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때 풍기군 생고개면(生古介面) 생현리( 峴里)
‘안정’은 풍기 별칭에서, ‘생현’은 생고개에서 유래
봉우골 전경 |
황새목 |
백분마을 |
안정면 봉우골 가는 길
안정면사무소에서 풍기방향으로 2km쯤 가다보면 SK주유소가 보이고, 500m가량 더 가면 「내고향 봉우골 생현1리」 표석이 나온다. 표석에서 서쪽방향 봉수산 골짝에 자리 잡은 마을이 봉우골이다. 봉우골 북편 100m 지점에 황새목이 있고, 황새목에서 풍기 IC방향 700m 지점 우측 들 가운데 백분마을이 있다. 지난 19일 생현1리에 갔다. 이날 황새목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김천규 이장, 남중길 노인회장, 우갑녀 부녀회장, 김창화 노인회총무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생고개(生古介) |
생현1리 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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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봉우골
생현리 지역은 본래 풍기에 속한 주변 마을이었다. 풍기는 삼국시대 때 신라의 군사기지(軍事基地) 기목진(基木鎭)이었는데 삼국통일 후 행정구역으로 바뀌었다.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초 1413년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기천현(基川縣)이라 부르다가 1450년 풍기군(풍基郡)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생고개면(生古介面) 생현리( 峴里)가 되어 역사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조선말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생고개면이 생현면(生峴面)으로 바뀌면서 생현면 생현동(生峴洞)이 됐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풍기군, 순흥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풍기군의 동촌면, 용산면, 생현면을 안정면으로 통합했다. 또 생현면의 생현동과 송동(松洞)을 합쳐 생현리라 칭하고 안정면에 편입시켰다. 이 때 영주군 안정면 생현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천규(73) 이장은 “생현1리는 봉우골, 황새목, 백분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며 “봉우골에 13가구, 황새목에 4집, 백분에 9가구, 대로변 5가구, 띄엄띄엄 외딴집 등을 합하면 총 52세대에 118명이 산다”고 말했다.
풍기 별칭에서 따온 안정(安定)
1414년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이향李珦)이 태어나 그 태(胎)를 기천현(풍기) 은풍(예천) 명봉산에 묻었다. 문종은 1421년(세종3)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조선 왕실은 풍기 땅에 문종의 태를 묻은 보상으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 풍기(豊基)라 칭하고 군(郡)으로 승격했다. 당시 풍기는 별칭으로 안정(安定) 또는 영정(永定)이라고도 했는데 ‘안정’이란 별칭이 널리 사용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앞두고 이곳 선비들이 모여 면명(面名)을 논의했다. 이곳은 풍기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풍기의 별칭인 ‘안정(安定)’을 ‘면명으로 하자’고 입을 모았다. 이 보다 앞서 1908년 풍기에 처음 학교가 설립될 때도 교명을 ‘안정보통학교’라고 명명했었다.
생고개면 생현리의 유래
생현이란 지명은 ‘생고개’에서 유래됐다. 조선 때 이곳의 행정구역은 풍기군(豊基郡) 생고개면(生古介面) 생현리( 峴里)였다. 자세히 보니 생고개면의 생(生)자와 생현리의 생( )자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고개가 어디냐?”고 여쭈었더니,
남중길(78) 노인회장은 “생현2리에서 봉암으로 넘어가는 재”라고 말했다. 남 회장이 가르쳐 준대로 생고개를 찾아갔다. 생현2리 효자각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100m쯤 가면 오래된 노거수 회나무가 나온다. 다시 급경사 오르막길을 300m 가량 올라가면 안정면 봉암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가 나타났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없다. 옛 생고개 고갯마루로 추정되는 곳에는 장승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고 소나무 몇 그루만 남아있다. 이 마을 김창화 씨는 “예전에는 순흥, 풍기에서 봉암·대룡산·성곡으로 넘나드는 주 교통로가 생고개였다”며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갯마루에 장승과 주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고 말했다.
조선 중기 무렵 이 지역 선비들이 모여 면의 이름을 지을 때 이 곳의 상징인 ‘생고개’를 면명으로 정하기로 했다. 이 때 ‘생고개’를 이두 표기에 따라 ‘生古介’로 표기하여 ‘생고개면(生古介面)’이라 적었다. 또 ‘생현리’가 된 것은 이 고갯마루에 장승이 있어 장승 생( )자에 고개 현(峴)자를 써 생현리(생峴里)라 칭했다.
앞 망전산봉수 뒤 죽령산봉수 |
지명 유래
마을 앞에 「내고향 봉우골」이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이 표석은 봉우골 김현수(전 이장) 씨가 2010년 세웠다고 한다. 김 전 이장은 “봉우골의 유래를 후세에 전하고, 고향을 떠난 출향인들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향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세웠다”고 말했다.
전국에 ‘봉우골’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있는데 봉수 아랫골짝을 ‘봉우골’이라 부른다. 봉우골 뒷산 제일 높은 봉우리가 조선시대 때 풍기 망전산봉수(望前山烽燧)이다. 망전산봉수는 동으로는 영천군의 성내산(城內山,상망동 갓골뒷산) 봉수에 응하고, 서로는 순흥의 죽령산(竹嶺山.지금 죽령탐방지원센터 앞 군부대자리) 봉수에 응했다. 봉수군(烽燧軍)은 오장 1명과 군인 4명을 합하여 5명씩 번을 섰다고 한다. 옛 봉수제는 1894년 폐지됐고, 일제가 전 국토 측량을 위한 기준표를 설치하면서 봉수시설은 철거됐다고 한다.
김천규 이장은 “지금 망전산봉수터에 가보면 봉수 흔적은 없고, 상수도수원지 시설이 있다”며 “봉우골에는 조선 중기 무렵 의성김씨, 경주김씨가 마을을 개척했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봉우골, 황새목, 백분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 표석에서 풍기방향으로 200m 가량 올라가다가 안정교 다리목에서 좌회전하면 왼쪽방향으로 보이는 산의 형상이 영락없는 황새목이다. 황새목 아래 노인정과 집 몇 채가 있다. 6.25 때 마을 앞에서 국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고 한다. 또 황새목에서 풍기IC 방향으로 700m쯤 가면 백분마을이다.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백분(白粉,흰가루)이 나왔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백분’이라 했다는 설과 부자(富者) 백명이 이 마을에서 나온다 하여 백부리(百富里)라 했다고 한다. 백분마을 최원순(71) 씨는 “예전에 백분마을은 논 가운데 있었는데 지금은 과수원 속에 마을이 있다”며 “벼농사와 사과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말했다.
잇봉우재
풍기·봉현에서 생현·내줄로 넘어가는 재(고개)를 ‘잇봉우재’라고 한다. 예전에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갈 때 잇봉우재를 넘어 죽령으로 갔다고 한다. 풍기는 예로부터 바람이 세다. 겨울철 이 재를 넘으면 죽령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얼마나 센지 옷자락이 날리고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길손은 옷자락에 돌을 싸서 10리길 남원들을 지나 반수산 앞 느티나무 밑에 와서 그 돌을 버리니 이곳에 돌더미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자갈모랭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옛 자갈모랭이는 산림치유원 다스림으로 들어가는 길목 두산 약수터 근처로 짐작된다.
김금희, 김종란, 김현자, 김순임 씨 |
생현1리 사람들 |
생현1리 사람들
조순희(73) 노인회 부회장은 “우리마을 숙원사업인 마을 주변 도로포장공사를 완성하게 되어 참 편리해졌다”며 “경로당 시설 또한 현대식으로 개선되어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우갑녀(70) 부녀회장은 “김천규 이장님과 남중길 노인회장님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하다”며 “마을이 화합과 친교를 바탕으로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늘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는 강순년(64) 총무는 “어르신들께서 늘 ‘내가 먼저’ 솔선수범해 주셔서 마을회관이 늘 화기애애하다”고 말했다. 한 마을에 살면서 갑돌이 갑순이로 혼인했다는 엄옥순(84) 할머니는 “예전에는 아버지들끼리 ‘우리 사돈하세’로 약조하면 혼사가 이루어졌다”며 “구식 결혼식을 하고 가마타고 시집갔다”고 했다.
성삼문의 후손이라는 성갑희(76) 씨는 “고종 형부 소개로 예천하리에서 생현으로 시집왔다”면서 “결혼하고 3일만에 신랑이 군대 가더니 또 월남까지 가서 3년 있다 왔다. 그동안 시부모, 시동생 등 12식구 시집살이를 했다. 예전에 아이 낳고 미역국도 못 먹었지만 1남 4녀 대학까지 공부시켰다”고 말했다. 역시 구식결혼식하고 가마타고 시집왔다는 황옥순(82) 할머니는 “19살 때 봉우골로 시집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며 “봉우골은 아랫집 윗집 옹기종기 다닥다닥 모여 정답게 산다”고 말했다.
김순임(78) 씨는 “예전에는 친정집 마당에서 구식결혼식을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게 대부분이었다”며 “부모들끼리 혼약하거나 중매결혼이 많았다”고 말했다. 자리를 함께한 김금희(74) 씨, 김종란(72) 씨, 김현자(74) 씨는 “물이 흔해 물 귀한 줄 모르고 살았다”며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벼 덕분에 쌀밥 먹고 살게 됐다. 지금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됐다. 이렇게 살다보면 어떤 세상이 올까?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천규 이장 |
남중길 노인회장 |
조순희 노인회부회장 |
김창화 노인회총무 |
우갑녀 부녀회장 |
강순년 노인회여총무 |
엄옥순 할머니 |
황옥순 할머니 |
성갑희 씨 |
최원순 씨 |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