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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밭골 전경 |
달(達), 지혜, 달풀, 뙈기밭, 월전이 달밭골 유래
1890년경 정감록파 정착, 귀틀집 양철집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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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밭골 사람들 |
풍기읍 삼가리 달밭골
풍기읍에서 동양대 앞을 지나 비로사 방향으로 간다. 삼가삼거리에서 우측 방향으로 들어서면 곧 비로사에 이른다. 비로사 앞 삼거리에서 우측방향(소백산등산로) 급경사길 300m를 오르면 달밭골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가 소백산 오지마을 달밭골이다. 해발 750m로 소백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지난해 12월 16일부터 31일까지 5회에 걸쳐 달밭
골에 갔다. 이 기간 동안 유재화 삼가리노인회장, 조종호 이장, 조기용 탐방지원센터팀장, 김진선 나눔터 대표, 박덕양 달뜨는민박 대표의 안내로 달밭골 13가구 사람들을 모두 만나 달밭골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달밭골
의상이 비로사를 창건할 당시 소백산은 고구려의 영토 급벌산군(급伐山郡,옛순흥)에 속해 있었다. 삼국후기 죽령 남쪽(풍기)에 신라의 군영(軍營) 기목진(基木鎭)이 설치됐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기목진은 현(縣)과 같은 행정구역 기능을 갖게 됐다. 이로 인해 소백산 일대가 기목진에 속하게 됐다. 기목진은 고려 때 기주(基州)로 바뀌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 기천현(基川縣)이 됐다가 1450년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1600년) 무렵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달밭골 지역은 풍기군 서부면(西部面) 욱금리(郁錦里)에 속했다가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 풍기군 서부면 상삼가동(上三街洞)에 속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 때 영주군 풍기면 삼가리에 속하게 됐다. 조종호 이장은 “달밭골은 조선 때는 욱금리에 속했고, 조선말 상·하삼가동으로 분리되면서 상삼가동에 속했다가 일제 때 삼가리로 통합됐다”며 “현재 13가구가 띄엄띄엄 사는 달마을”이라고 말했다.
달밭골의 유래
향토사학자들에 의하면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되나, 고고학적 발굴이나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내력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달밭골과 관련된 기록은 1919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지도에 ‘월전동(月田洞)’이라고 기록한 것이 최초다. 1914년 일제가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를 제작할 때 이곳 주민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달밭골’ 지명에 한자어를 붙이니 월전동(月田洞)이 됐다. 1984년 경북교육청이 발간한 지명유래총람에 「달밭골(月田谷)은 달풀이 많아 달밭이라 하고, 비로사가 있어 절골(寺谷)이라고도 한다」고 적었다. 또 1997년 발간된 풍기읍지에 보면 「달밭골은 달풀이 많다 하여 ‘달밭골’이라 했다. 통일신라 때 화랑이 무예를 닦던 곳이다. 고려 때 월전에 사고가 있어 ‘사고터’라고도 한다」고 기록했다. 2010년에 발행된 영주시사에는 「마을이 산 높은 곳에 있어 보름달을 환하게 볼 수 있어 ‘달밭골’이라 부른다. 또 ‘달밭’은 ‘다락밭’이라고도 하는데 산전(山田) 또는 ‘산밭’을 의미한다」고 했다. 2017년 국립공원연구원이 발행한 사고지 관련 연구보고서에 보면 「마을이 산 높은 곳에 있어 보름달을 환하게 볼 수 있어 달밭골이라 부르게 됐다. 생긴 모양이 움푹패인 달 모양이라 하여 달밭골이라 부른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썼다.
‘한국의 지명유래’ 책에 보면 「월전(月田)은 고구려어(語) 달(達,이두표기)에서 유래됐다. 달(達)은 나중에 산(山)으로 변했다가 다시 월(月)이 됐다. 고구려 사람들은 ‘산’을 ‘달’이라 했다. 달을 소리나는대로 적으면 ‘다라’가 되어 다라밭-다락밭-달밭이라 부르다가 월전(月田)이라 썼다. 즉 월전은 높은 산위에 있는 밭이란 뜻이다」라고 했다.
어릴 적 달밭골에 살면서 삼가분교에 다녔다는 장보부(여,55) 씨는 “지금 탐방안내센터에서부터 비로사로 오르는 길 옆이 모두 다락논이었다”며 “산비탈에 움푹패인 달을 닮은 뙈기논밭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달밭골이라 부른다’고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다”고 말했다. 이 마을 전덕성(75) 씨는 “달밭골의 ‘달(月)’은 지혜의 상징이기도 하고, 지혜와 같은 뜻으로 쓰여 왔다”며 “이곳은 정법도량(正法道場)으로 의상조사께서 8년간 수도하셨고, 고려말 나옹스님이 수행하셨으며, 근세에 와서는 일초(一超)스님이 득도(得道)하신 곳이기도 하다. 또 신라의 화랑들이 이곳에서 심신을 수련하던 곳”이라고 말했다. 이상의 문헌기록이나 구전(口傳)으로 볼 때 지명이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에 따라 지명전설이 새롭게 창작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달밭골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비로사와 관련, 의상이 화엄경을 설(說)할 때 수천 명의 승려들이 이곳에 기거했다고 하니 초막 승방(僧房)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화랑도가 무예를 연마할 때는 막사(幕舍)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조선 중기 무렵부터 이곳 사람들이 소백산을 넘어 영춘나루터에 가서 ‘소금을 구해왔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달밭골은 고개를 넘나드는 통행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상업기능 즉 영취락(嶺聚落)이 발달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확인된 바는 없다.
현재 달밭골에 사는 사람들은 정감록예언 신봉파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1890년경 북한 평안도에서 풍기로 이주해온 정감록파 1진 (몇십세대) 중 2-3세대가 달밭골에 살다가 6.25 전 소개령 때 떠나고, (1920년대에 넘어온 2진은 없다) 1945-1950년 사이 평안도에서 이주해 온 제3진(600세대) 중 4-5가구가 풍기 교촌동에 살다가 6.25가 일어나자 달밭골로 피난 왔는데 그 후손 4-5세대가 지금도 살고 있다.
선대가 달밭골에 살았다는 유재화(71) 씨는 “저의 고조부대부터 달밭골에 살다가 일제 말렵 조부대에 풍기 등두들로 이거했다”며 “조부님께서 소백산 넘어 영춘까지 가서 소금을 구해오셨고, 소백산에서 나오는 약재를 모아 대구 약령시장에 내다 팔았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께 들었다”고 말했다.
달밭골에서 태어난 나영선(79) 씨는 “저의 선대(先代)는 원래 평안도에 살았는데 정감록신봉자이셨던 증조부(1870生)님께서 1890년경 풍기땅을 밟은 후 달밭골에 정착하신 걸로 안다”면서 “달밭골에 살다가 제가 9살 때 소개령(1948)으로 삼가동으로 내려와 살게 됐다”고 말했다. 위 사실로 볼 때 1890년경 정감록파 일부가 달밭골에 정착 것이 최초로 보인다. 그 이전 역사는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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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밭골 나눔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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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터 북카페 |
달밭골 나눔터(주막·민박)
달밭골 나눔터는 ‘자유의 종’과 ‘양심계산함’으로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소백산 명소 중 하나다. 기자가 달밭골을 다시 찾은 구랍 28일은 최강추위가 온 날이었다. 이날 나눔터 김진선(57)·양일순(50) 부부는 (통나무) 땔감을 준비하다 기자를 맞았다. 김 씨는 지붕 위 간판 「희망, 꿈 그리고 지혜의 발전소」을 가리키며 “달밭골은 지혜의 터전으로 삼국 때 의상대사, 고려 때 나옹스님 등 선사(禪師)들이 지혜를 얻은 곳이고, 화랑도가 지혜와 꿈을 키우던 곳”이라며 “여기서 소백산의 기(氣)를 얻으신 분들이 다시 와서 ‘지혜발전소 효험이 좋아 다시 왔다’며 1년치 예약을 미리하고 가신다”고 했다. 달밭골 쉼터는 비로봉 하산 첫집이면서 (초암사 출발) 소백산자락길(2009개통) 종착지점으로 탐방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쉼터 방안은 ‘북카페’다. 부인 양일순 씨가 꾸몄는데 ‘지혜발전소’ 다운 특별함을 보여준다. 한겨울에도 달밭골의 주말은 ‘북적북적’한다. 쉼터 벽에 걸린 ‘달밭골 산장’이란 시(시인 김영우) 한수를 소개한다. 「소백산자락길에 쉼터 하나 있으니/오가는 기러기도 찾아들어 쉬어가네/농월정(弄月,달밭골쉼터) 종소리에 시 한편 읊으니 산새도 날아들어 안기네/친구여 오늘 하루 그냥 지나지 말고/오순도순 情 나누며 가는 세월 잡아보세.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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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틀집 원형(최현철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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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틀창고(최현철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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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틀집 뒷간(최현철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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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밭골 양철집(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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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귀틀집 |
외딴 산속 귀틀집
오지마을의 대명사로 불리는 달밭골에서도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노부부가 사는 외딴집이 있다기에 유재화 씨와 그곳을 찾아갔다. 달밭골 표지판에서 U턴하여 동편 비로사 맞은편 산 중턱으로 난 어두컴컴한 비알길을 따라 500m가량 들어가니 나뭇잎을 머리에 가득 인 지붕이 보인다.
동행한 유씨는 “최현철(87)·박복녀(82세) 어르신 내외분이 이곳에서 60년 넘게 사시면서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친절과 미소를 주셨다. 최 어르신께서 지난 여름 돌아가셨고, 할머니께서는 동절기동안 아들집에 가신 걸로 안다”고 했다. 산속 외딴집은 귀틀집(牢獄.뇌옥)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귀틀집이란 산촌사람들이 나무와 흙을 재료로 지은 집으로 통나무를 우물정자(井) 형태로 쌓고 그 사이 틈을 진흙으로 막아 벽체를 이룬 집을 말한다. 며칠 전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부속 건물(창고) 2채도 귀틀형식으로 지어져 있고, 통나무를 얽어맨 뒷간은 위는 용변용 아래는 잿간이다. 지금 세대가 화전민들의 생활사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소중한 체험이다. 유 씨는 “이 집은 SBS를 비롯한 여러 방송사가 방영한 바 있다”며 “이 집은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가옥으로 산간마을 의식주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다음호에 이어짐>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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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호 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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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화 노인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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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현철 어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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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녀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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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용 탐방지원센터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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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선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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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성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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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선 나눔터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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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일순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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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부 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