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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96] 휴천2동 ‘지천(至天)’

단산사람 2016. 3. 28. 21:55
우리마을탐방[96]송림 우거진 전통마을에서 현대도시로 급변한 ‘지천(至天)’
휴천2동 지천마을
[559호] 2016년 03월 02일 (수) 16:56:27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 지천마을 전경

지천(至天)은 고려말 하륜 군수가 지은 이름
아름드리 송림이 울창했던 의성김씨 세거지

휴천2동 지천마을의 입지
지천(至天)마을은 시내 남쪽을 감싸고 있는 남산 송림(松林)속에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영주시청 정문 우측에 있는 통합영주시기념비 뒤편에 보면 ‘지천애향(至天愛鄕)’이라고 크게 새겨져진 비석이 있다. 이는 영주시청이 지천땅에 세워졌다는 증표다. 지천은 코레일 경북본부에서부터 영주시청, 보건소, 남부초, 옛 연초제조창, 경북전문대에 이르는 지역에 있던 마을이다. 지금도 지천 본 마을이 조금 남아 있다. 남부초 교문 골목으로 들어가면 송림맨션이 있는데 그 뒤쪽에 있는 30여 채의 단독주택이 지천 본 마을이다.

지난 13-14일 지천마을에 가서 김교명(93) 의성김씨 종손, 황상국(68) 창원황씨 종중, 금석옥(81) 옛 새마을부녀회장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근대사 이야기를 들었다.

  
▲ 지천애향 표석

역사 속의 지천

영주지(榮州誌)에 보면 조선 때 「영천군(영주의 옛 이름) 읍내 지역에는 봉향리, 망궐리, 가흥리, 산이리 등 4개리가 있고, 봉향리에는 망동방, 성저방, 광승방, 원당방, 지천방 등 9개방이 있다」라고 했다. 지천은 조선 태종 때 봉향리(奉香里) 지천방(至天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이후에는 봉향면(奉香面) 지천동(至天洞)으로 개칭됐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휴천리에 속했다가 1980년 영주시로 승격하면서 영주시 휴천동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지천마을은 현재는 휴천2동 6통에 속해 있다.

지천의 지명유래
고려 공민왕 때(1371) 영주군수(당시 知榮州事)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철탄산에서 이곳 지형을 내려다보면서 “남쪽 끝이 너무 낮아 재앙이 많고 인물이 귀하구나!”라고 했다.

하륜은 이에 대한 방책으로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을 ‘이를 지(至)’자에 ‘하늘 천(天)’자를 써 ‘지천(至天)’이라 했다. ‘지천’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다’라는 뜻이다. 지천이란 지명이 645년 전 고려말 하륜 군수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하니 시청에 있는 ‘지천애향’ 표석이 더욱 높아 보인다. 또 지천(현대아파트)에서 한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별달고개(星月峴)’라 하고 전문대 뒷산을 막등산(莫登山)이라 한다. 하륜의 뜻에 따라 ‘높은고개’ ‘오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산’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지금은 ‘별달고개’는 ‘비달고개’라 하고 ‘막등산’은 ‘말동산’이라 부른다.

서천의 물길과 휴천
아주 옛날(신라-고려) 서천의 물길은 구성산 북쪽 불바우에서 동쪽으로 흘러 광승 앞을 굽어 돌아 지천으로 흘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불바우에서 뒤새(杜西, 서천교)까지 제방을 쌓아 물길이 구성산 서쪽 동귀대와 서귀대 사이로 흐르게 했다. 그 물길은 남산들을 유유히 흘러 지천마을 앞을 지나 경북전문대 서편으로 흘렀다. (지금은 직강공사로 지천으로 흐르지 않음)

옛 선비들은 지천 앞을 흐르는 서천의 물이 자주 말라붙어 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아 내(川)가 쉬어 흐른다고 하여 휴계(休溪)라 불렀다. 현재 쓰고 있는 휴천(休川)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휴천리’라는 행정구역을 만들면서 생겼다.

  
▲ 의성김씨 종택

당시 일제는 지천(至天)이라는 지명이 있었지만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휴천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한 것이다. 지천(至天)을 지천(之川) 또는 지천(芝川)으로도 쓰이는데 본래는 지천(至天)이다.

의성김씨 집성촌 지천
지천 본 마을은 대형아파트에 가려 옛 마을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다행히 의성김씨 종택이 자리를 보존하고 있어 의성김씨 집성촌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4일 오전 의성김씨 종택에서 김교명(93) 종손과 이원회(93) 종부로부터 의성김씨 세거 내력에 대해 들었다. 김 종손은 족보와 각종 역사서를 펴 놓고 입향 내력을 설명했다.

  
▲ 지천동네 골목길

영주의 의성김씨는 평장사공파로, 조선 중종 무렵 풍기훈도를 지낸 영균(永鈞, 1474-1548)이 예안 둠버리에서 영주로 옮겨 자리 잡음으로써 비롯됐다.

영균의 손자 응세(應世 1523-1590)의 아들 대에서 맏은 둠버리 종가로 출계하고, 둘째 부(溥)는 장수화기에, 넷째 엄(엄, 1563-1641)은 염곡(평은 양지암)에 터를 잡았다. 엄의 5대손 광호(光鎬)가 1750년 내성천이 범람하자 위쪽 달내(이산면 신천리)로 옮겼다가 1755년 지천에 터를 잡음으로써 지천 입향조가 됐고, 나중에 ‘지천파’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그 후 약 300여년간 집성촌을 이루어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김교명 종손은 “1960-70년대에는 60여호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고 말했다. 이 마을 황상국(68, 창원황씨, 전 통장)씨는 “지천의 역사는 500여 년 전 창원황씨 서승공파(署承公派) 일족이 세거하다가 떠나고, 300여 년 전 의성김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최근까지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직(金直)의 어사화(御賜花)
의성김씨 후손들은 지천에 대한 애향심이 강하고 훌륭한 선조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김직은 지천 입향조 광호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1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내고 물러나 임천(林川)에 숨어 살면서 학문에 정진한 영주의 또 한분의 선비다.

김직은 문과 병과에 24인으로 급제하여 임금님으로부터 홍패와 어사화, 술을 하사받고,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사흘동안 마을을 유가(遊街)했다. 이 어사화는 문중에서 보관하다가 소수박물관에 기탁했다. 종택 앞에 관수당(觀水堂)이란 정자가 있다. 증참판(贈參判) 김우벽(金友璧, 예안김씨)이 이산면 신천리 달내에 건립한 것을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옛 서천이 휘감아 돌아가던 산모롱이(전문대학 교문 우측)에 관수대와 그 위측에는 휴천동마애불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지천대(至天臺)와 구강서원(龜江書院)이 전문대 본관 지척에 있었으나 지금은 표석만 남아 있다.

  
▲ 40년전 새마을 역군

새마을 역군 금석옥

지천노인회 감사를 맡고 있는 금석옥(81, 봉화금씨) 할머니는 의성김씨 며느리로 이 마을에서 60년 넘게 살았다. 역사책도 많이 읽고, 시를 쓰고 서예도 열심이다. 나이 여든(2015)에 문예비전에 등단하여 시인이 됐다. 마을의 역사와 선조들의 내력도 척척박사다. 김직 선조의 어사화 내력도 문헌에서 찾아 기자에게 줬다. 1970년대 금 할머니가 40대일 때 새마을 사업의 선도자로 우수사례를 1975년 경북새마을대회에 나가 발표하기도 하고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새마을사업 추진 능력을 인정받아 휴천2동을 대표하는 동회장을 맡기도 했다.

14일 금 할머니집에서 만난 송응란(88), 권영순(84), 권채연(79) 할머니는 모두 의성김씨 며느리로 40년 전 새마을사업을 같이 했던 역전의 용사들이다.

송응란 할머니는 “당시 금석옥이란 지도자가 있어 양묘, 연탄, 쥐잡기, 구판장 사업을 추진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영주 최초로 한옥마을회관을 짓고 새마을 창고도 지었다”고 했다.

  
▲ 지천경로당 할머니들

지천마을 사람들

13일 오후 기자가 지천경로당에 갔을 때 박찬순(85) 할머니는 손칼국수를 밀고 있었다. ‘참 맛있겠다’고 했더니 “오늘 저녁 함께 먹을 거”라고 했다.

  
▲ 김교명 의성김씨 종손
  
▲ 이원회 의성김씨 종부
  
▲ 황상국 전 통장

 

 

 

 

 

 

잠시 후 좌장이신 이복견(90)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어디서 오셨냐?”고 묻기에 “영주시민신문에서 마을탐방 왔다”고 하니 “참 좋은 일 하신다”며 커피를 한 잔 타 주신다.

  
▲ 이복견 할머니
  
▲ 금동희 할머니
  
▲ 박찬순 할머니

 

 

 

 

 

 

이어서 김원규(86), 이칠규(80), 금동희(89) 할머니와 또 여러분이 오셨다. 대부분 의성김씨 가문으로 시집와서 60-70년을 산 지천 터줏대감들이다. 이복견 할머니는 “50년 전 초가집에서 밀기울죽을 먹고 살았는데 지금 이렇게 잘 살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며 “노인들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니 나라가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 장정숙 할머니
  
▲ 금석옥 옛 새마을부녀회장
  
▲ 이칠규 할머니

 

 

 

 

 

 

 

지천에서 태어나 지금도 지천에 살고 있는 이칠규 할머니는 “예전에 마을 주변이 온통 솔둥천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했었다”며 “연자방아도 있었고 외나무다리도 있었다”고 말했다.

  
▲ 김원규 할머니

장정숙(84) 할머니는 “가마타고 시집오던 날 계속 소나무 숲속을 가길래 산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마당에 내려서 보니 주변이 온통 소나무였다”고 했다. 금동희 할머니는 “의성김씨 집성촌은 어디라도 소나무가 많다”며 “서쪽을 막아야 ‘마을이 평온해지고 인물이 난다’하여 조상님들이 솔둥천을 많이 조성했다”고 말했다. 김원규 할머니는 “이 마을은 땅이 질퍽했다”면서 “땅이 질어 ‘지천’이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