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소수서원

소수서원 공부하기

단산사람 2020. 4. 29. 22:24


세계유산 최초의 영주 소수서원 주자바라기 회헌 안향과 선비촌

       


주 소수서원(紹修書院)은 민족교육의 산실로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유현(儒賢)인 안향(安珦)의 연고지에 조선 중종 37년(1542년) 사묘(祠廟)를 세워 위패를 모시고, 다음 해에 학사(學舍)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고, 명종 5년(1550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나라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받게 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인 선비촌과 연계되어 있는 줄을 모른 채, 처음에는 선비촌을 먼저 방문했는데 저잣거리의 식당들만 보여 실망한 채 다시 소수서원에 와서야 확인된 게 입장료(\3,000)를 지불해야만 연계되어 있는 선비촌까지 관람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나무가 즐비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두 개의 돌기둥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주 숙주사지 당간지주로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당이라고 하는 불화를 그린 깃발을 걸던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던 기둥이라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② 영주 소수서원

글 & 사진 / 정아빠

주 소수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최초의 주자학(성리학)를 도입한 회헌 안향의 학덕을 기리는 곳이며 공자바라기 주자(주희), 주자바라기 안자(안향)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주자학의 중심인 곳을 소개해 봅니다.

※ 주자학(朱子學) ⇒ 12세기에 주자에 의해 역설된 신(新) 유교를 말하며 성리학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함.

진입영역

▶영귀봉(靈龜峰) / 소혼대(消魂臺)

서원 왼편에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의 봉긋한 둔덕을 말하며 영귀봉 뒤편에 작별의 정을 나누는 소혼대가 있다.

▶학자수(學者樹)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 년 된 겉과 속이 모두 붉다 하여 적송이라 부르는 소나무가 즐비하게 서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데,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참선비가 되라는 뜻에서 학자수라 부른다.

▶지도문(志道門) / 경렴정(景濂停)

서원으로 드나드는 정문인 지도문 앞의 잔디 제단이 성생단(省牲壇)으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는 곳이다. 오른쪽의 경렴정은 죽계수를 따라 멋진 경관과 함께 학문을 논하는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고 한다.

공자가 행단(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하여 향교나 서원의 상징이 된 수령 500여 년이 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정문 앞과 경렴정 옆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의 오랜 역사를 상징이라도 하는 듯 위풍당당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도 경이롭다.

강학영역

수서원 강학당(講學堂)은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된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으로 사방으로 툇마루가 둘러 놓여 있고 전청후실(前廳後室)의 특이한 예로서 현판이 걸린 쪽이 건물 앞이라 생각하면 된다.

전청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강당이고, 후실의 방은 이 서원의 원장과 스승이 사용했을 온돌형의 방으로 되어 있으며, 풍기군수 주세붕이 창건 시에 주자(朱子)의 여산 백록동(白鹿洞)서원을 본따 백운동서원이라 했고 후에 소수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으나 지금까지 강당의 앞면에는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강학당 뒤편에 있는 건물은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유숙하던 곳으로 위쪽의 사진이 직방재(直方齋)일신재(日新齋)이고, 아래쪽의 사진이 학구재(學求齋)지락재(至樂齋)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1804년 이 서원의 원장이던 성언근이 지은 "일신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다.

학자는 마땅히 학문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지락재가 맨 아래에 있고, 학문을 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기 때문에 학구재가 그 왼편에 있고, 학문을 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여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기 때문에 일신재가 또 그 옆에 있고,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고서 경(敬)으로 내면을, 의(義)로 외면을 바르게 하기 때문에 직방재가 또 그 왼쪽에 있게 되었으며, 직방재가 된 뒤에는 편안한 집에 넓게 거처하면서 천하에 교화를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강학당이 직방재 앞에 있다고 하였다.

장서각(藏書閣)은 유생들의 숙소인 직방재 왼쪽에 세워진 건물로 오늘날의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을 비롯한 많은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제향영역

수서원의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는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자바라기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묘당 현판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고 서원은 보통 전학후묘(前學後廟)이나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의 형태이고 왕이나 나라의 큰 인물을 모신 곳에만 묘(廟)호를 쓰게 하였다 한다.

이 사당은 매년 음력 3월, 9월에 처음으로 정(丁) 자가 들어가는 날 즉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는데, 제관이 손을 씻기 위한 대야를 올려놓는 관세위(盥洗位)와 불을 밝히는 정료대(庭燎臺)의 모습이고 불을 피웠던 흔적으로 검게 그을린 모습도 보인다.

사당 담장 뒤에 있는 전사청(典祀廳)은 봉향집기(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해 두던 곳이며 춘, 추 제향 때 집사들이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기도 하다.

전사청 오른쪽 옆에 있는 영정각(影幀閣)에는 회헌 안향을 비롯하여 여섯 분의 초상을 봉안한 곳으로 중앙에 회암 주자(晦菴 朱子)와 회헌 안양(晦軒 安珦)의 초상이 나란히 있고, 왼편에 미수 허목(眉叟 許穆)과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의 초상이, 오른쪽에는 신재 주세붕(愼齋 朱世鵬)과 한음 이덕형(漢陰 李徳馨)의 초상이 진열되어 있으며, 안향의 초상화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 제111호로, 주세붕의 초상화는 보물 제7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회화사 연구와 학자 상의 귀중한 자료라 한다.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하고 이를 깊이 연구하며 오로지 주자바라기의 삶을 사신 안향은 "성인의 도는 일상생활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이 효도하고 신하가 충성하고 예(禮)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信)으로 벗을 사귀고 경(敬)으로 자신을 닦고 모든일을 반드시 정성으로 할 따름이다"라는 교훈도 되새겨 보는 시간이지 싶다.

서원 외부영역

수서원의 영정각 오른쪽 옆의 문을 나가면 소수서원의 사료관 옆으로 이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의 주거지인 고직사(庫直舍) 건물이 옛스러움을 뽐내며 서 있고, 사료관 옆의 문을 나서면 충효교육관 그 문을 나서면 소수박물관으로 선비촌으로 연결되는 공원형 광장이 들어온다.

충효관 문으로 들어서지 않고 서원 쪽으로 오르면 학구재와 지락재 사이의 코너의 문으로 출입했을 듯한 탁청지(濯淸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임진왜란 전후로 겸암(謙菴) 류운용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이며 훗날 창석 이준이 군수로 부임하여 다시 판 기록이 전해온다고 한다.

신재 주세붕이 직접 백운동(白雲洞)과 경(敬)이라는 글자를 새긴 경(敬) 자바위와 취한대(翠寒臺)의 모습이다. "취한(翠寒)"은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죽계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 하여 옛 송취한계(松翠限溪)에서 한 자씩 가져와 퇴계 이황이 지었다고 한다.

선비촌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

선비촌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선비 상의 모습이다. 저잣거리만 보여서 소수서원 입구로 이동했지만 여기서도 매표가 가능하기에 에둘러 서원 쪽으로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서원과 왕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2020.4.29 정아빠의 건강한 라이프에서 퍼옴, 정아빤님께 감사드립니다. 공부 많이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