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장수 갈산 돌마람(石宗) 마을, ‘의산서원’에 숨겨진 보물

단산사람 2021. 4. 18. 21:39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9]

장수면 갈산1리‘의산서원’

                                                                   의산서원 전경

 

영주에서 가장 오래된 토석 담장, 오래된 건물·서책들 수두룩
후손들 정성으로 서원 이전(성곡-갈산), 도기념물(172호) 지정
400년 이어온 제향과 효(孝), 후손들에 전하려는 노력 돋보여

 

경상북도 기념물 ‘의산서원’

의산서원(義山書院)은 장수면 갈산1리 속칭 돌마람(石宗) 마을에 있다. 돌 석(石)자에서 ‘돌’ 자를 따고 마루 종(宗)자에서 ‘마루’를 따 ‘돌마루’라 부르다가 지금은 ‘돌마람’이라 부른다.

중앙고속도로 영주IC(장수) 사거리에서 용암산-성곡 방향 3.6km 지점에 있는 의산서원은 의병대장으로 명성을 날린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을 모신 서원이다. 마을 앞 도로변에 성오당 선생의 충효 정신을 기리는 벽화가 있다.

서원에 들어가 보면 오래된 집과 담, 옛 학교의 모습, 수많은 서책들, 조상을 지극히 모셨던 선조들의 노고 등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의산서원은 제향과 충효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2016년 3월 17일자 경상북도 지정기념물 제172호로 지정·고시됐다.

                                                                 의산서원 강당

 

성오당 이개립은 누구?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다. 대호군 이욱(李昱)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부호군 이선동(李善童)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이준(李竣)이며, 어머니는 예천권씨로 권공례(權公禮)의 딸이다.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이개립(1546~1625)은 1546년(명종1) 당시 용궁현(현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소고 박승임을 비롯한 고을 학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22세 때 진사가 되었으나 부모를 모시기 위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3일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효성을 보였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에 임용되었지만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이 도내 일대를 순회하며 거병을 독려할 때 성오당은 인근 사우(士友)들과 세를 규합 의병장으로 나아가 왜군의 공세를 완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또 정유재란 때는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눈부신 활동을 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돌마람에서 제자들을 모아 강학에 힘쓰는 등 학문에만 정진하는 삶을 살았다.

                                                              토석담장과 성오당 정자

사원에서 서원으로의 역사

태백에서 소백으로 소백에서 주마산으로 주마산에서 동으로 한줄기가 달려오다가 멈춘 곳이 행의사(行依寺, 성곡2리)다. 이 절은 고려 때 승려 각월(却月)이 중건했다고 전하며 조선 초 억불숭유 정책으로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의산서원의 건립은 지역 사림(士林)에서 성곡2리 의산(義山) 마을 속칭 분지거릉골에 있던 행의사 절터에 의산서당을 건립하면서 시작됐다.

절터에 서원을 건립했다는 사실은 사원(寺院)에서 서원(書院)으로 옮겨가는 시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절은 산수 수려하고 아늑하여 성오당이 평소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그는 현감 고한(高翰)과 함께 이곳에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교육하려 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1610년(광해2) 군수 진상홍(秦尙弘)을 비롯한 이개립의 둘째 아들 희음(希音) 등 지역 사림들이 이개립이 추진하던 서당 건립을 다시 논의하여 군수 강인(姜絪)의 지원을 받아 의산서당을 세웠다.

                                                        석종재-묘소 수호위한 재사

서당-서원승격-훼철-이건 복원

1664년(현종5) 학사 김응조를 비롯한 지역 사림은 의산서당에 별도로 사당을 건립하여 이개립을 제향하고 사당 이름을 절효사(節孝祠)라 하였다. 서당에 사묘가 건립됨으로써 이후 서원으로 승격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1679년(숙종5) 김응조를 추향하고, 1697년 9월 지역 사림이 논의하여 의산서원으로 승격했다. 그 후 1871년(고종8) 대대적인 서원 훼철 때 의산서원도 함께 훼철됐지만 강당과 재실 등 건물은 그대로 보존해 왔다.

100여 년 후 1982년 성곡2리에 있던 의산서원의 강당을 갈산 돌마람으로 이전 복원하게 됐다. 후손 이진호(성곡1, 12세) 전 회장은 “서원은 훼철됐으나 건물은 문중에서 보존 관리해 오다가 1982년 갈산으로 이전 복원하게 됐다”며 “당시는 길이 없고 차도 없을 때라 지게와 구루마로 운반했다”고 말했다.

성오당 후손들은 수많은 전란과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보릿고개를 넘으면서도 역사를 잇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노력과 정성 자체가 ‘숨겨진 보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성오당의 묘와 지하후손들 묘

                                                               이개립 문중 유물관(갈산1리)

 

서원·묘소·재사 한곳에

의산서원은 서원영역과 묘소영역이 있다. 서원 영역에는 경모사(사당), 의산서당, 성오당과 양졸당, 석종재, 세덕사 옛터 등이 있고, 묘소영역에는 성오당의 묘를 비롯한 지하 후손들의 묘 10여 기가 있다.

서원 맨 앞쪽에 있는 성오당·양졸당 정자는 토석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정자는 성오당이 생전에 강학을 위해 건립한 정자로 1600-1610년 사이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토석담장은 영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담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정태 문중회장은 “이 누정은 성오당 선조님 생전에 건립된 정자로 4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담장 또한 당시 축조한 것으로 전해져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의산서당 건물은 1610년 성곡에 건립되었다가 400년 후인 1982년 현 위치로 이건됐다.

석종재(石宗齋)는 300여 년 전인 1716년(숙종42) 성오당 묘소 수호 및 세덕사 재사로 건립됐다. 맨 뒤에 있는 경모사(景慕祠)는 1982년 의산서원 이건 시 건립한 사당으로 양희공 이흥적과 성오당 이개립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개립 의병장 벽화(갈산1리)

 

이개립 문중 소장 전적들

돌마람 마을 가운데 의산서원 유물관이 있다. 이 유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전적(典籍,서책)들은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11월 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9호로 지정됐다.

이 유물관에는 이황, 류성룡, 김성일 등의 서간집을 비롯하여 퇴계 선생 유묵, 한석봉의 시, 이개립 사마시 합격 관련 유생들의 시, 성오당의 팔영(금당실 경치), 이개립에게 보낸 28현의 서간, 영남유림 12현의 계모임 명단, 율림사경, 한석봉과 이휘음 유묵첩, 임금이 내린 교지와 기타 고문서 등 1천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 성오당의 팔영(八詠), 율림사경(栗林四景), 종남산동도회(終南山同道會), 이황·류성룡·김성일의 서찰 등 412점은 2017년 소수박물관에 기탁했다. 최근 319년 전인 1700년경부터 문중회의 참석자를 기록한 문서가 발견되어 보물급이다.

이철우 도지사 초헌관 참제(2020)

 

의산서원의 제향(祭享)

의산서원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400년 이어 온 제향(제사)의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았다. 1697년 의산서당이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이개립과 김응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이어왔으나 1871년(고종8) 대대적인 서원 정비 때 훼철되어 성오당의 위패는 현 위치에 있는 세덕사에 봉안하였고, 학사의 위패는 풍산김씨 문중 사당으로 이안됐다.

서원은 훼철됐지만 제향은 이어져 왔고, 1982년 의산서원을 이건 복원할 때 경모사(景慕祠)를 건립하여 성오당의 6대조인 양희공(襄僖公) 이흥적(1390-1465,계림부원군)과 성오당 이개립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3월 10일과 10월 1일 제향하고 있다.

2020년 11월 15일(음10.1) 추향(秋享) 때 공의 8대조 문정공(文靖公) 제정(霽亭) 이달충(李達衷,1309-1384)을 추가 배향(配享)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이달충은 1326년(충숙왕13)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좨주, 밀직제학, 계림부원군을 지냈으며, 후에 문정공(文靖公) 시호가 내려졌다. 이날 고유제의 초헌관은 이철우(李喆雨, 문정공의 후손) 경북지사, 아헌관은 이태진 교수(종손 李在璋의 차남), 종헌관은 이양호(李良鎬) 전 농업진흥청장이 분정되어 잔을 올렸다.

성오당의 후손들을 살펴보면 아들 휘음 문과·희음 진사, 손자 숭언 문과·상언 문과, 증손 달의 문과·호의 생원·술의 진사·석의 문과·적의 문과, 현손 태익 진사·기익 진사, 5대손 원배 생원·중배 문과·항배 진사·광배 문과, 8대손 벽수 진사 등 문과 8인, 진사 8인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이시동(15세) 문중 총무는 “오늘의 의산서원을 있게 한 선조님들의 노력과 정성에 감사드린다”며 “특히 이정태(15세) 현 회장님은 문화재 지정(경북도기념물)을 위해 수년간 수천리길을 오가며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문화재 등록을 성사시켰다”고 말했다.

취재에 협조해 주신 이중호(12세), 일창(14세), 시택(15세) 선생께도 감사드린다.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