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7]
단산면 사천2리 띄기마을 ‘삼절당’
삼절당(三節堂)
허방, 허윤공, 허지의 위패를 모신 제실
‘선비에게 길을 묻다’에 출연한 허정진 회장이 허윤공 할아버지의 시를 읊조리는 모습
띄기마을 소재 양천허씨 낭천종
종택 마루에 걸린 가훈 효절(孝節)
삼절당은 단종절신 허방-허윤공-허지 삼대의 위패를 모신 곳
허방은 단종을 끝까지 모시다 3년상을 치루고 장릉 인근에 은둔
허윤공은 금성대군을 도와 단종과의 밀지를 전하고 격문을 초하다
허지는 벼슬을 버리고 영월로 가던 중 병을 얻어 숨을 거두었다
단산면 사천리 ‘삼절당’
삼절당은 단종절신 현감(縣監) 허방(許邦)과 그의 아들 판관(判官) 허윤공(許允恭) 그리고 손자 현감 허지(許智)의 절의(節義)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 용규(龍揆)가 1876년 건립한 사당(祠堂)이다. 삼절당이 있는 띄기마을은 조선시대 때는 순흥부 동원면에 속한 곳으로 지금은 단산면 사천2리 띄기 또는 모계동(茅溪洞)이라 부른다.
찾아가는 길은 단산면 사천1리 새내에서 단산 방향으로 1.5km쯤 올라가다가 바우마을 앞에서 좌회전하여 서북 방향으로 1.5km가량 올라가면 소쿠리형 골짝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1457년 영월 그리고 순흥
1457년 6월 단종은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다. 이때 순흥에서는 1456년 6월에 이미 귀양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단종복위’라는 대의를 받들어 분연히 일어나 강개(慷慨)한 뜻을 함께하고 있었다. 한편 전국 각지의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따라 영월과 순흥 인근으로 낙향하였는데 이때 허방, 허윤공, 허지 3대도 영월로, 순흥으로 낙향했다. 1457년 7월 순흥에서 일어난 단종복위운동은 순흥 사람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이를 일명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일컫는다. 이 사건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에 이어 세조의 왕위찬탈(1455),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1456), 순흥의 정축지변으로 이어져 끝내 단종과 금성대군은 죽음을 맞게 된다.
단종의 임종을 지킨 ‘허방’
허방(許邦, 1391-1459)은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21세손이며, 동주사공(東州使公) 정(程)의 10세손이다. 자는 중안(仲安), 호는 석헌(石軒)이며, 소(劭 )의 손자로 사재감 직장 칭(稱)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충주 한씨로 현령 명수(明秀)의 딸이다.
허방은 단종에 대한 지극한 절의를 실천한 충신 중 충신으로 손꼽는다. 그의 출생지와 연고지는 충북 진천이다. 그런데 그의 묘소는 영월 장릉에서 가까운 서진촌(西津村)에 있다. 이는 그가 낭천(狼川, 현 강원 화천) 현감(縣監) 벼슬을 버리고 영월로 달려가서 단종을 끝까지 모시면서 임종(臨終)을 지켰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455년(단종3년) 단종이 폐위되던 날 허방은 낭천 현감으로 있었다. 1457년 6월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자 허방은 벼슬을 버리고 영월로 향했다.
그때 함께 간 장자 윤공을 순흥으로 보내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을 도모(圖謀)하게 했다.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장마철이라 음식 구하기가 어려웠다.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이것을 걱정하자, 허방이 박에 매달아 밥을 전달하는 계책을 가르쳐 주어 어공(御供)을 이어가게 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허낭천(許狼川)이 아니었으면 엄호장(嚴戶長)의 충성도 없었을 것”이라 하였다.
1457년 10월 단종이 승하하자 그는 급히 관곽(棺槨)과 염습(殮襲) 도구를 갖추어 엄호장과 함께 침실로 들어가 시신을 거두어 염하고 곡한 다음 호장으로 하여금 관을 지게하고 뒤 따라 가서 을지산(乙旨山) 서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공은 묘소 옆에 몸을 숨기고 산과(山果)를 주워 곡하며 3년상을 치룬 후 인근 산속에 은둔하며 종신토록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다음은 공이 남긴 충절의 시 4편 중 ‘화장릉자규시(和莊陵子規詩)’이다.
子規哀訴恨難窮(자규애소한난궁) 자규의 슬픈 하소연 한을 다하기 어려우니,/盡日化枝血染紅(진일화지혈염홍) 하루 종일 꽃가지에 울어 피가 붉은 꽃에 물드누나./何處靑山非爾所(하처청산비이소) 어느 곳의 청산인들 너의 살 곳이 아니기에,/胡然向越惱宸衷(호연향월뇌신충) 어이하여 영월을 향해 와서 임금님 마음 괴롭게 하나.
밀지 전하고 격문 초(草)한 ‘허윤공’
허윤공(許允恭, 1414-?)은 절행(節行) 방(邦)의 아들로 자는 효응(孝應), 호는 남재(南齋)이고 어머니는 해주 오(吳)씨로 군수 상지(相祉)의 딸이다. 진천(鎭川) 금곡리(金谷里)에서 태어난 허윤공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엄격하였으며, 효선이 독실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일찍 사마(司馬)에 올라 벼슬이 공주판관(公州判官)에 이르렀고, 단계 하위지(河緯地), 추강 남효온(南孝溫) 등과 교의가 깊었다.
그는 공주 판관으로 재직 중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부친과 함께 영월로 갔으나 부친께서 “너는 순흥으로 가서 금성대군을 도우라”는 명에 따라 순흥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린 단종과 금성대군을 잇는 생명줄을 자처한 허윤공은 금성대군이 써준 밀지(密旨)를 가슴에 품고 인적 드문 곳을 택해 영월로가 단종에게 전하고, 단종이 써준 밀지를 심산유곡으로 길을 잡아 순흥으로 와 금성대군에게 전했다. 또 금성대군을 도와 거사를 주획(籌劃)하고 격문(檄文)을 초(草)하는 등 단종복위(端宗復位) 의거에 적극 가담하였고, 평생 단종에 대한 흠모와 절행으로 일생을 보냈다.
당시 허윤공이 띄기에 터를 잡으면서 양천허씨 순흥 입향조가 됐다. 그의 순흥 입향은 처가가 순흥부 병산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은 공이 남긴 절의의 시 4편 중 ‘청령포(淸泠 浦)’ 시이다.
錦水滔滔日夜鳴(금수도도일야명) 금수가 도도히 흘러 밤낮으로 우니,/臣民千載恨難平(신민천재한난평) 신하와 백성들 천년토록 한을 잊기 어렵네./臨流痛哭悲何盡(임류통곡비하진) 강물에 임하여 통곡하니 슬픔 어이 다할까,/慙愧當然我獨生(참괴당연아독생) 당년에 나 홀로 산 것이 부끄럽노라.
영월로 향하다 숨진 ‘허지’
허지(許智, 1434-미상)는 판관 윤공의 아들로 어머니는 창원황씨로 봉례공 황전(黃躔 )의 딸이다. 진천 금곡에서 태어난 지(智)는 청수한 용모에 자질이 예사롭지 않았고, 경사(經史)를 두루 익혔으며, 행실이 독실했다.
그가 보령 현감으로 있을 때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조부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벼슬을 버리고 영월로 향했다.
그러나 영월로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의관을 정제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네 번 절한 후 “나를 영월에 묻어 달라. 내가 평소에 지은 글을 모두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유언대로 영월의 동쪽 계족산(鷄足山) 기슭에 잠들었다.
3대의 사적은 『단종충의록(端宗忠義錄)』과 『양천허씨세고(陽川許氏世稿)』, 『삼절당기(三節堂記)』에 전한다.
허윤공의 후손들
허윤공이 단종복위 거사에 동참하면서 숨어 살던 이곳은 순흥 금성단과 직선거리로 2.5km쯤 되는데 산길로 숨어 다녔으니 10리 이상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띄기마을은 양천허씨 500년 세거지이다. 영주의 양천허씨는 대부분은 허윤공의 후손으로 띄기를 중심으로 단산면 구구리, 모산리, 부석면 보계리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다.
지난해 말 채널A(TV) 특별기획 ‘선비에게 길을 묻다’가 2020.12.23 방영됐다. 촬영팀이 삼절당을 찾았을 때 허정진(39세손, 양천허씨 동주사공파 중앙종회장) 회장은 “삼절당 제실에 걸린 이 시는 남재공(허윤공) 할아버지가 생전에 읊조린 충절의 시이다. 이 시를 할아버지께서 읊조리듯 제가 읊조려 보겠다”며 낭송했다.
“원통하다. 마음속 원한이 가득해서 생사를 불문하고 구 왕을 섬기는 마음만 가득했네. 처음 가는 길은 험한 골짜기로만 다녔네. 누가 볼까 봐 두려워 빽빽한 산림 속으로만 다녔네.
내 마음 백세가 되어도 소무(蘇武, 한무제 때 충신)의 마음과 같고, 두 임금 섬기지 않음은 백이(白荑, 은나라 충신)의 마음과 같아라. 늘 충성과 효를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단종을 자주 뵈오니 눈물만 옷깃을 적시네.”라고 읊조렸다.
삼절당 취재에 협조해 주신 허정진(모산) 중앙종회장, 허창규(구구) 영주종회장, 허업(구구) 사무국장, 허정윤(모산) 박사, 허정호(보계) 선생, 허문규 띄기회장, 허태규 띄기지도자님께 감사드린다.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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