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현대사 100년

을사조약과 이준 열사 이야기

단산사람 2010. 1. 3. 15:39

을사조약

조선 광무9년 (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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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1945년 8월15일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식민지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일본 식민지가 되었을까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한일의정서'(1904)라는 조약을 맺게 했다. 조약 내용은 대한제국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러일전쟁에 필요한 일본의 병력과 무기를 일본이 원하는 곳에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어 우리나라에 '제1차 한일협약'과 '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했다. 1차 조약(1904) 내용은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게 한다는 것이었고, 2차 조약(1905)의 내용은 대한제국이 다른 나라와 맺게 되는 모든 외교 문제를 일본이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제1차 한일협약'은 맺었지만, '제2차 한일협약'은 사실상 우리나라의 주권을 넘기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하지만,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17일 대한제국의 대신 여덟 명을 불러내 위협하며 '제2차 한일협약'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여덟 명의 대신 가운데 세 명(한규설·민영기·이하영)은 반대했지만, 다섯 명(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은 찬성했다.

이렇게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했고,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 정치 전체에 대해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통감으로 온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때가 을사년(1905)이라 '을사조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을사조약에 찬성했던 다섯 명의 대신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일본이 많은 땅과 높은 지위를 준다는 말에 넘어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의미다.

고종 황제가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을사조약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우리 민족의 분노는 폭발했다.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아 저항했고, 학생들은 휴학했으며, 이상설·최익현 등의 전직 관리와 유생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고종 황제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나라를 구하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날을 목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논설을 써 일본의 침략과 매국노의 행동을 꾸짖었다. '대한매일신보'나 '제국신문' 등의 언론도 을사조약 반대 운동의 소식을 전해 민족 항일 정신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고종 황제는 조약 체결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미국과 네덜란드 등에 특사를 보내는 등 국제 사회에 독립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호소했지만, 당시 세계는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오히려 고종이 일본에 의해 1907년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한 것은 1910년부터였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것은 1905년 을사조약을 맺은 뒤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의 일본 식민 지배는 민족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가 끊어진 치욕적인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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