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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52]장수면 호문2리(토계마을)

단산사람 2015. 8. 26. 18:46
임금님도 감탄한 효자가 살던 마을 호문2리(토계)
우리마을탐방[52]장수면 호문2리(토계마을)
[514호] 2015년 03월 26일 (목) 14:34:31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 토계마을 전경

양주송씨 세거(世居) 500년 집성촌
서울대 부총장 외 박사 10여명 배출

장수면 호문2리(토계) 가는 길

     
▲ 토계마을 표석

영주시내에서 가흥교를 건너 예천방향으로 가다가 두전교차로에서 내려 장수면 소재지 방향으로 간다. 반구교를 건너 옥계천 도로를 따라 1.5km 쯤 내려가면 도로 좌측에 ‘호문2리 토계’ 라고 새긴 표석이 보이고 버스승강장도 있다. 마을길로 들어서니 ‘송윤락의 자 송동욱 2014 기술고시 최종합격’이란 현수막이 손님을 맞이한다.

경북선철도가 마을 앞을 가로막아 성문을 통과하듯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초입에서 송규상(79) 어르신을 만나 ‘입향시조유허비’의 내력과 수령 500년 된 동수목(느티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이 마을이 양주송씨가 500년동안 세거(世居)해 온 집성촌 토계마을이다.

꽃샘추위도 끝난 지난 16일 토계마을에 가서 송문락 이장, 송희상 노인회장, 송영엽 부녀회장, 송흥락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의 역사와 토계의 내력을 듣고 왔다.

마을의 역사
조선 태종 13년(1414) 지방행정조직이 대폭 개편될 때 토계마을은 영천군 호문송면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호문송면은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25년 취사 이여빈이 쓴 군지와 1646년 학사 김응조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군지에는 방(坊)과 리(里)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토계는 영천군 서면 호문송리에 속했다.

호문송리(好文松里)의 속방(屬坊)에는 웅곡방(熊谷坊, 곰실), 배탄방(盃呑, 보통골), 소룡산방(小龍山), 토계방(兎溪), 화기방(花岐)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옛집

여기에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지금 마을의 모든 기록에는 토할 토(吐)자 토계(吐溪)로 기록되어 있으나 1600년대 편찬된 영주지나 읍지에는 토끼 토(兎)자 토계(兎溪)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토끼 토(兎)자가 토할 토(吐)자로 언제, 왜 바뀌게 되었는지가 의문이다. 마을 어르신들과 출향인들과도 의견을 나누어 보았지만 시원한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기자가 여러 마을을 탐방하면서 일제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전통의 맥을 끊기 위해 마을 이름을 강제로 바꾼 사례(胎藏→台庄, 鑑谷→甘谷, 甁山→屛山, 花釜→花甘)를 확인했다. 그래서 토계 또한 일제에 의해 兎溪가 吐溪로 창지개명 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본다.

  
▲ 큰우물

토계의 지명유래

토계마을 지명에 대한 기록들이 각기 다르다. 영주시사에는 「양주송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당시 마을 앞 들이 비옥하다고 해서 옥계평(沃溪平)이라고 불린 이름을 따서 옥계라고 부르다가 옥계천을 흐르는 물길이 마을 앞을 휘돌아 넓은 들을 이루었다고 하여 토계(吐溪)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수면의 역사 기록서에는 「양주송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그 당시 토지가 너무 비옥하다고 해서 옥계평이라고 부르다가 송덕림이란 선비가 마을 앞 들이 수해가 잦기 때문에 토계평(吐溪平)이라고 고쳐 부르다가 평(平) 자를 빼고 토계(吐溪)라 불러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에 나오는 송덕림(宋德林)이란 선비는 입향조 송규(宋珪)의 아버지다. 또한 완산 류필영(1841~1924)이 지은 ‘모암 송순령묘갈명병서’에는 토계(土溪)로 기록되어 있다.

옛 문헌에 기록된 토끼 토(兎)자나 최근에 기록된 토할 토(吐)자는 둘 다 씨앗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형상이므로 농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비옥한 토계들을 잘 나타내는 글자라고 볼 수 있다. [토(兎), 씨앗이 땅을 뚫고 올라와 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형상이 토끼 토(兎)자 임]

     
▲ 입향선조유허비

양주 송씨 토계 입향

양주 송씨 시조 도성(道成)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 유익(惟翊)의 후예로 조선 개국 초에 장락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도성은 홍건(紅賊)과 왜구(倭寇)의 난을 피해 양주에서 공주로, 예천으로 전전하다 규(珪, 1504-1564) 대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영천 고을 토계동(吐溪洞)이다.

규는 1551년에 입향한 후 마을을 개척하고 교육에 진력하여 가세를 번창시켰으며, 본관을 양주(楊州)로 하여 계대(繼代)를 이어오고 있다.

토계를 빛낸 사람들
입향조 송규의 장자 모암(慕庵) 송순령(宋舜齡)은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 선조 때 정탁(鄭琢)·정유길(鄭惟吉) 등이 경연(經筵)에서 천거하여 전연사직장(典涓司直長)에 제수됐다.

서계(西溪) 송동윤(宋東胤)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충청도 도사를 지냈다. 송익겸(1791-1852)은 성균진사, 송복휴(宋復休, 1824-미상)는 덕행과 문명으로, 송봉상은 지리학으로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근세인물로는 독립운동가로 송영호(宋永祜)·송재호(宋在祜)가 있다.

현대에 배출된 인물로는 송종박(77, 영주) 전 영주상공회의소장, 송병락(77, 서울, 경제학박사) 전 서울대부총장, 송우영(66, 포항) 기능명장, 송동춘(59, 서울) 풍전비철(주) 회장, 송재락(58, 서울) 대원전선(주) 전무이사, 송정락(55, 미국, 토목학박사) 미 미시시피주립대 교수, 송동욱(27, 서울, 서울대졸) 2014 기술고시 합격 등 10여명의 박사와 국가적 인재를 배출했다.

  
▲ 모암정

모암(慕庵)과 서계정(西溪亭)

모암은 명종-선조 때의 효자 송순령(1536-1575)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1891년에 건립한 정자로 1934년에 후손 송봉상(宋鳳祥) 등이 뜻을 모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순령은 1564년(명종19) 부친 생원 송규가 연로하여 병석에 눕자 정성을 다해 약을 다렸다. 하지만 병이 차츰 심해지자 왼손가락을 잘라 주혈했으나 효험 없자 그는 하루만에 다시 오른손가락을 잘라 주혈했으나 끝내 부친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선생은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 살이를 했는데 곧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6년을 무덤 곁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이를 들은 선조 임금은 어버이를 섬기는 극진한 정성에 감탄하여 1574년 예조에 명하여 전연사직장을 제수했다.

  
▲ 서계정

서계정은 조선 영조 때 찰방을 지낸 송동윤(1729-1799)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세웠다. 1956년 후손 봉상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동윤은 영조 38년(1762)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영조 49년(1773) 예조정랑에 올라 충청도사에 제수되었으며, 정조13년(1789) 삼례찰방에 올랐다.

  
▲ 동수나무

토계마을 사람들

토계마을은 남서쪽만 열리고 삼면은 산으로 둘러쌓인 소쿠리모양의 작은 마을이다. 담도 없이 마당도 없이 아랫집 윗집이 옹기종이 정을 나누며 500년을 살아 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마을을 거닐다 노인회장 집 마당에 섰다. 송희상(77) 회장은 “우리마을은 모두가 노인회원”이라고 하면서 웃었다. 송 회장은 장작을 패다 말고 처마에라도 걸터앉기를 권했다. 부인(기푸실댁)이 차 한 잔 내 주시니 맛이 깊고 정겹다. 서계정에서 만난 송기락(67)씨는 퇴임 후 귀향하여 흙에 산다고 한다. 토계마을의 유래와 출향인 명단도 작성해주어서 깊이 감사했다.

마을 가운데 있는 현대식 경로당은 넓고 깨끗했다. 17일 경로당에서 다시 만난 전수조(87), 윤옥자(85), 김춘희(74), 박찬늠(81), 이진희(88) 할머니는 “반갑다”며 고향 내음 물씬 나는 봄나물로 점심을 함께 했다. 이날도 송영엽(59) 부녀회장은 나누고 베푸는 일에 앞장섰다.

송문락 이장은 “농촌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1960-70년대에는 70가구가 넘게 살았지만 지금은 17가구에 30여명 남짓 살고 있다”고 하면서 “모암과 서계정이 문화재로 지정 받지 못해 점차 허물어지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송흥락(56) 새마을지도자는 “토계는 벼농사에 주력하고 있으며 밭은 없다”고 하면서 “예전에는 넓은 토계들을 우리마을에서 소유하고 농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⅓ 정도만 마을에서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 이장은 또 “500년 된 동수목에 정월대보름날 동제를 지낸다. 이 때 헌관이 잔을 올리고 소지를 올린 후 막걸리 한 말을 나무에 붓는 게 이 마을 동제의 특징”이라고 했다.

  
▲ 송희상 노인회장
  
▲ 송문락 이장

 

 

 

 

 

 

  
▲ 송흥락 새마을지도자
  
▲ 송영엽 부녀회장

 

 

 

 

 

 

  
▲ 전조수 할머니
  
▲ 이진희 할머니

 

 

 

 

 

 

  
▲ 박찬늠 할머니
  
▲ 윤옥자 할머니

 

 

 

 

 

 

  
▲ 김춘희 할머니
  
▲ 송규상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