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띄기 마을 허장군

단산사람 2016. 1. 15. 19:55

띄기마을

소재지: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1리 산338번지

 

 허장군 (허윤공 애칭)바위돌 유래

통덕랑 통례원 봉례  증 가선대부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황전(黃躔)1391년(고려공민왕3)~1459년(세조5) 자 형보(亨甫) 의 사위 공주판관(公州判官) 허윤공(許允恭) 1414년(태종14)~미상 자 효응(孝應) 호 남재(南齋)의 아버지는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분연히 벼슬을 그만두고 노구를 이끌고 영월로 달려가 단종을 추종하다가 단종이 승하하자 영월의 산속에 숨어 삼년상을 마치고 또한 그곳에서 일생을  절행(節行) 한 공조참판(工曹叅判) 허방(許邦)1391년(공양왕3)~1459년(세조5) 자 중안(仲安) 호 석헌(石軒)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주오씨 군수 상지의 딸이다.

출생지는 진천(鎭川) 금곡리(金谷里)에서 태어났다. 비범한 자질에 행실이 도탑고 문장이 뛰어났다

일찍 사마(司馬)에 올라 벼슬이 공주판관(公州判官)에 이르렀다. 

단산 양천허씨 문중의 입향조로 이 또한 단종에 대한 절신 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그가 단산으로 들어온 연유에 대해서는 그의 부친인 방(邦)과 함께 단종이 있는 영월로 갔다가 그곳에서 금성대군이 있는 순흥으로 가서 금성대군을 도와 주라는 부친의 명에 따른 것이라 한다.

정축지변 (丁丑之變) 1457년10월9일 (세조3)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의 단종복위운동(端宗復運動)거사 실패(노비 밀고) 사건 당일 공은 장인 봉례공 황전(黃躔)이 단산면 병산1리 315번지 첨모당 (당시 소산서원) 에서 칭병은거 중에 있어 병문안 인사를 드리고 단종복위운동 거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봉례공 황전((黃躔)께서 사위 허윤공(許允恭)이 거사에 참석하면 큰 화를 당할 것을 예견하고 찿아온 사위에게 칭병으로 너무 무료하니 바둑을 좀 두자고 청하여 의도적으로 몇시간을 지체 하였는데  순흥 거사 장소에서 큰 불기둥이 치솟아 올라 허윤공께서 급히 말을 타고 병산 마을 뒷산 시루봉에 올라 순흥쪽을 바라보니 단종복위 운동 거사가 실패되고 정축지변의 큰 화가 발생되어 허윤공(許允恭)께서 거사 실패에 대한 분노와 화를 삭히지 못해 시루봉 산에 있던  바위돌을 옆구리에 끼고 말(馬)을 따고 달려 내려 오던중 단산면 병산1리 345-3번지 에서 타고 달리던 말(馬) 이 곤두박질 치며 다리가 부러지고 그자리에서 죽어 말(馬 )은 그곳에 자갈돌 무덤으로 묻어 주고 허장군이 가져 갔던 바위돌은 그 자리에 표지석으로 했다.

그후 허윤공(許允恭) 이 별세한 다음 병산1리 동민들은 정축지변으로 희생된 많은 영혼과 허윤공의 충절과 그자리에서 죽은 말(馬)의 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정월 보름날 0시 그 장소 표지석 바위돌과 병산 갈참나무(대한민국 천년기념물 제285호)에 동제를 지내다가 2013년에 갈참나무와 떨어져 있어 동제사 지내기가 불편하여 병산마을 동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바위돌을 갈참나무(단산면 병산리 산 338)옆으로 옮겨서 계속 동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와같이 그가 단산으로 들어 온것 또한 단종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사실로 짐작이 된다.

당시 처가이던 단산에 은둔처를 마련하여 평생 단종에 대한 흠모와 절행을 하였다.

공의 아들 허지(許智)1434년(세종17)~미상 자 감옹(鑑翁)또한 보령현감(保寧縣監)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영월을 향해 오던 도중에 병사 함으로써 가히 3대에 걸쳐 단종에 대한 지고한 절의를 보여준 가문으로 전해진다.

관계 유물로는 허방(許邦) 허윤공(許允恭) 허지(許智) 3대의 시와 행적을 모아 엮은 "삼절당실기"가 있다.

또한 그 3대의 절의(節義)를 추모하여 지은 삼절당(三節堂)이 단산면 사천2리(띠기)에 있으며 보계당(保繼堂)이 부석면 보계리에 있다.

단종충의록(端宗忠義錄)에 그의 사적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