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변방 숲길에 처연한 이야기 서리서리 묻혀있네
▲ 고갯길은 옛 사람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역사의 실핏줄이다. 고치령 오르는 길에도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다. |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입니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일 뿐입니다. 높은 산은 높아서 웅혼하고 낮은 산은 낮아서 아담할 뿐, 낮아지고 싶다 높아지고 싶다 말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가 자연인 것이지요. ‘생각하는 동물’은 생각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 행동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학습합니다. 그런 축적과 전승의 노하우가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사람은 자연 정복의 역사를 써오고 있습니다. 고갯길이 점차 사라지고 잊혀집니다. 사람의 장거리 이동 수단이 보행에서 차량으로 대체되었고, 어지간한 산은 터널을 뚫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산은 인간의 질주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고갯길은 마을과 마을을 구분 짓던 산마루를 넘어가는 길입니다. 강이 넘지 못하는 산마루를 사람은 넘었습니다. 한 번 열린 길은 오랜 시간 사람과 우마차가 통행하며 많은 이야기를 축적했습니다. 긴 시간 숱한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고갯길을 천천히 걸어 넘습니다. 한 줌 바람으로 뭉쳐 있는 이야기를 더듬으며. 첫 여행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마락리로 넘어가는 고치령(古峙嶺, 770m)과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에서 부석사 서쪽 임곡리로 넘어 오는 마구령(馬驅嶺, 820m)입니다. 태백산의 장중한 줄기가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지점. 양백(兩白)의 기운이 서린 곳입니다.
신라 고구려 치열한 접전의 역사 지명에 남아
고치령 마루 단종과 금성대군 기리는 산령각
방랑시인 김병연 부석사에 회한 담은 시 남겨
신령하고 성스러운 산
직립보행. 꼿꼿이 서서 두 발로 걷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대지를 정복하는 출발점입니다. 그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달라졌습니다. 들과 산을 가리지 않고 이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팔로 자유로이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단산 면사무소에 차를 세워두고 출발할 때는 칼날 같은 바람이 덕다운 자켓의 외피를 뚫고 들어 왔지만, 고치령 정상에 이르니 바람 끝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고치령은 ‘옛 고개’로 불리던 이름의 한자 표기라 합니다. 고대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병사들이 창칼을 겨누고 싸움을 벌이던 전장이었습니다.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이었고, 고개가 비교적 낮은 양백지간의 울창한 숲길은 수시로 전쟁터로 돌변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소지마립간 11년(489) 조에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고 10월에는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과현은 오늘의 영주시와 봉화군이 만나는 진우 지역이고 호산성은 청송입니다. 상망동(上望洞), 하망동(下望洞), 술골(戌谷) 등 영주 지역 땅이름에 변방 시절의 정황을 담은 곳이 여럿 있는 것도 그런 이유라 하겠습니다.
만덕고승성개한적(萬德高勝性皆閑寂)
차산국내지령지성(此山局內至靈至聖)
고치령 마루에 이르니 오른쪽 언덕에 작은 산령각(山靈閣)이 서 있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주변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고 건물도 단정합니다. 중앙 현판에는 푸른 바탕에 흰글씨로 ‘山靈閣’이라 쓰여 있고, 좌우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오른쪽의 만덕고승성개한적은 ‘만덕이 높고 번성하여 모든 사람의 본성이 여유롭고 고요하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왼쪽의 차산국내지령지성은 ‘이 산의 영역이 지극히 신령스럽고 지극히 성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은 원래 사찰의 산신각에서 예불의식 때 쓰는 ‘공양게’입니다. 두 번째 구절은 공양게의 ‘나무차산국내항주대성 산왕대신, 나무시방법계지령지성 산왕대신’ 두 구절을 결합하였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판자로 된 문은 닫혀 있지만,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살며시 문을 여니 좁은 단 위에 흰 수염을 한 산신령 한 분이 호랑이 등을 타고 앉아 계십니다. 전형적인 산신상인데 뒤에는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타고 앉아 있는 산신령이 그려진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두 개의 놋촛대가 서 있고 울긋불긋한 조화가 좌우에 놓여 있으며 왼쪽에는 태극기와 검은 말총갓도 걸려 있습니다. 누군가 프랑스산 와인도 한 병 올려놓았습니다.
오른쪽에는 직사각형의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어린 임금이 처연히 흰말 위에 앉아 있고 그 아래 검은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신하가 약간 허리를 굽혀 임금에게 산나물 바구니를 바치고 있습니다.
어린 임금은 단종(端宗, 1441~1457)이고 신하는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입니다. 숙부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로 유폐되었다가 사사된 단종. 친형인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좌를 찬탈하자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기 위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1397~14 57) 등과 거사를 준비하다 발각되어 무참히 처형된 금성대군.
고치령 산령각의 주인은 단종과 금성대군입니다. 친족의 왕권 찬탈, 그 피비린내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단종과 금성대군의 혼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 산신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니까 순흥으로 유배 와 있던 금성대군이 영월 청령포에 위폐 된 단종의 복위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관련된 밀사들이 은밀히 넘었던 고개가 바로 고치령입니다. 금성대군의 유허지인 금성단에서 청령포까지 고치령을 넘어가면 약 50Km, 대략 120리 길입니다.
살아 두렵고 억울했던 임금과 숙부는 죽어서 정말 산신령이 되었을까?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서 산령각 문을 닫습니다. 고치령 너머 마락리 사람들이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를 모신다니, 두 사람은 적어도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는 시간을 초월해 살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치령에서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문경 출신의 의병장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선생. 동학군 출신인 운강 선생은 1896년 자신의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해 문경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의병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제천·영월·단양 지역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전투 기록 가운데는 순흥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기 위해 고치령을 넘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운강 선생은 학식도 높았지만 병법에도 능해 전술서인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치밀하여 실전에서도 요긴하게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강원도와 충북 지역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며 광무황제로부터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임명받기도 했습니다.
오지 마을에서 부촌으로
길은 역사의 실핏줄입니다. 삼국시대 접경의 긴장과 조선시대 은밀한 거사의 흔적이 새겨져 있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구국열사들의 의병 항쟁 현장이었던 고치령. 고개 아래 마락리는 말도 떨어진다는 이름처럼, 오래 경북의 외딴 섬이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사과와 블루베리 농사로 재미를 보는 부촌입니다. 마락리 다음 마을은 의풍리.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 북동쪽 아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강원도와 경북과 충북이 맞닿는 삼도접경이 바로 이곳입니다.
의풍리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남대리는 다시 영주시 부석면에 속합니다. 소백산 마루 너머에 있는 마락리와 남대리가 경북 영주땅인 것은 의외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양백지간에 비가 내리면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가고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경상도의 물을 한강으로 흐르게 함으로 한양 궁궐의 임금에 대한 충성을 일깨우려는 의도에서 마락리와 남대리가 경북 땅으로 남았다는 속설도 있나 봅니다.
10여 년 전만해도 좁고 팍팍했던 삼도접경의 마을길이 이제는 넓고 말끔하게 포장이 되었습니다. 옹색하던 새마을 가옥들도 대부분 번듯하게 고쳐지었고 민박집과 펜션도 여러 채 들어섰습니다.
남대리 끝에서 시작되는 마구령의 옛 이름은 마군령(馬軍嶺). 삼국시대 접경지이자 전투의 현장이었던 역사가 그 이름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신라의 청송지역까지 치고 내려간 주요 길목이 바로 이 마구령이었다고 합니다. 경사도가 높진 않지만 차량 두 대가 엇갈리기에는 다소 버거운 외길이 울창한 솔숲 사이로 이어집니다.
군마가 넘나들던 고개
마구령을 넘어가면 유명한 부석사가 있습니다. 676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義湘) 스님이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입니다. 가람의 배치에 대한 학술적 배경, 무량수전의 건축사적 의의와 미학,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등등 절 그 자체가 보배라 할 수 있는 부석사. 의상 스님이 이곳에 부석사를 창건한 것도 국경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으려는 국가적 염원과 관련 있습니다.
마구령은 고치령보다 훨씬 가파르지만 포장이 되어 있어 눈길을 헤치고 차들이 가끔 지나갑니다. 한 여름 이 고갯길을 넘으면 맑고 청량한 느낌이 그만이고, 가을철에는 화려한 단풍이 발길을 자주 멈추게 합니다.
마구령에서는 불운의 시인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가족을 떠나 방랑길에 나서기까지 살던 집이 바로 와석리입니다. 지금 와석리에는 그의 묘지가 정비되어 있고 생가도 복원되었으며 김삿갓문학관도 지어져 매년 영월군에서는 김삿갓문학상을 선정해 시상하기도 합니다.
풍진 생애가 저물어 갈 무렵 그는 부석사를 방문합니다. 그러나 고개 넘어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집에는 들르지 않고 남쪽으로 발길을 놓아 멀리 화순 땅을 떠돌다 객사했습니다. 지금 부석사 안양루에 걸려 있는 그의 시는 무상한 인간의 한 생애를 노래하고 있지만, 그 생애가 저무는 것에 대한 회한도 깊게 서려 있습니다.
평생미가답명구(平生未暇踏名區)
백수금등안양루(白首今登安養樓)
강산사화동남열(江山似畵東南列)
천지여평일야부(天地如萍日夜浮)
풍진만사홀홀마(風塵萬事忽忽馬)
우주일신범범부(宇宙一身泛泛鳧)
백년기득간승경(百年幾得看勝景)
세월무정노장부(歲月無情老丈夫)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김병연의 시 ‘부석사’를 떠올리며 마구령을 넘어와 임곡리 초입 두봉교에서 뒤를 돌아 봅니다. 사람보다 오래 그 자리를 지켜 온 겨울 산이 말없이 드러누워 있습니다.
▲ 고치령 표지석. |
▲ 마구령 표지석. |
▲ 고치령 산령각 내부 산신령상 옆에 단종과 금성대군 그림이 걸려 있다. |
▲ 부석사 안양루에는 기병연의 회한이 담긴 시가 걸려 있다. |
▲ 단산면에 있는 금성대군 신단. |
글ㆍ사진=임연태 편집주간 mian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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