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송씨 400년 세거지 장수면 ‘호구실’ | ||||||||||||||||||||||||||||||||||||||||||||||||||||||||||||||||||||||||||||||||||||||||||||||||||||||||||||||||||
우리마을탐방[97]장수면 소룡1리(호구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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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松湖)’는 한자 동명, ‘호구실’은 전래 동명 장수면 소룡1리 호구실 가는 길
지난달 21일 호구실에 갔다. 송준식(68) 이장, 송준학(76) 노인회장, 우숙자(67)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호구실의 역사와 야성송씨 세거 내력을 듣고 왔다. 호구실의 역사 그 후 조선 영조(英祖) 대(1720년경)에 이르러 ‘호문송리 며전구방’은 ‘호문송면 며전구동’으로 바뀌었고,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하여 영주군이라 하고, 호문면과 두전면을 합병하여 장수면이라 칭했다. 호구실은 이 때 장수면 소룡1리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구실 지명유래 호구실은 ‘송호(松湖)’란 한자어 동명과 ‘호구실’이란 전래 동명을 가지고 있다. 호구실은 호고재(好古齋)가 있는 호고촌(好古村)을 호고실로 부르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호구실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호고재’란 이 마을 입향조 고송헌(孤松軒, 휘 시옹時雍) 선생의 글방 이름이다. ‘송호’란 한자 지명은 고송헌 선생이 이곳에 은둔할 때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야성송씨세고(冶城宋氏世稿)에 의하면 고송헌 선생이 한적한 서촌에 이사들면서 ‘물은 송호(謂其水曰松湖)요, 집은 고송(謂其軒曰孤松)이다’라고 지은 글귀에서 연유됐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산등성이에서 아홉 가닥의 작은 산줄기가 마을을 향해 뻗어 나와 마치 혹과 같이 생긴 작은 봉우리를 만들어 놓았다. 옛 사람들은 혹이 아홉이라 하여 ‘혹구실’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혹’자의 ‘ㄱ’은 탈락하고 ‘호구실’이 되었다고 한다.
야성송씨 세거 내력 호구실은 야성송씨 400년 세거지다. 송문(宋門)이 처음 이곳에 입촌한 것은 고송헌 시옹(1601-1676, 20세) 선생이 1617년 영천(영주의 옛이름) 휴계(休溪, 현 휴천) 본가(광승)에서 분가하여 새 살림을 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때는 야성송씨 영주 입향조인 눌재(訥齋, 1454-1524, 휘 석충碩忠) 선생이 1498년 영주 광승에 터를 잡은지 119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고송헌은 15세에 장가들고 17세에 이곳 호구실로 이사했다. 이곳을 찾게 된 동기는 당시 이 지역은 의산서원(장수면 갈산리)을 중심으로 많은 유생들이 모여들어 학구열이 대단했던 터라 강력한 문풍(文風)을 일으키기 위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송헌이 1617년에 호구실에 들어왔으니 지금으로부터 399년 전의 일이다. 호구실 고송헌공파(孤松軒公派)는 400년간 이곳에서 세거해 오면서 200세대 가까운 후손으로 불어났으며 그 전성기는 20세기 초엽이었다. 문사에 열중한 고송헌
송고정(松皐亭) 마을 서쪽 산기슭에 ‘송고정’이란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송 청송공(宋 聽松公, 휘 위익渭翼)이 1918년 아버지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로, 부친의 호(號)를 따 ‘송고정’이란 편액을 걸었다. 부친 송고공은 효행이 지극정성이어서 하늘이 감동한 기적이 여러 번 일어나 경향각지에서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또한 효행 못지않게 학문정진에도 힘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던 조부도 6일 후 세상을 떠나니 며칠 사이에 부와 조부를 모두 잃은 청송공은 그 때 나이가 26세였다. 그는 이 모든 불운은 빈궁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가산을 늘리고 부조(父祖)를 추모하는 예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혼백이나마 쾌적한 거처에서 편히 쉬게 하려고 송고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종나무 이야기 이종(二種)나무란 두 종류의 나무란 뜻이다. 동네 어귀에 두어마지기 가량 되는 논배미 가운데 큰 나무무더기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무더기를 ‘이종나무’라 하고 이 논배미를 ‘이종나무배미’라고 한다. 이종나무의 수종은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떡버들)이다. 신기한 것은 400년전 고송헌 선생이 입촌할 당시에도 이 모습으로 서 있어서 타고 다니던 말을 매던 나무라고 하는데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호구실 노인회관 호구실 마을 첫머리에 있는 빨간 벽돌집이 노인회관이다. 마을의 대소사를 이곳에서 논의하는 등 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송창익(69) 노인회총무는 “이 노인회관은 2004년 신축한 현대식 건물로 마을회관 겸 노인회관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주방시설과 각각의 방이 있어 독거노인 공동주거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숙자 부녀회장은 “현재 마을에는 60대 이상만 살고 있는 고령 장수마을”이라며 “이 경로당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서로서로를 챙기고 돌보는 소중한 장소”라고 했다. 이 마을 정사순(76)씨는 “야성송씨 문중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효도와 예절이 남다른 마을”이라며 “훌륭한 선조에 대한 충효 이야기와 송고정 효행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호구실 사람들 송준식 이장의 주선으로 마을사람들이 회관에 한방 가득 모였다. 송 이장은 “우리마을은 야성송씨 집성촌으로 타성 없이 오랜 세월 살아왔다”며 “1960년대에는 50여 가구에 500여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도시로 많이 떠나고 지금은 20가구에 40명이 산다”고 했다. 김주희(88), 조기숙(87), 김분순(86) 할머니는 “일제 때 처녀공출에 떠밀려 열 예닐곱살 때 호구실로 시집와서 70여 년간 살았다”며 “호롱불 켜고 살던 옛적에는 집집마다 열 식구 넘게 살았고, 보리밥, 조밥 안 가리고 오직 먹고 살기위해 죽도록 일만 했다”고 말했다. 이 마을 원로 송준태(83, 전 서울군자초 교장) 선생은 까까머리 17살에 고향을 떠났다가 흰머리 성성한 일흔일곱에 귀향해 그동안 취미로 가꾸던 국화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널리 인정을 베풀면서 여생을 즐기고 있다. 송준학(76) 노인회장은 달방방구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을 뒷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한길 남짓한 한 쌍의 바위가 마이산(馬耳山)처럼 솟아있다. 정월대보름날 밤에 동네 청년들과 아이들이 여기에 모여 달집태우기를 하고 소원을 빌었다. 그 때는 사람들이 많아 망우리 함성이 대단했었다”고 말했다. 송준섭 새마을지도자는 황새바위를 가리키며 “동네를 둘러싼 산등성에서 아홉 가닥의 산줄기가 나와 마치 혹과 같은 봉우리를 만들었다. 네 번째 줄기 끝자락에 높이 15m, 폭 5-6m 가량되는 큰 바위가 서너개 모여 있는데 이 바위를 ‘황새바위’라고 한다. 옛적에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고 말했다. <장수면 소룡1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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