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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 순흥면 대장리 (4)

단산사람 2014. 7. 19. 20:38

우리마을 탐방 [4] 천태승지의 마을 순흥면 태장3리
[465호] 2014년 04월 03일 (목) 17:52:35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태장마을 전경

도 사과·복숭아 농사로 억대 부농 이룬 마을
경로효친 계승발전 위해 마을회관 세워

봉현면 오현 회전교차로에서 순흥방향으로 우회전해 동양대학교(잠뱅이재)를 지나 3Km 쯤 가다보면 저절로 길을 멈추게 할 만큼 위용을 갖춘 큰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여기가 태장3리 입구이다. 순흥과 풍기의 중간 지점으로 경계가 된다고 해 ‘지경터’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여기서 소백산 원적봉에서 발원한 홍교천을 따라 500여m 올라가다 보면 물가에 세로로 누운 큰 돌이 있는데 이 돌에는 ‘天台水石(천태수석)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태(胎)와 관련이 있는 돌로 보이지만 자세한 기록은 없다.

태장3리는 지경터와 하태장을 비롯 띄엄띄엄 떨어진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꽃샘추위가 마지막 심술을 부리던 지난달 14일 태장마을 깊숙이 들어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고난과 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 마을의 역사를 설명하는 장사길 씨

▲ 마을 이름의 유래 = 한반도에 인류문화가 존재하면서부터 태실 문화가 있어 왔고 ‘고려 충렬왕의 태를 순흥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태장경(胎藏經)에서 기록하고 있는 태의 의미를 보면 귀인이 되고 못되는 것은 태에 달렸으며 어질거나 어리석게 되거나 성하고 쇠하는 것은 모두 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태·소백산맥이 이어지는 이곳은 예로부터 길지(吉地)라고 알려져 신성시했던 곳이다. 이곳에 태를 묻으면 왕업이 번창하고 왕위가 튼튼해진다고 믿어 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세분의 안태지(安胎地)가 됨으로써 ‘태장(胎臟)’이라 불렀으며 그 덕에 순흥이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문종대왕, 소헌왕후 심씨, 의소세손(영조의 손자) 등의 태(胎)를 여기에 묻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태실 관리에 정성을 다했고 태실을 모시는 것을 긍지로 여겼다. 그러나 1914년 우리의 국권을 찬탈한 일제는 조선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우리의 고유지명까지 바꿔버렸다. 그 때 이 마을의 이름도 창지개명(創地改名)을 당해 태장(胎 아이밸 태, 藏 감출 장)이 태장(台 별이름 태, 庄 엄숙할 장)으로 바뀌게 됐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태실은 파헤쳐져 서삼릉으로 갔다고 하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태장 느티나무

▲ 태장마을 수호신 느티나무 = 태장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600년을 살아왔다. 높이 13m에 둘레 9m 이며 가지 길이는 30m나 된다. 태장 사람들은 정월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이 느티나무와 가장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김수갑(65)씨는 느티나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옛날 이 마을의 한 선비가 마을 어귀에 한 그루 느티나무를 심었다. 사람에 의해 생명을 얻고 보금자리를 마련한 나무는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랐다. 나무가 사람보다 더 큰 키로 자라면서부터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풍년농사를 기원했다. 나무는 잎을 피워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쉬게 했다. 사람들은 긴 세월동안 온갖 잡귀와 잡신을 물리쳐 준 덕에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고 믿고 나무에 감사하며 동제를 지낸다”

   
▲ 터널식 복숭아 농장
       
▲ 홍사대 이장

▲ 억대 부농 이룬 태장마을 사람들 = 태장3리 홍사대(58) 이장이 일하고 있다는 분터골을 찾아갔다. 메주공장 앞을 지나 마을 동쪽 골짜기를 올라 축사 앞에 차를 세워 두고 터널식 복숭아 과수원에 들어서니 봄을 알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홍 이장은 부인(김명순, 56)과 복숭아 가지 휘어잡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홍 이장은 “60-70년대는 이 마을에 100호가 넘게 살았고 학생 수도 15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현재는 어떠냐는 질문에 “지금은 75호에 192명이 살고 있다. 귀농한 가구가 6집이고 경륜장 학생들 30여 명은 왔다가 1년 지나면 가고 또 오곤 한다”고 했다.

이 마을의 주요 생산물은 사과와 복숭아다. 홍 이장은 벼, 사과, 복숭아 등 1만평 정도 농사를 짓는데 수익은 억대가 훨씬 넘는다. 소백산 높은 골짝마다 사과원이 그득한 이 마을에는 홍 이장처럼 억대 수익을 올리는 농가 수가 여럿집 된다고 한다.

 

   
▲ 천태승지 표석

▲ 일제의 역사 왜곡 현장 = 태장마을 중심에 근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천태승지(天台勝地)’라는 표석이 있다. 아마도 왕실의 태를 묻은 빼어난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지역 사학자들은 천태(天台)의 ‘태’자가 일제 창지개명(胎에서 台로)으로 바뀐데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 마을 장사길(73) 원로는 “태장에는 3태와 관련해 3곳에 표석이 있다. 1태는 천태수석이고 2태는 여의암, 3태는 노석대”라고 했다. 그는 또 “저기 보이는 이자산에 태실이 있었는데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파헤쳐가고 그 자리에 쇠말둑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태장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를 통해 왜곡(歪曲)되거나 사라지게 됐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한 향토사학자는 “천태승지(天台勝地, 台자의 왜곡) 표석의 글자가 창지개명 당했다”며 “아깝지만 표석을 폐기하고 台를 胎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 애향심으로 세운 마을회관
   
▲ 암석에 새겨진 글씨는 찾는 김교문 씨
   
▲ 김교문 씨의 한시와 그림
       
▲ 김원락 원로

▲ 애향심으로 세운 마을회관 = 태장마을 중심에 2층 건물 마을회관이 있다. 이 회관은 마을 사람들과 출향인들이 경로효친 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해 2004년 세웠다. 1층은 회관이고 2층은 건강관리실이다. 김교문(74)씨는 “회관을 지을 때 2억원 들었어, 시에서 5천만원 보조해 줬지, 참 고마운 일이야. 나머지 돈은 집집마다 조금씩 내고 나가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내줬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역사와 시문에 박식한 김 씨는 마을의 역사와 바위에 새겨진 글씨에 대해서도 연구를 많이 하고 있으며, 한시를 짓고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이다. 마을 원로 김원락(80)씨는 김씨에 대해 “어려서는 서당에 다녔고 독학으로 한문 공부를 해 한시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린다”고 칭찬했다. 마을에는 일제에 의해 역사 왜곡 흔적이 남아 있으나 왜곡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지역의 사학자들과 뜻있는 분들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주길 기대한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 지경경로당 할머니들

■ 마을 경로당에서의 대화

옛날에는 고생만 하고 살았는데

고난과 감사의 이야기들

태장 느티나무 옆에 지경경로당이 있다. 기자가 이 경로당에 갔을 때 마을 할머니들이 여럿이 모여 따뜻한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콩나물 무침에 두부찌개는 옛 할머니의 손맛 바로 그 맛이었다. 점심상을 물리고 나서 고생스럽게 살았던 옛 이야기들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박미분(80) 할머니는 “고생 중에 제일 큰 고생은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픔이었다”며 “산에 가서 송구를 벗겨와 방망이로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거기다 소금 조금 넣고 송구죽을 쒀서 먹고 살았다”고 했다. 강윤옥(79) 할머니는 “태장에서 태어나 아랫마을 총각과 중매로 만나 여기서만 평생 살았다”면서 “아이 낳고 누에치고 길쌈하면서 살았는데 밤에는 시어머니가 자라고 해야 자는데 그러지를 않아 일하다보면 어느덧 날이 새고 만다”고 회상했다.

김순중(82) 어르신은 “아들은 장작 한 짐 지고 나는 갈비 한 단 이고 풍기장에 가서 팔아 보리쌀이나 좁쌀을 사왔다”면서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한편을 꺼집어 냈다. 이점연(84) 할머니는 “옛날에는 고생만 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너무 살기 좋은 세상이 됐다”며 “나라에서 기름주지, 쌀주지 아프면 약주지 또 돈까지(노령연금) 줘서 이렇게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밥 지어먹으면서 잘 살고 있다. 나라가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