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영주지역 불교문화유산 답사기’]6. 비운의 사찰 ‘숙수사(宿水寺)’①
현재 소백산 자락에 있는 사찰 중에 창건연대가 가장 오래된 사찰은 희방사다. 희방사는 643년(선덕여왕 12) 두운(杜雲)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호랑이와 얽힌 창건연기가 전한다.
희방사 외에서 소백산 자락에는 7세기에 조성된 사찰이 여러 곳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소백산 자락과 영주의 사찰 창건 연대를 살펴보면 대부분 7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집중되어 있다.
표)에서 언급한 사찰 외에도 현재 터만 남아 있거나 기록만 전하거나, 석불·석탑과 같은 유물만 있는 곳을 포함하면 그 수는 상당할 것이다. 열거한 모든 사찰을 소개할 수는 있겠지만 이 중에 사료와 유물 등이 상당수 남아 있는 몇 곳만을 선정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현재 소수서원이 자리한 ‘숙수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숙수사는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고 있지만 사찰의 규모나 성격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숙수사 터전 위에 지금은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이전 사찰로서의 숙수사는 부석사와 함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 옛 절은 사라지고 지금은 남의 터전이 되어버린 그 땅에 외로이 옛 숙수사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당간지주.
본격적인 숙수사 답사에 앞서 숙수사의 폐사 시기부터 확인하고자 한다. 숙수사의 폐사 시기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조선 세조때 단종 복위사건으로 순흥부가 폐지되면서 폐사되었다는 설과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몽고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는 설은 신빙성이 없다. 숙수사와 관련된 기록으로 볼 때, 먼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며 순흥 출신인 안향(安珦: 1243~1306)이 어린 시절 숙수사에서 수학을 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도 이 절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향의 손자인 안목(安牧: ?~1360)의 생몰연대를 추정해 본다면 몽고의 침입과는 거의 연관이 없어 보인다.
특히 주세붕이 소수서원을 세울 당시인 1542년 이전에 이미 폐사가 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해 본다면 숙수사는 14세기 중반이후 16세기 이전에 폐사가 된 것이 확실하다. 이 기간 동안 순흥에서는 1456년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나 순흥부가 폐지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숙수사의 폐사 시기를 이즈음으로 보고 있지만 그보다는 14세기 중반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
영주 지역과 왜구와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면 먼저 부석사 무량수전 기록이 있다.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에 따르면 1358년 적병화(敵兵火)로 무량수전이 소실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서 적의 병화가 왜구들을 지칭하는지 여부는 판가름하기 어렵지만, 이즈음의 또 다른 기록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사건이었음이 확실하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 풍기군’조에는 숙수사가 소백산에 있다고만 간략하게 소개하였는데, 같은 기사의 인물(人物)조에는 충주병마사였던 최운해(崔雲海: 1347~1404)의 이력에서 1385년 왜구를 격퇴한 공적을 살펴보면 숙수사의 폐사시기는 더욱 분명해진다.
소수서원 곳곳에는 숙수사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불상의 대좌는 제실의 디딤돌, 법당을 받쳤을 주춧돌은 이런저런 건물들의 주춧돌로 남아 있다.
최운해가 순흥부사가 되었을 때 당시 객관(客館)에 웅거하며 매일 침략을 일삼은 왜구를 격퇴하고, 노획한 우마(牛馬)와 재화(財貨)를 병사와 주민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또 굶주리는 백성을 잘 구호해 칭송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순흥 지역이 왜구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숙수사가 온전히 그 사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숙수사의 폐사 시기는 14세기 후반, 즉 왜구가 순흥, 영주지역을 침략했던 1358년경부터 1385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폐사 이전 숙수사와 관련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중 눈여겨 볼만한 것을 간추려 살펴본다.
①경남 산청 지곡사 진관선사비(981년(고려 경종 6년)
정종(定宗) 문명대왕(文明大王)이 흥주(興州) 숙수선원(宿水禪院)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선사는 사생(四生)들에게 약석(藥石)을 베풀어 모두에게 치료하기 어려운 침아병(沉痾病)을 낫게 하였으며 육로(六路)에 다리를 놓아 모두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였다.
②임경식묘지명(林景軾墓誌銘) (1161년(고려 의종15년))
둘째 유승(惟勝)은 머리를 깎고 중대사(重大師)로 숙수사(宿水寺) 주지로 있다.
③순흥 숙수사루(順興宿水寺樓) 노여(魯璵: 고려. ?~?)
가벼운 행장, 짧은 모자 쓰고 그윽한 곳 찾아드니 / 輕裝短帽一尋幽
난원에 10년 전 놀이하던 곳 의연하구나 / 蘭院依然十載遊
벽 값은 언제나 시로써 중해질꼬 / 壁價幾年詩共重
절 이름은 천고의 물과 함께 흐르네 / 寺名千古水同流
선뜻 산빛을 밀어 내며 스님이 문을 닫는구나 / 寒推嶽色僧扄戶
싸늘한 물소리 밟으면서 손이 다락에 오르네 / 冷踏溪聲客上樓
휘파람 불며 서성거리는데 해가 차차 저무니 / 長嘯徘徊日云暮
난간서 머리 돌리매 고향 생각 이누나 / 倚欄回首起鄕愁 〔출전: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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