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6] [탐방일:2020.7.30]
풍기읍 수철리 희방사 월인석보
월인석보, 한글창제 후 불교서적을 최초 한글로 번역한 책
1459년 초간본 발행 후 1568년 희방사에서 복각-인쇄-보급
잃어버린 목판 복각 위해 영주시와 시민들이 뜻을 모아야
희방사 전경
우리고장 희방사에는 부처님 일대기를 새긴 월인석보(月印釋譜) 목판과 그 판본(목판으로 인쇄한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조선 때 희방사는 ‘월인석보’라는 보물을 소장하고 있어 명성이 높은 사찰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나뿐인 이 보물이 안타깝게도 6.25 난리 통에 불태워지고 말았다. 그것도 불가항력의 재변(災變)이 아닌 순 인위(人爲)에 의해 소멸시켰으니 애석하다기 보다 너무도 기막히고 어이없는 노릇이다.
‘월인석보’란 어떤 보물인가?
‘월인석보(月印釋譜)’ 이야기는 세종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불교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책을 만들라”고 명한다.
이에 세조는 법화경(法華經) 등에서 뽑아 모은 글을 한글로 옮겨 1447년(세종29)에 완성하고, 1449년(세종31) 간행한 책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세종은 아들이 지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른 (부처님)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세조는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과 아버지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세조 5년 1459년에 불교대장경(佛敎大藏經)을 편찬하니 이것이 유명한 ‘월인석보’다.
월인(月印)은 월인천강지곡의 준말로 ‘밝은(석가의 말씀) 달빛이 천강(千江)에 비친다는 뜻’이고, 석보(釋譜)는 석가의 연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이 책은 세종 말엽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약 13년에 걸쳐 이룩한 사업으로, 석가 일대기의 결정판일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佛經諺解書)로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568년 희방사에서 월인석보 복각
월인석보는 총 25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초간본 권1, 2,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1, 22, 23, 25 이렇게 19권이 발견되었고, 권, 3, 4, 5, 6, 20, 24 등 6권은 아직 찾지 못했다.
월인석보 희방사본은 초간본(1459)을 바탕으로 선조1년 1568년 희방사(喜方寺)에서 권1과 권2 책판을 복각했다. 이 때 새로 새긴 월인석보 판목은 권1이 106장, 권2가 81장 모두 187장이다.
월인석보 권1-2(月印釋譜 卷1-2)는 첫 권인 권1과 권2의 합본으로 세조 5년(1459)에 간행됐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1568년 권1,2만 풍기 희방사(喜方寺)에서 다시 복각했는데 이 책이 월인석보 권1,2 희방사본이다.
좌로부터 훈민정음(언해본), 월인석보 권1 표지, 권2 표지, 2018 경북도 복각 목판
월인석보 권1 표지(희방사 소장)
월인석보 권2 표지(희방사 소장)
월인석보 권2 표지(장서각 소장)
권2 말미에 「1568년 10월 소백산 풍기 희방사에서 개판」이라고 썼다.
권1 책속의 팔상성도(그림으로 본 석가 일대기) 및 당시 글자모양
‘세종어제훈민정음’을 ‘언해본’이라고도 한다.
석보성절 서(序)와 당시 글자모양
그림으로 보는 팔상성도(장서각 소장)
2018 복각하여 찍어낸 훈민정음 첫머리 모습
2018년 복각한 목판(희방사 소장)
월인석보 희방사본은 어디에?
희방사본 월인석보 권1과 권2가 경기도 성남시 소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하여 7월 24일 장서각에 갔다.
그러나 열람 절차가 까다로워 원본 열람은 하지 못하고 청사진 열람만 가능했다. 장서각 소장본은 안춘근(安春根) 구장(舊藏)의 필사본이라고 한다. 이동(以東) 이진환(李震桓)이 1920년대 필사한 책으로 판각을 위해 정성들여 쓴 판하본(版下本)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월인석보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중 30여 년 동안 월인석보 연구에만 전념한 권기식(풍기출신) 선생을 소개받아 많은 자료를 제공받고 자문도 받았다. 행운이다.
또 희방사 설송 스님과 전화통화에서 “권1,2 판본이 희방사에 있다”는 말씀을 듣고 지난 8월 3일 희방사에 갔다. 이날 설송 스님의 배려로 월인석보(권1,2) 판본을 친견할 수 있었다.
지금 희방사가 소장하고 있는 권1,2는 1568년 희방사에서 복각한 판본인지, 아니면 1920-30년대(6.25전)에 인출한 후쇄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설송 스님은 “1954년 희방사를 중건한 안대근(安大根) 스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책”이라고 말했다.
희방사본 권1 표지에는 ‘팔상성도도’, ‘훈민정음(訓民正音)’, ‘월인천강지곡’이라고 씌어 있고, 2권 말미에는 「隆慶二年戊辰十月慶尙道 基小白山池叱方寺改版(융경이년무진십월경상도풍기소백산지질방사개판」이란 간기(刊記)가 있다. 선조1년 1568년 10월 경상도 풍기 소백산 지질방사(희방사의 옛 이름)에서 ‘월인석보 권1,2를 새로 새겼다’는 뜻이다.
희방사본의 의의
희방사본은 초간본 발행(1459) 이후 100여년만인 1568년에 희방사에서 복각했다는 점에서 1차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왜 권1,2만 복각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월인석보 권1 권두에 ‘세종대왕 훈민정음(언해본, 나랏말싸미…)’이 실려 있고, 이어서 석가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성도도(八相成道圖)’, 세조가 쓴 ‘석보상절(釋譜詳節) 서문’, 세조가 쓴 ‘월인석보(月印釋譜) 서문’ 등 월인석보 25권 중 가장 핵심부분이 들어있기 때문에 재판(再版)을 위해 복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희방사본(권1,2)은 널리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전국 주요도서관에는 희방사본 후쇄본이 상당수 남아있어 연구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다한다.
다음은 ‘왜 희방사일까?’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희방사는 태백산 사고지와 같이 사람의 접근이 어렵다는 장점이 있다. 또 당시 성균관 학사들이 한글창제를 반대했듯 성리학자들의 반대에 대한 대응으로 비밀리에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희방사본 권1 권두에 ‘훈민정음’(언해본이라고 함)’이 들어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의의’라 할 수 있다.
월인석보 권1,2에 담긴 내용은?
1995년 2월 전남 장흥 보림사 사천왕상의 무릎과 발등에서 월인석보 제25권이 발견되어 월인석보는 현재 25권 중 19권이 발견됐고, 6권은 유실된 상태다.
월인석보 권1 권두에 세종임금의 훈민정음(언해본이라고도 함)이 나온다. ‘나랏말싸미…’로 시작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새로운 글자 28자를 만드나니…’가 나오고 훈민정음 자모(字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에 팔상성도(석가의 일대기) 그림 14장이 나오고, 석보상절 서문, 월인석보 서문, 월인석보 본문이 나온다. 본문에는 부처님께서 ‘백억 세계의 화신이 되어 교화하심이 달(月)이 일천(一千)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서문에 이어 월인천강지곡 발심공양품 등이 나온다.
권2에는 석가모니의 잉태와 탄생 편으로 석가의 탄생지, 마야부인에 잉태, 태중에도 법을 설함, 람비니 동산에서 탄생 등이 담겨 있다.
잃어버린 보물, 월인석보 판목
향토사학자 송지향 선생은 영주영풍향토지 권두에 “나라에 유일한 월인석보 1,2권은 1권 머리에 훈민정음판 15장(30면)이 얹어 있어 더욱 소중한 보배였는데 이를 인위적으로 인멸케 한 무지는 한갓 문화적인 손실이라 보기보다 조상에 대하여, 후손에 대하여, ‘길이 씻을 길 없는 크나큰 죄과’라 하여 마땅할 것”이라고 썼다.
때는 6.25전쟁 1.4후퇴 무렵이었다. 당시 영주군수는 1950년 1월 10일 소백산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떨어지자 경북도에 ‘월인석보를 이관하겠다’며 경비 10만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희방사는 다음해 1951년 1월 13일 오후 3시 (작전상이란 이유로) UN군에 의해 건물 5동이 소실되면서 불상, 월인석보 권1,2 판목(187장), 법화경 판목, 두운대사 영정 등 소중한 문화재가 사라지고 말았다.
영주군수가 경북도 문화사회국에 요청한 월인석보 등 문화재 이관 비용 10만원은 당시 시가로 쌀 7-8가마 값에 불과했다고 한다.
경북도 월인석보 복각사업 시작
경상북도는 2016년 훈민정음 해례본 복각본을 펴내 그 가치를 널리 알린 바 있다.
선조 1년(1568) 경상도 풍기 희방사에서 월인석보 권1,2를 복각·보급하여 훈민정음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월인석보 희방사본 권1 권두에 「세종어제훈민정음」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훈민정음 언해본이다. 해례본은 단행본으로 나와 있지만 언해본은 단행본으로 간행되지 않고 권1 속에 포함되어 있다.
본래 언해본이란 이름은 없다. 지금 사람들이 해례본에 준해 ‘언해본’이라고 부른다. 경상북도는 2018년 2월 희방사본 권1 속에 있는 世宗御製訓民正音(언해본) 부분만 발췌하여 2018년 2월 복각을 완료하고, 그해 6월 26일 도청에서 기증식을 가진 후 목판 8장(15면)을 희방사에 기증했다.
희방사 설송 스님은 “월인석보 희방사본 권1,2가 완전 복각되어 본래대로 희방사에서 보존되기를 희망한다”며 “영주시는 월인석보를 보존할 보존각을 2020년 완공했다. 영주시와 영주시문화단체들은 월인석보 희방사본 복각사업이 조속 추진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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