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청백’ 정신을 잇는 양천허씨 집성촌 ‘띄기(茅溪)’ | ||||||||||||||||||||||||||||||||||||||||||||||||||||||||||||||||||||||||||||||||||||||||||||||||
우리마을탐방[93]단산면 사천2리(띄기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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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년동안 양천허씨들만 사는 마을 단산면 띄기마을 가는 길 사천1리 새내마을 앞을 지나 500m 쯤 올라가면 사천2리 바우마을이 나온다. 바우버스승강장에서 좌회전하여 다락논길을 따라 1.5km 쯤 올라가면 야산자락에 깊숙이 감싸인 한적하고 외진마을 띄기를 만나게 된다. 마을의 집들은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어 아랫집 윗집이 정다워 보인다.
이 마을 정향순(58) 부녀회장은 “마을 주변 지형이 소쿠리형”이라고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띄기마을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허정규 노인회장, 허태규 새마을지도자, 허문규 국방시설 대책위원장, 허보규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로부터 마을의 내력과 삼절당 이야기를 듣고 왔다. 역사 속의 띄기마을 ‘띄기’나 ‘모계’라는 지명은 기록에 없다. 바우가 동원면에 속한 것으로 봐서 띄기도 동원면에 속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단산면 사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60여 년 전 양천허씨가 이곳에 터를 잡을 당시는 순흥도호부 인근에 있는 숨겨진 작은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지명은 알 수 없다. 지명 유래
영주시사에는 「약 300년 전 ‘띠가자’라는 늪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았으며, 물이 흘러 개천을 이루었다. 양천허문의 한 선비가 동네 이름을 띠 모(茅)자 모계(茅溪)라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영주의 역사인물 ‘허윤공’편에 보면 「뚜기(豆只:一名 茅溪리) 양천 허(許)씨, 판관(判官)을 지낸 허윤공(許允恭)이 조선 초기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운동을 돕고자 순흥 부근에 지체하다가 ‘뚜기’에 숨어 정착했다」라는 기록에서 뚜기(豆只, 콩 두, 다만 지)라는 지명이 보인다. 현재는 지리원에 ‘띄기’ 또는 ‘모계’로 등록되어 있다. 입향조 허윤공 그가 이곳으로 들어 온 것은 부친인 허방(許邦)과 함께 단종을 모시려고 영월로 갔다가 그 곳에서 “금성대군이 있는 순흥으로 가서 금성대군을 도우라”는 부친의 명을 받고 순흥으로 왔다.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위리안치된 해가 1455년이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해가 1457년이므로 허윤공의 띄기 입향년대는 1457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처가(창원황씨)가 병산이었다는 것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허윤공은 이곳에 머물면서 금성대군을 도와 거사 주획(籌劃, 헤아려 계획)과 격문(檄文, 널리 알리는 글)을 초안하는 등 단종복위 의거에 참여했다.
허정규 노인회장은 “허방 선조와 허지 선조의 묘소는 영월에 있고, 허윤공의 유택은 단산면 구구리에 있다”고 말했다. 허윤공의 부친 허방 1457년 단종이 승하하자 급히 관곽(棺槨)과 염습 도구를 갖추어 엄호장과 시신을 거두어 을지산(乙旨山) 기슭에 땅을 파고 묻었다. 그는 산속에 숨어 삼년상을 마치고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허방의 묘소는 영월 장릉에서 가까운 서진촌에 있다. 허윤공의 아들 허지 그러나 영월로 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의관을 정제하고 단종이 있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후 “내가 지은 글은 모두 불사르고 나를 단종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유언대로 영월의 동쪽 계족산(鷄足山) 기슭에 묻혔다. 삼절당(三節堂)
이 정자는 단종의 절신인 현감 허방과 판관 허윤공, 현감 허지의 삼대 절의(節義)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 허용규(許龍揆)가 건립하였으며, 채산(蔡山) 권상규(權相圭)의 기가 있다. 삼절당 앞에서 만난 김용숙(61)씨는 “삼절당은 양천허씨 선조 삼대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로 마을의 상징이요 자랑”이라고 말했다. 충효청백 정신 ‘가정에서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사회에서는 대대로 청렴하고 결백한 지조를 지킨다’는 뜻이다.
양천허씨 사람들은 선조의 유교를 받들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 장학사업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허태규 지도자는 “우리 마을 허문규 위원장은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돕고, 수십년동안 장학사업을 해 오는 등 선조들이 남긴 충효청백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띄기마을 사람들 허문규(68) 대책위원장은 “양천허씨가 이곳에 정착한지 500년이 넘었는데 선조들이 물려 준 삶의 터전을 내 놓아야 한다니 마음이 아프다”며 “그러나 국방시설이 들어서는 만큼 지역과 국방부가 협의를 잘 해서 원만한 타결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허화규(71) 어르신은 “국가에서 하는 일에 협조해야 한다는 기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적정 보상가로 새로운 농토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허백규 중대장은 “군부대 주둔으로 지역 발전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여러 관계를 헤아려 우리 마을과 우리 지역 발전에 도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흥 태장에서 가마타고 시집 왔다는 조금순(90) 할머니는 “세상이 이렇게 잘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예전에 소로 논 갈고 줄모심고 했는데 지금은 기계로 농사를 지으니 참 살기 좋은 농촌이 됐다”고 말했다. 김희출(77) 할머니는 “예전에는 띄기에 30여 집이 살았고 마을에 초등학생이 50명이나 됐다”면서 “지금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죽고 13호에 20여명이 산다”고 했다.
우숙란(80) 할머니는 “여기는 교통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뒷산이 바람을 막아주어 태풍, 황사가 전혀 없는 살기 좋은 청정마을”이라고 했다.
‘이 마을의 자랑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허정규 노인회장은 “500년동안 타성(他姓)은 하나도 없이 양천허씨만 살아 온 집성촌”이라고 했다. 허태규 지도자는 “띄기는 예로부터 벼농사가 발달했으며, 지금은 축산, 포도, 사과 농사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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