만큼 몹시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누렸던 마지막 휴식이었습니다.


  연대의 명령에 따라 27일 08시 45분경 하동고개를 향해 출발한 제3대대는 09시경, 우계리 일대에서 10~15명의 북한군과 조우하면서 이들을 추격하였는데 그것은 북한군이 파 놓은 함정이었습니다. 북한군의 뒤를 쫓아 하동고개로 진입한 순간 매복하여 있던 적의 집중사격이 시작되었고 순식간 고개에 갇힌 제3대대는 대항도 못해보고 붕괴되었습니다. 7월 28일에 집계된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52명, 행방불명 349명으로 추산되었고 제3대대를 안내하던 채병덕도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는 북한군이 유인책에 미군이 완벽하게 결려든 전투로 그해 9월 말, 미 제25사단이 하동을 탈환했을 때 미군 시신 313구를 발견하였을 만큼 치욕스런 결과였습니다.


[상황을 오판한 미군은 참담한 패배를 겪었습니다]


  이처럼 하동에서 뼈아픈 일격을 당하였음에도 제8군사령부는 그때까지도 북한군 제6사단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면한 적은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당기간 진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이 7월 29일 오전부터 정면공격과 함께 양익포위 공격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7월 31일 06시경 진주를 함락시키게 되었을 때 북한군 제6사단의 정체가 확인되었고 미군은 경악하였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북한군이 마산 코앞까지 다가왔던 것이었습니다.


  마산은 부산에서 불과 45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증원군은 아직 바다를 건너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마산을 노리는 적은 예상과 달리 2개 사단의 엄청난 규모였지만 이를 막아야 할 미 제24사단은 만신창이 상태였습니다. 긴박성을 감안한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유일한 예비인 제27연대를 마산에 투입하고, 7월 31일 부산에 상륙할 예정인 제5연대 전투단을 마산에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엔군과 북한군 간의 싸움은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 빠른가? 증원군이 부산에 상륙하는 것이 빠른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미 제25사단은 놀라운 기동을 선보이며 마산으로 전개하였습니다]


  결국 워커장군은 8월 1일부로 전 전선을 낙동강 선으로 철수시켜 병력을 절약하고, 상주에 있는 미 제25사단을 240여 킬로미터를 이동시켜 마산 정면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마산을 위협하고 있는 북한군 제6사단의 예상치 못한 진격이 유엔군을 놀라게 하였지만 이제부터 미 제25사단은 이를 능가하는 기동을 전사에 선보였습니다. 만난의 난관을 극복하고 미 제25사단은 36시간 만인 8월 3일 17시 30분, 마산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강화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보지 못한 이러한 놀라운 이동 전개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였습니다.

 

 

 

15.그냥 내준 호남 평야

7월 20일, 치열한 교전에도 불구하고 대전이 함락되자 아군은 소백산맥을 넘어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삼남의 갈림길인 교통의 요지 대전을 지나면 길이 크게 둘로 갈라지게 되는데, 하나는 대구를 거쳐 부산에 아르는  경부가도고 또 하나는 전주를 거쳐 목포에 이르는 호남가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황급히 미군이 참전하였지만 아군의 부족한 전력으로 이 축선을 모두 방어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7월이 되어서도 북한군의 진격은 매서웠습니다.]


  일본에서 건너온 미 제8군은 사령부를 대구에 신속히 설치하여 전의를 가다듬었지만, 호남 방면으로 내려 올 북한군을 상대할 전력은 없었습니다. 국군의 경우는 대전 함락직전인 7월 17일에 서해안지구방어사령부를 황급히 편성하였으나, 병력과 장비 면에서 소규모 민병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난관에 봉착한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대전 전투에서 참패 후 부대 재편을 서두르던 미 제24사단으로 하여금 호남지역을 포기하는 대신에 전선을 축소하여 외곽인 진주-함양-거창에 이르는 100킬로미터의 방어선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 제24사단은 대전에서 당한 피해가 워낙 커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하기 곤란한 상태였습니다.


  제8군은 이런 조치와 더불어 항공정찰을 강화하였는데, 장마철로 인하여 기상이 나빠 7월 20일 이후 호남지역으로 내려오던 북한군의 행적을 놓쳐 버렸습니다. 비가 그친 23일, 한 무리의 북한군이 군산에서 전주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제8군사령부는 이 부대가 대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라고 판단하고, 이들이 현 상태로 계속 진출한다면 7월 25일에는 전주까지 진출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항공정찰이 불가능하였던 3일간에 북한군은 아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놀라운 기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북한군 제6사단의 호남석권은 아군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들은 북한군 제4사단이 아니라 천안전투 이후 행방이 묘연하였던 북한군 제6사단이었고 어느새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경상남도 진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7월말까지 제8군은 호남지역의 북한군은 대전 점령 후 금산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 거창으로 내려오고 있던 제4사단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안에서 제4사단과 갈라져서 아군의 감시망을 벗어난 서해안의 장항선 철도를 따라 남진한 부대는 방호산(方鎬山)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6사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장항에서 금강하구를 도하하여 군산으로 넘어온 후 호남지방을 폭풍처럼 휘젓고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전주(20일), 광주(21일)를 차례로 점령하였고 이후 연대 단위로 흩어져 목포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25일)에 집결하면서 호남지역을 순식간 석권하여 버렸습니다. 그때서야 아군은 북한군 제6사단의 실체를 포착하였습니다. 미 공간사(公刊史)에는이 정보가 미국의 전쟁지도 방침을 변경시켰다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많은 미국의 전략가들이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은 한국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동이었다라고 경탄하게까지 만들었을 만큼 제6사단의 갑작스런 등장은 아군의 허를 찌른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제29연대 투입 직전의 하동]


  북한군 제6사단으로 인하여 경상남도의 서쪽 초입인 진주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워커는 이곳에 배치된 미 제24사단 제19연대의 전력 증강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극동군사령부에 병력 증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 본토에서 열흘간의 항해 끝에 오키나와 도착한지 하루도지나지 않은 미 제29연대의 두 개 대대(제1,3대대)가 시급히 한반도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들은 24일 부산을 거쳐 25일 진주에 도착하였지만 개인화기의 영점 조정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쉬지도 못하고 화급하게 제19연대에 합류하게 된 제29연대의 제1,3대대 장병들에게 제19연대장 무어(Ned D. Moore) 대령의 생각지도 못한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즉시 제1대대는 함양군 안의면 지역을 점령하여 방어하고, 제3대대는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하동을 공격하여 즉시 탈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명령을 접수한 모트(Harold W, Mott) 제3대대장은 부대원들이 전투경험이 전무한데다 상황에 익숙지 못함을 들어 일단 방어에 임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무어의 명령은 완강했고 그것은 비극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단 하루의 여유도 얻지 못한 채 전쟁의 모닥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14. 제17연대 복수전

국토가 38선으로 분단되면서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의 역외 영토가 된 지역이 있었는데 바로 옹진반도였습니다. 전쟁 직전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가 독립 제17연대였는데 무려 10배의 전력을 가진 북한군의 공격으로 개전 이틀 만에 이곳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상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사실 6·25전쟁 초기에 모든 아군 부대가 후퇴를 하였지만 개전 당일 당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의 후퇴 지시가 내려왔을 만큼 이곳을 사수할만한 전략적 가치는 사실 없었습니다. 비록 마지막 철수선에서 장병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옹진반도를 바라보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전쟁 전 옹진반도의 제17연대를 위문 방문한 여학생]


  전력을 보존한 채 해상 철수에 성공한 제17연대는 새롭게 창설된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청주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그러던 7월 중순, 중부 전선에서 부산을 향하여 남진하고 있던 북한군은 험준한 소백산맥을 돌파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특히 북한군은 개전 이래 그들에게 계속하여 치욕을 안겨준 국군 제6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충주-문경-상주 축선을 돌파기 위해 2개 사단을 집중하였습니다. 비록 제6사단이 선방하고 있었지만 병력증원이 절실히 요구된 중부전선의 위기였습니다.


  다급한 상황을 직감한 육군본부는 제17연대를 제2군단으로 배속전환하고, 상주 북방의 함창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제17연대는 제1대대를 선발대로 하여 7월 17일 04시에 대대별로 출발을 개시하였습니다. 청주를 출발한 제1대대는 보은을 거쳐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 부근인 상주의 화령장을 통과하는 도중 시골 노인으로부터 어젯밤 북한군이 이곳을 지나 상주 쪽으로 갔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교육 훈련 중인 북한군 보병]


  화령장은 산간의 협로였지만, 소백산맥을 통과하여 보은에서 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에서 상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합류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하지만 전력이 부족하였던 국군은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하였고 이점을 간파한 북한군은 이 곳으로 북한군 제15사단을 투입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제1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때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북한군 전령 1명을 생포하여 북한군 1개 대대가 어제 밤 이곳을 통과해 상주로 진출했으며, 본대인 제48연대가 후속할 예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대장은 북한군 사이에 끼여 상주 쪽으로 행군할 것이 아니라, 상곡리에 매복하여 북한군 제48연대 본대를 기습할 것을 결심하고, 7월 17일 15시경까지 전투준비를 완료한 후 북한군의 접근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16시경, 제1대대가 매복중인 상곡리에 북한군의 행군대열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선발대대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관계로 경계를 풀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1대대의 모든 화기는 일제히 불을 뿜었고 1시간의 공격 끝에 북한군 제48연대는 붕궤되어 버렸습니다. 이 전투로 제1대대는 250명의 적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1,200여정의 소총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는데 전사는 이를 ‘상곡리 기습전’이라 명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17연대의 선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령장 전투 기념행사]


  다음날 제17연대 제2대대가 제1대대를 후속하여 화령장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북한군 제15사단의 제49연대가 제48연대를 후속할 예정이라는 귀중한 첩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제17연대장 백인엽(白仁燁) 대령은 제49연대마저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제1대대를 현 위치인 상곡리에, 제2대대를 상곡리 북서쪽 동관리에 매복시켰습니다. 그리고 3일 후 도로를 따라 밀집종대로 행군하며 내려온 북한군 제49연대는 제2대대의 포위망 안에 완벽하게 갇히게 되었고 기습에 순식간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작전으로 적 356명이 사살되고, 26명의 포로가 잡혔는데 이 전투가 바로 동관리 기습전입니다.


  제17연대 제1대대의 상곡리 전투와 제2대대의 동관리 기습전은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방심하고 있던 북한군 선두부대를 격파해 중부전선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육군본부에서는 제17연대 1대대의 상곡리 전투와 2대대의 동관리 전투를 합하여 화령장 전투로 명명하고 화령장에서 대승을 거둔 제17연대 전 장병을 1계급 특진시켰습니다. 제17연대는 연대 전체가 특진하는 2번째 연대가 되면서 옹진반도 철수시 흘린 통한의 눈물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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