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문화유산보존회

문수면 만방1리 반남박씨(박소사) 열부각

단산사람 2014. 7. 17. 12:58

아씨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다.
                        " 민조현(閔 祚顯)의 처 반남박씨 열부각 " 이야기
                              경북 영주시 문수면 만방리 

  조선조 순조 때에 경상북도 영천에 살고 있는 민조현의 부인 박소사를 열부로 정려하고 그녀의 종 만복을 충노각(忠奴閣)에 정려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열부를 정려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충노각을 세우는 일은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충노각은 충직한 종을 위한 집이라는 뜻이어서 지금 생각하면 씁쓸한 일이지만 사건을 자세히 분석하면 그가 주인을 열렬히 사랑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사건도 실제사건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만석(萬石)은 영천의 유명한 양반 박사건(朴師騫)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총각이었다. 그는 윤질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해에 부모를 잃고 거렁뱅이가 되어 떠돌았다. 어느 눈 오는 날 그는 영천에 이르러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대갓집 문 앞에 쓰러졌다. 그가 깨어나 보니 따듯한 방이었고 풍채가 좋은 양반이 땀을 뻘뻘 흘리며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댕기머리의 어린 소녀는 베수건을 물에 묻혀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정신이 들었으니 미음이라도 먹여라.”
  양반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12, 3세 된 어린 딸이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간 뒤에 죽을 끓여 왔다. 만석은 죽을 떠먹을 기운조차 없었다. 다행이 어린 소녀가 그의 입에 죽을 떠 넣어 주었다. 만석은 박사건과 박씨의 어린 딸에 의해 목숨을 구원받았다. 그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건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기 시작했다. 박사건은 반남 박씨로 왕비와 재상들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조정이 어지럽자 영천에 낙향하여 조용히 살고 있었다. 박씨의 딸은 집안에서 애기로 불렸다. 박애기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나 박사건은 박애기에게 언문밖에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애기에게 길쌈을 하고 바느질을 하는 것을 가르쳤다.
  박애기는 자라면서 자색이 출중해졌다. 얼굴은 만월처럼 피어오르고 살결은 옥으로 빚은 듯이 깨끗했다.
  ‘아아 우리 아가씨는 선녀처럼 아름답구나.’
  만석은 박애기를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설레었다. 박애기도 만석을 친동기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박애기는 17세가 되자 아름다움이 더욱 고결해졌다. 매파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더니 여흥 민씨 일문과 가약을 맺게 되었다. 신랑은 민조현(閔祚顯)이었다.
  ‘신랑은 병이 있다고 하던데 우리 아가씨를 청상과부를 만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
  만석은 민조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만석은 혼인날이 가까워지자 더욱 근심이 되었다. 만석은 달덩이처럼 아름다운 애기가 시집을 가게 되자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 속에 품어온 연정을 고백할 시간도 없이 그녀가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만석은 달을 보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나 동네가 떠들썩한 잔치였다. 혼인날이 되자 신랑 일행이 들이닥쳤다. 박씨 일가는 그들을 정성스럽게 맞아들여 혼례를 치렀다. 박애기는 혼례를 치르고 초야를 마쳤다. 혼례를 치른 지 사흘째가 되던 날 신랑이 갑자기 급사했다. 신부 집은 발칵 뒤집혔다. 혼례를 치른 지 사흘째가 되는 날은 신랑 집으로 신행을 가는 날이었다. 신부 집에서 신행을 위해 술과 안주와 떡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이없는 참변을 당하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애기는 혼례를 올린 지 사흘 만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새색시로 화사한 옷을 입고 있어야할 신부가 소복을 입게 되었다.
  시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신랑이 혼례를 치른 지 사흘 만에 죽었으니 양가가 모두 침통했다. 양가는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신부는 민씨 쪽에서 거두기로 합의가 되었다. 민씨 쪽에서는 신랑이 전부터 병을 앓고 있는데도 혼례를 치른 약점이 있었고 신부 쪽에서는 어쨌거나 신랑이 신부 집에서 죽었기 때문에 사색이 되어 있었다.
  ‘우리 아가씨가 사흘 만에 청상과부가 되다니….’
  만석은 소복을 입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박소사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 민조현에 대한 장례가 끝나자 박소사는 시가인 민씨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네가 신랑도 없이 시댁에서 살아야 할 생각을 하니 애비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구나.      허나 양반가의 법도가 엄중하니 어떻게 하겠느냐? “
  박소사의 부친 박사건이 말했다.
  “비록 사흘밖에 남편을 모시지 못했으나 오롯이 절개를 지키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소녀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소서.”
  “고맙구나. 만 석이를 딸려 보낼 테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상의하고 의지하도록 해라.”
  박사건은 민조현의 집으로 가는 박소사에게 종 만석을 딸려 보냈다. 만석은 박소사를 따라 민조현의 집에 가서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민씨 집안은 인현왕후를 배출한 여흥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박소사가 청상의 며느리가 되어 들어갔을 때는 가세가 기울어 빈한하게 살고 있었다. 박소사는 정성껏 민조현의 3년상을 치렀다. 3년 동안 삭망이 돌아오면 한번도 제사를 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수 길쌈을 하고 바느질을 했다. 만석도 부지런히 일을 하여 민씨 일가는 풍족하지는 않았으나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민씨 일가의 바로 이웃에 김조술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조술은 위인이 음흉하고 패악스러운 사람이었다. 만석은 나이가 많은 총각이었기 때문에 김조술의 집 여종과 혼례를 올려 낮에는 민씨 집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김조술의 집에서 잤다. 3년상을 치르고 나자 박소사는 20세가 되었다. 여자가 20세면 꽃처럼 피어난다. 박소사는 눈이 부신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민씨 일가는 무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박소사가 청상과부로 살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딸처럼 대해 주었다.
  김조술은 박소사를 한번 보자 그 눈부신 미모에 넋을 잃었다. 그러잖아도 패악스러운 사내로 악명이 높은 김조술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던지 박소사를 품을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러나 박소사의 시아버지가 버티고 있어서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민씨가 출타를 하기 위해서 김조술의 집으로 휘항(揮項 : 방한모)을 빌리러 왔다.
  ‘옳지 민가가 출타를 하면 집에는 아녀자들밖에 없을 테니 이때 덮쳐야하겠다.’
  김조술은 민씨에게 휘항을 빌려주면서 음흉한 생각을 했다. 민씨가 출타를 하고 밤이 왔다. 만석은 김조술의 여종과 혼례를 올려 아들과 딸을 두었기 때문에 잠은 김조술의 행랑에서 잤다. 김조술은 밤이 되자 민 씨가의 담을 넘었다. 날씨는 살을 엘 듯이 추웠다. 박소사는 불을 끄고 잠을 자려다가 담쪽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리자 시어머니의 방으로 몸을 피했다. 김조술은 박소사의 방에 침입했으나 박소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박소사가 시어머니의 방으로 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젠장, 모처럼 기회를 잡았는데 허탕을 칠 수는 없어.’
  김조술은 눈이 충혈 되었다.
  “박소사는 나와 정을 통했으니 속히 밖으로 내보내시오.”
  김조술은 시어머니의 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썩 물러가시오.”
  박소사의 시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박소사는 나와 정을 통해 수태를 했는데 어찌 내보내지 않는 것이오? 박소사는 내 아낙    이오.”
  김조술은 계속 소리를 지르고 행패를 부렸다. 시어머니와 박소사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도둑이야! 도둑이 들었다!”
  시어머니가 마침내 죽을 각오를 하고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동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김조술은 그때서야 당황한 표정으로 달아났다. 며칠 후 출타를 했던 시아버지 민씨가 돌아왔다. 시어머니는 김조술이 침입하여 행패를 부린 사실을 민씨에게 고했다. 민씨는 소문이 나면 양반가의 체통이 깎인다고 하여 쉬쉬했다. 박소사는 비통했다. 김조술은 박소사를 겁탈하는 일이 실패하자 박소사가 자신과 정을 통하여 수태를 한지 4, 5개월이나 된다고 거짓 소문을 동네에 퍼트렸다. 박소사를 쫓겨나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박소사는 동네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김조술은 추악한 자다. 내가 이렇게 능욕을 당하고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 산다는 말인     가?’
  박소사는 절개를 더럽혔기 때문에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조술 같은 악인을 그냥 두고 자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김조술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소문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박소사는 김조술을 영천 관아에 고발했다. 김조술은 박소사가 고발했다는 말을 듣자 즉시 관아에 뇌물을 쫙 뿌렸다. 영천 현감은 박소사의 고발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고발이 들어오면 송사를 벌여야 하는데 송청조차 열지 않았다.
  “사또께서는 어찌 송청을 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박소사가 항의했다.
  “그대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밝혀질 것이 아닌가? 공연히 관장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사또가 송청을 열지 않으면 나는 죽음으로 결백을 밝히겠소.”
  박소사는 결연히 외치고 은장도를 뽑아들었다.
  “핫핫핫! 네가 그까짓 은장도로 관장을 위협하느냐? 자진하려면 장검으로 하라.”
  영천 현감은 박소사를 비웃은 뒤에 관비들을 시켜 현청 밖으로 내좇았다. 박소사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통곡한 뒤에 장검으로 목을 찔러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영천현은 발칵 뒤집혔다. 영천 현감은 그때서야 형방을 부르고 약방 노파를 불러 검시를 하게 했다. 조선시대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수령의 입회하에 검시를 하고 검안부를 작성하게 되어 있었다. 약방노파가 박소사의 시신을 검사한 뒤에 검시소견서를 썼다. 영천 현감은 약방 노파를 윽박질러 검시소견서를 찢고 박소사가 임신을 하여 낙태하는 약을 잘못 먹어 죽은 것으로 검시소견서를 새로 쓰게 했다. 박소사의 시신은 민씨의 집으로 옮겨졌다. 민씨는 며느리가 죽은 것도 억울한데 외간남자와 정을 통해 임신하여 낙태를 하다가 죽었다고 영천 현감이 발표하자 분개했다. 양반가인 민씨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민씨는 관아를 찾아가 맹렬하게 항의했다. 그 과정에서 영천 현감의 태도에 분개한 민씨가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에게 욕을 했다고 하여 영천 현감은 민씨를 안동부에 하옥했다.
  ‘아씨께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진을 했는데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으니 이제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만석은 비장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김조술의 위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가 박소사를 모함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당신의 상전이 나의 주인을 죽게 만들었으니 당신은 당신의 상전을 받들라. 나는 나의      주인을 위해 할일을 할 것이다.”
  만석은 아들과 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김조술의 여종에게 파혼을 선언했다. 만석의 아내가 울고불고 매달렸다. 만석은 박소사의 시신을 관에 넣은 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매장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한양으로 상경했다. 만석은 조정대신들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초헌이 나타나면 달려가 엎드려 박소사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너는 박소사와 어떻게 되는 사이냐?”
  “저는 일개 종입니다.”
  “종이 이토록 충직하니 가상하다.”
  조정대신들은 만석의 충정에 감동하여 관찰사를 통해 조사를 하게 했다. 관찰사가 영천에 내려가 조사를 하자 증인과 증거가 날조되어 진상을 밝힐 수 없었다. 만석은 노자가 떨어져 거지 노릇을 하면서 임금(순조)이 지나갈 때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임금의 행차는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만복은 실망하지 않았다. 여러 해가 흐르자 마침내 순조가 능에 행차하게 되었다. 만석은 순조의 행차가 지나가는 동대문밖 제기현에서 기다리다가 어가가 나타나자 쟁(錚 : 징)을 울렸다. 순조가 만석을 불러다가 사연을 물은 뒤에 경상감사에게 재수사를 하라는 영을 내렸다.
  경상감사 김상휴(金相休)는 영천에 직접 내려가(조선왕조실록 순조 22년 1월 9일  김상휴(金相休)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음) 약방 노파부터 심문했다. 한 차례 곤장을 때리자 약방 노파가 사색이 되어 공술했다.
  “네가 검시를 했다고 하니 검시 결과를 상세히 고하라! 박소사가 수태를 했더냐?”
  “아, 아니옵니다.”
  “무엇을 근거로 아니라고 하느냐?”
  “박소사는 유소이건(乳小而乾)하여 태아를 갖지 않은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유소이건은 젖꼭지가 작고 말라붙어 있다는 뜻이다. 임신 5개월이면 여자는 젖꼭지가 커지고 젖무덤도 발달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무슨 근거가 있느냐?”
  “복첩어배(腹捷於背)하였습니다.”
  복첩어배는 배가 등에 붙은 것으로 배가 부르지 않았다는 검시 소견이다.
  “허면 박소사가 사통을 한 것이냐?”
  “박소사는 진처자야(眞凄子也)이옵니다.”
  진처자야라는 것은 춥고 쓸쓸하다는 것으로 남자와 동침을 하지 않은 순진한 처녀를 뜻한다. 박소사가 신행을 갖추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약방 노파의 검시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김상휴는 관원들을 데리고 민씨의 집에 가서 박소사의 시신을 검사했다. 박씨 일문에서도 가문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 박소사의 이종 오라버니인 박시원을 비롯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현장에 임검했다. 박시원이 관 앞에서 곡을 하고 관 뚜껑을 열자 박소사의 시체는 잠이라도 자고 있는 듯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악취도 풍기지 않았고 부패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목에는 칼에 찔린 자국이 선명해 낙태약을 먹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진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상휴는 순조에게 자세한 계사(啓事 : 보고서)를 올렸다.
  “김조술은 가증스러운 자인데 어찌 이리 송사를 오래 끌었는가? 김조술을 사형에 처하고 양천 현감은 바른 송사를 하지 않았으니 해당 법조문에 따라 처벌하라. 열녀 박소사에게는 정려(旌閭 : 마을 앞에 세우는 문. 열녀와 효자들에게 내리는 문이다)를 내리고 만석은 충직한 노복이니 생전에는 복호(復戶 : 충신, 효자, 열녀에게 세금을 면제하는 일)하고 사후에는 정문(旌門)을 내리도록 하라.”
  순조가 어명을 내렸다. 1822년(순조22년)의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22년 10월 21일 기록을 보면 열녀박씨에게 정문을 세워 주라고 명하다 열녀 박씨(朴氏)에게 정문을 세워 주라고 명하였다. 박씨는 사족(士族)의 청상 과부였는데, 본 고을 사람 김조술(金祖述)의 핍박을 받자 자결하여 몸을 깨끗이 하였다. 그런데 흉도들이 옥사를 번복시켜 3년이 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았는데, 그의 노복 만석(萬石)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 차례 호소한 끝에 비로소 밝혀져 예조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였다. 만석은 충직한 노복이라 하여 생전에는 복호(復戶)해 주고, 사후에는 정문을 세워 주라고 하였다.
  박소사의 열녀각(烈女閣)과 고만석의 충노각(忠奴閣)은 영주시 문수면 만방리에 세워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박소사의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박소사는 열녀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민조현과 혼례를 올리고 신행 전에 죽었다. 신행은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혼례를 올린지 사흘 만에 이루어진다. 약방 노파의 검시소견서에 진처자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처녀를 뜻한다. 처녀의 몸으로 모함을 받고 자결했으니 애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종 고만석은 충노각이 세워졌다. 일부 야사에서는 박소사와 만석이 사사로이 정을 통했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약방노파가 진처자야라고 검시를 했기 때문에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종 만석이 박소사를 홀로 연모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는 이미 아들과 딸을 낳은 아내에게 절연을 선언하고 한양에 올라가 몇 년 동안 걸인 행각을 하면서 박소사의 누명을 벗겼다. 이 눈물겨운 충정은 사랑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