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학교 이야기/소백산 이야기

오광철 옹의 십승지 이야기

단산사람 2014. 1. 17. 08:21

 

십승지 찾아 온 오광철 옹(翁)의 이야기

평안도에서 십승지 찾아 삼가동 정착

움집에 송구죽으로 연명하며 6남매 키워

 

풍기읍 삼가리 당골에 살고 있는 오광철 옹(翁)은 “내 이야기는 배고픔을 모르고 전쟁의 공포를 모르고 자유를 모르는 세대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며 말문을 열었다.

풍기는 정감록의 십승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고장으로 손꼽는다. 특히 금계촌은 정감록마을로 이름이 높다. 삼가리 당골은 금계촌보다 더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가장 오지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500년 수령의 수나무가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다. 당골 입구에서 산비탈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집 한 채를 만난다. 이 집이 오광철(80) 옹(翁)이 혼자 살고 있는 집이다.

지난달 23일 당골 돌담집 앞에서 낫으로 마른풀을 베고 있는 오 옹을 만났다.

오 옹은 돌담 안 원두막에 앉아 따사한 햇살을 받으며 70년 전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 옹은 평안북도 희천군 동창면 창동리에 살았다. 그가 12살 되던 해에 해방이 되었고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오 옹의 부친은 월남할 것을 각오하고 3개월에 걸쳐 비밀리에 철저한 준비를 한 후 자유를 찾아 남으로 향한다.

칼바람이 볼을 에는 1945년 12월 어느날 새벽.

오 옹의 가족과 형제자매 4남매 가족, 그리고 사촌들과 이웃까지 33명이나 되는 많은 식구들이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칠흑 같은 밤길을 나섰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옥토와 선조들이 잠들어 있는 고향 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가 있는 따뜻한 남쪽을 향해 밤낮으로 발이 부르트고 지치고 쓰러지며 걸어서 38선까지 왔으나 초병들이 지키는 경계망을 뚫고 38선을 넘을 일이 막막했다.

하지만 38선을 지키는 소련군들도 돈 앞에는 어쩔 수 없이 길을 열어주었다.

서울까지 와서 다시 기차를 타고 정감록에 기록된 풍기에 도착하여 삼가동에 안착했다. 목숨을 갈고 희망의 땅. 꿈의 땅을 찾아 왔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내 땅 한 평 없고 내 몸 하나 누일 수없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불모지의 땅이었다. 산비탈에 움집을 짓고 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해다 숯을 만들어 팔아야 했다.

어머니는 송구(소나무의 속껍질)를 벗겨 돌절구에 찧어서 물을 붓고 멀거니 죽을 끓이면 그거라도 서로 눈치 봐가며 많이 먹으려고 다투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그래도 가족들은 마음만은 편하게 지낼 수 있어 행복했다.

저녁에는 개울가에 모여 멱을 감을 수도 있었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힘들었던 하루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소박한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과 국군이 밤낮을 번갈아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부녀자들은 이들에게밥을 해주고 젊은 남자들은 의용군에 끌려가거나 산속으로 피해 숨어 살았다고 한다.

한번은 어머니가 산속에 숨어있는 아버지에게 광주리에 밥을 담아 갖다 주고 어두운 산길을 내려오다가 자고 있는 인민군 발을 밟았단다.

총을 들이대고 “어디 갔다가 오느냐”고 다그치는 인민군에게 꿀밤(도토리)을 주우러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제 내려온다고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니 당시 그들은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르면서 살았을 것 같다.

다행히 “어두운데 빈 그릇은 두고 내려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으니 다행이지 만약 밥그릇이라도 있었다면 산속에 숨어있는 아버지나 온 마을 전체가 큰 변을 당할 뻔 했던 일도 있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는 왔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굶주림으로 사람들은 지쳐 갔다.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전쟁을 맞아야했고 전쟁이 끝나고 봄이 왔다고 해도 배고픈 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꾸로 매달아도 세월은 간다고 했던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 동안 오광철 청년은 20살이 되던 해 충청도 색시와 결혼하여 올망졸망한 귀여운 6남매를 낳았다.

그토록 어려운 삶을 살았기에 후손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은 더욱 강했을 것이다.

부모님들의 강인한 삶을 보고 자란 자식들 역시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으로 지금은 장성해서 여러 분야에서 성공하여 또 다른 세상을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젠 그 때 함께 월남했던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고 부인도 몇 년 전에 사별하여 혼자 쓸쓸히 살아가고 있다.

‘오 옹 마져 세상을 떠나면 한 많은 삼가동은 역사 속에 묻힐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오 옹과 같은 2세들이 떠나면 그 3세들이 삼가동을 지킬 것이고 그 뒤에는 4세들이 지킬 것이라고 본다.

오지마을 삼가동은 근대화의 바람을 피해왔고 오직 전통을 고집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2013년 삼가동 당골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이곳을 찾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고 하니 삼가동은 제2의 십승지시대를 맞이할 것 같다.

소백의 마지막 보물인 삼가동. 때묻지 않은 보물로 빛나길 바란다.

 

 

 

 

 

 

 

 

 

노병 초청 경로잔치 연 전종갑 씨 미담 훈훈

 

-올해 11번 째 경로연 열어 지역사회 귀감(龜鑑)

지난 26일 6·25참전용사(이하 참전용사)들이 풍기읍 욱금리에 있는 다래숲회관에 모여 오찬을 함께하며 안보결의를 다졌다.

노병 초청 행사를 주관한 분은 전종갑 다래숲 대표이고 풍기읍재향군인회(회장 황기진)가 후원했다. 이날 경로연(敬老宴)에 박태승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장, 지홍균 참전용사풍기지회장을 비롯한 순흥, 단산, 안정, 봉현 등 120여 명의 회원들이 참가하였으며 김종천 도의원, 박남서 시의회의장, 전영탁 시의원, 장윤석 국회의원 부인 유재영 여사, 황계자 여성향군회풍기지회장 등이 내빈으로 동참하여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와 경의의 뜻을 전했다.

지홍균 풍기지회장은 “오늘 참전용사들을 초대해 주신 전종갑 사장님, 풍기향군회 황기진 회장님과 회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한 후 “최근 ‘이석기 내란음모사건’과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 등을 보면서 분통이 터져 할 말을 잊었다”고 하면서 “우리가 앞장서 안보결의를 더욱 굳건히 해야 될 때”라고 말했다.

박태승 중앙회장은 “회원 여러분! 우리들은 전시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나라를 지켜냈다”고 하면서 “그러나 지금 안보상황이 심상찮아 걱정이다”라고 했다. 백 회장은 또 “전시 때 불렀던 각설이타령을 불러보겠다”며 “배는 고파 등을 메고, 방은 추워 한기 든다. 어린자식 우는소리, 일천간장 다 녹는다. 언제나 전쟁 끝나 각각 고향 돌아가서, 옛말하며 살아볼까” 라는 타령을 노래했다.

전영탁 시의원은 전종갑 사장에 대해 “쉽게 말하자면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분”이라고 하면서 “어려운 이웃과 어르신들을 위해 남몰래 봉사하는 미담사례가 많이 있다”고 말했다. 풍기향군회 이인찬 사무장은 “전 사장이 다래숲을 개업한지는 13년째이고 참전용사 초청 경로행사는 올해 11회째”라며 “전 사장의 미담에 감명을 받아 풍기재향군인회가 5년 전부터 후원에 나섰고, 올해는 풍기농협, 안전농협, 소백밴드, 소백지게차 등에서 협찬하여 오신 분들께 타올과 햅쌀을 선물로 드리게 됐다”고 말했다. 풍기여성향군회 황계자 회장과 우순연 회원은 상차림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재능 나눔으로 ‘내 나이가 어때서’ 등 노래를 불러 참전용사들을 즐겁게 했다.

 

-선친 유지(遺志) 받들어 어른공경 이웃돕기에 앞장

노병들을 풍기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온 전종갑 대표를 만났다. 큰 키에 검게 탄 얼굴의 전 대표는 “부친(치규)이 9살 때(1940년경) 조부(병은)를 따라 황해도 서흥군 소사면에서 10승지 중 으뜸인 욱금에 자리잡았다”고 하면서 “부친께서 늘 ‘어른을 공경하라’고 하셨고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고 하셨다”면서 “황해도에서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경우 세상이 모두 잿더미가 되더라도 인간의 씨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이 곳 소백산뿐’이라고 조부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부친이 전했다”고 말했다.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충효예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전종갑 씨를 다시 보니 키가 더 커보였고 가슴은 더 넓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