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마을 ‘한절마’ | ||||||||||||||||||||||||||||||||||||||||||||||||||||||||||||||||||||||||||||||||||||||||||||||||||||||||||||||||||
우리마을탐방[95]가흥1동 한절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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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삼국·조선 시대 역사의 보고 가흥1동 한절마의 입지 이곳 사람들에게 “한절마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강변2차 아파트 북쪽에 있는 단독주택 마을”이라고 알려준다. 옛 한절마는 영주2동 대순진리회관 뒤 언덕에 있는 서귀대(西龜臺)에서부터 구수산(龜首山)자락을 따라 영주2동사무소, 세무서, 공공도서관, 현 삼판서고택 앞 서천, 청도김씨 종택, 강변2차 아파트, 영주교육청,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곳까지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한절마에는 청동기시대 암각화를 비롯하여 시대별 유적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청도김씨, 예안김씨, 안동권씨가 세거한 역사의 보고이다.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한절마에 가서 김창수 청도김씨 종손, 권상목 안동권씨 11대 주손, 김제만 예안김씨 대종회장, 김창룡 전 동부초 교장,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 한절마의 역사와 유래를 알아봤다.
역사 기록으로 본 한절마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가흥리에 속했다가 1980년 영주시 승격으로 가흥1동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절마의 지명 유래
그러면 ‘큰 절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곳에서 나고 자란 김창룡 전(동부초) 교장은 “영주2동사무소 건축 당시 5층 석탑과 좌대 등이 발견된 것으로 봐서 서귀대 인근 지역이 큰 절터 자리가 확실하다”며 “취사선생이 쓴 최초의 영주지에도 ‘귀학정이 바로 큰 절터’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당시 출토된 5층석탑은 공공도서관 정원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한절마는 청도김씨 집성촌
그가 호를 병산이라 한 것은 을사사화(1545)에 연루되어 단산면 병산에 있는 장인(금원정의 처가)의 별서(別墅)에 은거하면서 퇴계와 왕래한 인연으로 병산이란 호를 얻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김창수(78) 종손은 청도김씨 영주 입향에 대해 “병산선조의 손자 효선(孝先, 출생 1568년)선조께서 어릴 적 아버지 호변(虎變)선조와 진외가(당시 순흥 병산)를 왕래하면서 이곳을 마음에 두었다가, 1586년 장가 들어 살림을 날 때 영천 한절마에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 된다”고 말했다. 김 종손은 “선조께서 이곳에 터를 잡아 세거한지 430여년으로 보고 있다”며 “1960년대에는 100여호가 타성 없이 한마을에 살았으며, 지금도 25호 정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서귀대(西龜臺)와 귀학정
지난 2일 김제만 예안김씨 대종회장과 서귀대에 올라 한절마의 유래와 귀학정(龜鶴亭)의 내력을 알아봤다. 김 회장은 “아주 옛날(신라-고려) 서귀대 아래 큰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며 “천년 세월이 흐르면서 절은 없어지고 조선 때 백암(柏巖) 김륵, 1540-1616)선조께서 이곳에 ‘귀학정’을 지었고 후손들이 400여년 세거해 왔다”고 말했다. 백암은 삼판서고택 세 번째 주인인 문절공 김담의 현손이다. 아마도 백암은 삼판서고택(동귀대)이 바라보이는 이곳(서귀대)에 귀학정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암은 영천군 백암리(栢巖里, 지금의 문단)에서 출생하여 1567년(선조9) 3월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영남안집사로 의병을 모아 영남을 지켰고, 안동대도호부사를 역임했다. 백암선생약전에 의하면 귀학정 건축년도가 1558년으로 나와 있다. 백암이 16세 때(1556년) 인동장씨와 혼인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살림집을 마련하고 귀학정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귀학정은 도시화에 밀려 1988년 봉화읍 문단리(사암)로 이건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예안김씨가 한절마에 세거한 해수는 460여년으로 볼 수 있다. 김제만 회장은 “예안김씨가 한절마에서 집성촌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400년동안 14명의 종손과 12명의 종부에 의해 종가가 꾸려져왔고, 종손의 친척 4-5가구가 종택과 함께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안동권씨’의 고향
안동권씨 검교공파 권상목(89) 11대 주손은 “한절마의 주인은 청도김씨다. 우리 안동권씨는 두서(뒤새)에서 한절마로 이거하여 200여년 세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권 주손은 “우리가 살던 중간마는 영주대수해 후 직강공사로 고향이 강물 속에 묻혔다”며 “내가 9세 때 참봉 벼슬을 한 증조부(權泰洵)님께 천자문을 배웠고, 상당히 큰 골기와집에 살았다”고 말했다. 당시 안동권씨는 집성촌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15세대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절마 사람들
김제만 대종회장은 “귀학정파 인물 중에서 12분의 문과급제자와 40여명의 사마합격자를 배출했다”며 “근세의 선비로 서주 김사진(1878-1954)선조는 백암 선생의 12세손으로 귀성리에서 태어나 오직 학문 탐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칭송받았다”고 말했다. 서귀대 아래에 살고 있는 홍기수(55)씨는 “70년대 초까지 토담집이 많은 마을이었다”며 “한절마 지역은 직강공사 때 바닥의 흙을 파 둑을 쌓느라 웅덩이가 많이 생기더니 나중에는 보트장이 생겼고, 그 위에 아파트(강변2차)를 지었다”고 했다. 한절마 경로당은 교육청 인근에 있다. 현대식 건물에 최신 시설이 잘 갖춰져 어르신들의 공동주거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권영옥(89) 할머니는 “옛 한절마의 모습은 산 밑에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앞에는 논이 많았다”고 했다. 김윤동(90) 할머니는 “수해 때 논이 못으로 변했고, 못이 유원지가 되어 보트를 타다가 못 위에 아파트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하분(80) 할머니는 “지금은 아파트가 많고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서천의 풍광이 아름다운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했다. 윤옥란(79) 할머니는 “한절마에는 청도김씨, 선성김씨, 안동권씨가 살았는데 수해 후 많이 떠나고 지금은 옛 마을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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