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문화유산보존회

순흥의 문화 유적(소여 선생)

단산사람 2014. 6. 9. 12:47

아! 순흥,  그 빛나는 문회유적들

① 순흥안씨 추원단(順興安氏 追遠壇)

순흥의 속칭「안(安)터」건너편에 있는 명산(名山) 비봉산(飛鳳山) 4만3천평에 축조(築造)되었다.

1987년2월8일 기공하여 위는 시조(始祖) 상호군공위단(上護軍公位壇)이 되고 아래에 중앙으로 부터 좌(左)는 태사공위단(太師公位壇)이니 전날의 향려단(鄕閭壇)이고 우(右)는 판관공위단(判官公位壇)이니 전날의 오산단(梧山壇)이다.

서(西)는 신기별장공위(神騎別將公位)외 삼위(三位)는 곧 전날의 산파단(山坡壇)이며 우동(右東)은 전리정랑공(典理正郞公) 외 사위(四位)이니 전의 대산단(臺山壇)이다. 1988년부터 추원재 제향을 이 신단소에서 모시기 시작했다.

1990년 봄에 「순흥안씨(順興安氏) 추원단비(追遠壇碑)」를 세웠다. 여기에는 시조이하 7대에 이르는 선조님들의 빛나는 사적과 그간의 관향지 종사(宗事) 연혁, 이 종사에 힘쓴 선조님들의 기적(紀蹟), 또 이번 시조사단을 이전하여 중건한 사실들을 기록해 놓았다.

 ②추원재(遣遠齋)

약 8백여년전에 시조이신 호군공(護軍公) 휘 자미(子美)께서 순흥에 기지(基地)를 잡으시 고 순흥안씨라는 본관(本貫)을 얻으신 곳이 순흥이다.

자손이 번성하고 대를 이어왔으나 역사적인 여러 사건으로 말미암아 시조 호군공을 비롯하여 여러 대 선조의 분묘가 실전되고 말았다. 족보에 묘가 소백산 아래 있다고 하나 표가 없어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인조 25년 1647년 봄에 17대 순원군(順原君) 휘 응창(應昌 . 호 우졸재(愚拙齋) )공께서 의성(義城)의 수령(守令)으로 소수서원을 참배하고자 순흥을 심방하시었다. 선조의 구거(舊居)를 찾으시니 그 땅은 이미 타인의 농경지가 되어 농부의 소모는 소리 뿐이었다. 우졸재공은 감회가 착잡하고 죄를 저지른 느낌마저 들어 우선 향려단(鄕閭壇)과 추원재(追遠齋)를 짓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종인(宗人)에게 통문(通文)을 돌리는 등 노력 끝에 효종5년, 1654년 초가 3간을 석교리 246번지에 세웠다.

1918년 9월 25일에 재실이 협소하고 노후하여 제관(祭官) 수용이 어려우므로 옆의 밭을 사서 중건하였다.

1959년 이 재실을 중수코자 인식(寅植)씨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어른들이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전국을 돌며 성금을 모았다. 그러한 각고(刻苦)끝에 1962년 4단소(四壇所) 합단(合壇)과 현재의 추원재를 이룩하였다. 이 때 여러 부속 건물도 건축되었다.
현재 중건된 추원재는 새로 이설된 추원단 아래에 1층  건축 가로 약 50평을 성금 4억 여원으로 1996년에 완공하였고 또한 추원단 관리실 창고등 부속건물도 병설하여 매년 세사봉행(歲祀奉行)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③향려단(鄕閭壇)

시조(始祖) 휘 자미(子美) 상호군공(上護軍公)과 2세조 휘 부(孚) 태사공(太師公)의 묘가 실전(失傳)되었기 때문에 세향을 올리기 위하여 효종 5년, 1654년 1월 15일 응창(應昌)공께서 석교리 203번지에 위석(位石)을 봉안하였다. 새로운 추원단이 건설되어 향려비(鄕閭碑)는 옮기고 단은 노후하여 그대로 두었다.

④산파단(山坡壇)

순흥면 석교리 516의 1에 철종(哲宗) 9년, 1858년에 이파(二派)의 파조(派祖) 밀직부사(密直副使) 휘 영린(永麟)공을 위시하여 3세조 이부시랑(吏部侍郎) 휘 정준(貞俊)공과 4세조 밀직부사 휘 성철(成哲)공과 5세조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내신 휘 문개(文凱) 시호(諡號) 문의공(文懿公) 등 4위(四位)를 설단하였던 옛터다.

⑤대산단(臺山壇)

순흥면 읍내리 84번지에 순조(純祖) 25년, 1825년에 3파 파조 휘 영화(永和) 교서랑공(校書郎公)과 3세조 호부시랑(戶部侍郎) 휘 득재(得財)공과 4세조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휘 희서(希)공과 6세조 전법판서(典法判書) 예문관 대제학이신 휘 보() 시호 문경공(文敬公)과 아우이신 보문관(寶文館) 대제학에 성균관(成均館) 좨주(祭酒)를 지내신 휘 집(輯)공 등 5위를 설단하여 봉사한 자리이다.

1985년에 유허비(遺墟碑)를 비롯하여 위의 다섯분 외에 五세조 휘 석(碩), 6세조 휘 축(軸), 7세조 휘 종원(宗源) 세 할아버님을 더하여 비를 세우고 1987년 5월에는 조경공사를 하여 주위를 미화하였다.

⑥오산단(梧山壇)

순흥면 석교리 302번지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1922년 1파의 6세조 판관공(判官公) 파조(派祖) 휘 신(愼)공의 위석을 봉안하였었다.

⑦세연지(洗硯池)

순흥면 석교리 속칭 「安터」 서남방 약 50미터 지점에 존재하는 작은 못으로 회헌선조(晦軒先祖)께서 공부하실 때 벼루를 씻던 곳이다. 이 못은 사라호 태풍의 피해로 거의 메워져 버렸고 옹달샘은 지금도 약수터로 자리하고 있다. 자리를 표시하는 비석이 있다.

 비문에「順興西南 松鶴山下 鶴橋村 有石間小泉 下有半畝方池 卽我晦軒先生 少時 洗硯池 古傳 晦軒先生胎室在 其傍 先生舊第及洗硯」'죽계서 송학산 학교촌 유석간소천 하유반무방지 즉아ㅗㅚ헌선생 소시 세연지 고전 회헌선생태실재 기방 선생구제급세연' 「순흥 서남쪽 송학산 밑에 학교촌이 있고 바위 사이에 작은 샘이 있는데 그 밑에는 네모진 못이 있으니 회헌선생께서 소시에 벼루를 씻던 못이다. 전해 오기를 회헌선생의 태실이 그 옆에 있었고 옛날 사시던 집도 여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⑧사현정(四賢井)

순흥성 동쪽 1리에 우물이 있는데 5세조 문경공(文敬公) 휘 석(碩)께서 그 아드님 문정공(文貞公) 휘 축() 문경공(文敬公) 휘 보(輔) 좨주공(祭酒公) 휘 집(輯)과 같이 4부자분이 한집에 사실 때 쓰시던 우물이다.

덕행(德行)과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벼슬이 높았으므로 훗날 사현(四賢)의 유덕(遣德)을 기리는 뜻에서 사현정이라 불렀다.

인종(仁宗) 1년, 1545년 풍기군수이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사현정 비를 세우고「일가(一家)의 충효우제(忠孝友悌)와 청백지풍(淸白之風)이 지금껏 뚜렷하여 청사(靑史)에 및난다」고 칭송하였다.

효종(孝宗) 7년, 1656년에 순원군(順原君) 휘 응창(應昌)께서 다시 비를 세웠고, 순조(純祖) 21년, 1821년에 목사(牧使) 성연(性淵)공께서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1962년에는 상규(商奎), 학준(學濬)공께서 우물과 비각의 돌담을 조성하고 수리하였으며 1986년에는 경상북도 기념물(第69호)로 지정이 되었다. 이어 1987년에 다시 중수(重修)를 하였으며 앞으로 그곳에 지하수를 개발하여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하여 7백년전 할아버님들의 거룩한 뜻과 모습을 기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⑨소수서원(紹修書院)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있다. 영귀봉(靈龜峰) 동쪽 죽계수(竹溪水)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중종 37년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선생이 우리의 4세조 휘 향(珦) 문성공(文成公)을 제사하기 위하여 숙수사(宿水寺) 옛터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사학기관(私學機關)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중국 백록동(白鹿洞)의 주자서원(朱子書院)을 모방하였다 한다. 명종 5년 1550년 이황(李滉)선생이 군수로 부임하자 임금에게 아뢰어, 노비, 전결(田結) 및 소수서원이라는 액서(額書)를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소수서원이라고 개명하였다.

 임금은 이밖에도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記)를 만들게 하고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을 하사하였다. 이 서원은 중종 39년 1544년에 문정공(文貞公) 휘 축(軸)과  문경공(文敬公) 휘 보(輔)를, 인조 11년 1633에는 주세붕선생을 추배(追配)하였다. 고종八년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봄 가을 2회에 걸쳐 향제(享祭)를 드리고있다. 건물은 고적 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차에 걸쳐 중수(重修)되었고 미화작업이 이루어졌다. 회헌선조(晦軒先祖)님의 인재양성(人材養成)의 정신(精神)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경내(境內)에 15여억원의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충효교육관(忠孝敎育館)을 신축(新築)하여 후학(后學)들에게 충효사상교육(忠孝思想敎育)을 실시(實施)하고 있고 이여 주변(周邊)에 선비촌을 조성(造成)하여 조선조(朝鮮朝)에 선비를 양성한 실례(實例)를 재현하고 있다.

⑩ 安터

속칭 安터로 전래된 곳이 문성공 선조의 탄생지라는 무좌진향(戊坐辰向. 서북쪽에 자리하고 동남을 향함)의 옛터를 말한 것과 우리 안씨가 집거(集居)했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짐작된다. 송학산(松鶴山)과 학교(鶴橋.학다리) 그리고 세연지가 있던 곳의 돌 사이의 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불변하다. 흥주읍지(興州邑誌)를 보면 학다리는 풍기에서 순흥으로 들어오는 입구 근교(近郊)의 계곡(溪谷)에 있는 것이다. 전래된 학다리는 지금보다 아래에 있었다 하며 학다리 주막터는 지금도 있다. 학다리 마을은 농가 몇집에 불과하고 스레트 목조의 가옥이 존재하고 있다. 전해지는 말로 회헌선조의 출생지라고 하며 학교촌이 문성공의 생지(生地)임은 여러가지 문헌이 고증하고 있다.

⑪ 피끈이

영풍군 안정면 동촌리를 말한다. 순흥에서 영주로 4키로미터쯤 가서 대로 옆에 있는 동리이다. 단종조(端宗朝) 세조정난(世祖靖難)을 당하여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 패도(貝島 . 조개섬)에 귀양 왔을때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꾸미다가 사전 발각되어 안동관군(安東官軍)이 들이칠 때 대가(大家)는 무조건 불지르고 사람은 닥치는대로 죽였다. 이들이 돌아간 뒤 한양의 철기(鐵騎.말타고 싸우는 병사 즉 특공대)가 내리 밟아 순흥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 때 우리 안씨는 말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당시 벼슬에 오른 집만도 72호가 되었는데 이외에도 얼마나 많이 죽음을 당했는지 지금 소수서원 앞에 시냇물이 피바다로 변했다. 죽계수와 같이 피가 흘러내려 10리가 훨씬 넘는 동촌이라는 동리 앞에 와서야 피가 끊어졌다. 이리하여 피끈이라는 명칭이 생기고 오늘날까지 피끈이라 고 부른다.

12 패도(貝島.조개섬)

세조는 자기의 아우 금성대군을 사육신에 연루되었다하여 순흥으로 귀양 보냈다. 귀양지가 바로 패도(조개섬)이다. 피끈이라는 동리 조금 못가서 조개섬이라는 동리가 있고 그 동리 앞에 논가운데 둘레 4~5미터 높이 1.5미터 정도 크기의 무덤만한 봉우리를 조개섬이라한다.

어떤 이는 조개만하다 해서 조개섬이라 했고 또 어떤이는 조것이 섬이야 하는 뜻에서 조개섬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누가 보아도 귀양지가 못된다.「貝島」를 빙자해서 우리 안씨가 집성촌을 이룬 순흥에 와서 귀양살이를 한것이고 실제 거주지가 지금 금성단(錦城壇) 자리라 한다 .

13 흥주관(興州館)

흥주관은 객사(客舍)인데 옛날 성터에 있었다. 숙종 10년, 1684년에 부사 한성보(韓聖輔)가  세웠는데 문루가 있었다. 영조4년, 1728년에 부사 신필하(申弼夏)가 명태조(明太祖)의 어필(御筆)인 「충효절의(忠孝絶義)라는 4자를 간(刊)하고 그 후 영조 33년 1757년에 부사 조덕상(趙德常)이 명나라 신종(神宗)의 수서(手書)인 「용(龍)자를 족자로 만들어 지청(止廳)에 거니 글자 획의 굵기가 서까래만큼 컸다 한다.

14 봉서루(鳳棲樓)

이 누각은 원래 석교리밑에 세웠던 것을 지금 있는 순흥면사무소 경내로 이전하여 세웠다.

봉서루라 함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순흥의 진산(鎭山 . 지덕으로써 한 지방을 진정하는 명산)의 이름이 비봉산(飛鳳山)으로 봉이 날으는 형국인 바 봉이 날아가 버리면 지령(地靈)이 쇠퇴한다 하여 봉이 날아가 버리지 않고 깃들게 하기 위하여 누각을 세워 그 이름을 봉서루 즉 봉이 깃드는 누라 하였다 한다.

이 누의 북편에 타원형 즉 봉의 알처럼 도형하여 팔각정을 세우고 봉도정(鳳到亭)이라 이름하였다. 봉이 알을 두고는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정공께서 지으신 「순흥봉서루 중영기(順興鳳棲樓重營記)」가 있다.

15 숙수사지(宿水寺趾)

이 곳은 지금 소수서원이 있는 자리이다. 이 숙수사는 신라조불사찰(新羅造佛寺刹)로 조선조 건국초의 척불운동으로 촌락 주변의 사찰이 철거될 때 헐려버리고 지금은 석탑 자리와 당간지주(幢干支柱)만 남아 있다.

16 취한대(翠寒臺)의 각자(刻字.白雲洞 敬)

소수서원 앞 경렴정(景廉亭) 건너편 취한대 암벽에 경(敬)자와 백운동(白雲洞)이란 문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이는 중종 37년, 1542년 주세붕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면서 이르기를 「오, 회헌선생을 성사(聖師)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성사의 학리(學理)를 수계(修繼)코자 하나 세구년심(歲久年深)하면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敬)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회헌선생을 성사로 경모하였음을 전하게 되리라」하고 각자를 하였다.

17 석교리 석불좌상(石佛座像)

석교리 왼편 산골 밭가운데 이름이 전하여지지 않는 옛 절터에 석불좌상 1구가 있다. 이 석불은 통일전의 신라 석불로 원형(原形)이 완전하나 몇 군데 흠이 있다. 그러나 조형수법(造形手法)이 당시의 조각미술의 우수성이 잘 표현되어 있어 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8 초암사(草庵寺)

이 사찰은 통일신라 이전 두운대사(杜雲大師)가 창건한 것이라 한다.

삼국시대 소백산의 분수선(分水線)을 경계로 남쪽은 신라 북쪽은 고구려가 대치하여 수백여년간 밀고 밀리고 하던 국경으로서 신라는 소백산 남록(南麓)에 희방사(喜方寺), 유석사(留石寺), 비로사(毘盧寺), 성혈사(聖穴寺), 석륜사(石崙寺)등 여러사찰을 세우고 국경 경비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찰들은 고승대덕(高僧大德)의 주석처(住錫處)라기 보다는 국경 경비와 기타 역할을 담당한 초소 이기도 하였다.

19 태봉군(胎封群)

이 곳은 고려 왕자인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세분의 왕태자(王太子)의 태(胎)를 안봉(安封)하고 그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고 그 산밑의 마을을 태장(胎莊)이라 하였다.

아이가 출생하면 어머니 뱃속에서 아기와 같이 태(胎)가 나오는데 옛 사람들은 이 태를 굉장히 중요시 하여 좋은 곳에 묻거나 맑은 강물에 띄우기도 하였다. 태를 좋은 곳에 편안히 모신다는 뜻에서 묻은 곳을 안태지(安胎地)라고 하였다. 왕자의 태는 특별히 지관(地官)을 시켜 전국의 명산을 찾아 명당(明堂)에 안치하였다.

20 소백산성지(小白山城祉)

이 산성은 신라때의 성으로 고구려와 대치하여 삼국통일의 전초전을 벌리던 성터이다. 그 위치는 초암사(草庵寺) 서편 비로봉(毘盧峰)밑이며 성곽(城廓)의 규모는 주위 4천미터 성내의 주민 30여호가 현재 살고 있다. 성석(城) 부분 3백여미터가 잔존하고 있다.

21 향교(鄕校)

이는 관학기관(官學機關)으로서 유교의 윤리를 건국의 기반으로 한 조선조 초기의 교육기관 설치에 따라 태조(太祖)7년, 1398년 성균관(成均館)개설과 곧 이어 유향(儒鄕)인 순흥에 우선적으로 향교가 설치되었다. 순흥향교는 안동향교의 2년후에 세워졌다고 한다. 처음 설립 위치는 석교리 동편 산록이었으나 후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22 은행목(銀杏木)

석교리의 은행나무

직경 6척, 둘레 20척, 높이 60척 수령이 8백여년으로 추정된다.

소수서원의 은행나무

직경 5척, 둘레 20여척, 높이 50여척 수령 7백여로년으로 추정된다.

금성단(錦城壇)의 은행목

금성단 앞에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인조 7년 1629년에 화재로 반소(半燒)되어 높이 10여척이 남고 수간(樹幹)의 피질(皮質)도 베껴져 마른 나무둥치의 상태로 있었다. 언제인가  한 술사(術士)가 지나면서 말하기를 이 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흥주(興州)가 반드시 복고(復古)되리라 하였다. 그런데 인조 21년, 1643년경부터 점차 피질이 형성되고 줄기가 살기 시작하여 숙종 8~9년, 1682~3년 사이에 완전히 무성하였다.

숙종 30년, 1704년 단종의 왕호가 회복되고 의거에 참여하여 역신(逆臣)으로 몰렸던 분들이 복권이 되었다. 금성대군의 억울한 원혼이 신기한 증거를 보인 것으로 짐작된다. 50년 죽었던 나무가 다시 살아나서 오늘까지 은행이 열리고 있으니 순흥이 아니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23 금성단(錦城壇)   성황당(城隍堂)

영주시 단산면(丹山面) 단곡리에 세종(世宗)의 여섯째 왕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영혼을 모신 서낭당이 있다. 순흥면사무소에서 4키로미터쯤 죽계천 맑은 물을 따라 소백산 연화봉(蓮花峰)을 향해 올라가면 속칭 두레골(斗汝洞)이 나오는데 그 뒷산 밀림속에 있다.

단종의 복위를 위한 사육신(死六臣)의 순절이 있던 다음해 세조 2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은 의병을 일으켜 거사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순흥은 불바다가 되고 폐부(廢府)가 되었으며 금성대군은 안동의 안기역에서 교살되고 말았다.

금성대군이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던 곳은 돌담만이 무너진 채 밭가운데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후 이곳에 살던 한 노파가 꿈에 금성대군이 현몽하기를 「내 천추의 억울한 혼이 물속에 피묻은 돌이 되어 죽계천에 있다.」고 하여 그 곳을 찾아가 본즉 과연 피묻은 돌이 있었다 고 한다.

정조10년, 1786年 순흥부 초군청(草軍廳)이 주동이 되어 원통하게 죽은 금성대군을 모실 서낭당을 짓기 위하여 모금을 하였다. 이 돈으로 두렛골에 2평정도의 서낭당을 지었고 그 곳에 금성대군의 혼이 깃들었다는 돌(높이 90센치, 둘레 180센치)을 모셨다.

24 문성공(文成公) 영정(影幀)

이 영정은 고려 충렬왕 때(1275~1308)문성공께서 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원나라 학관(學官)들과 교유(交遊)할 때 학관이 세폭을 그려 두폭은 자기들이 갖고 한 폭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문성공께서 돌아가신 후 문묘(文廟)에 봉안(奉安)하였다가 그 후에 종택(宗宅)에 이안(移安)하였었는데 소수서원을 창건한 후 서원에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이 영정의 도형(圖形)과 색채(色彩)가 특수하고 우리나라 현조 회화 가운데 사성연대(寫成年代)가 가장 오래되어 국가보존문화재로서 1967년 6월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 지성대성(至聖大成) 문선왕(文宣王) 전좌도(殿坐圖)와 주세붕선생의 영정이 보물로 지정 보존되고있다. 문선왕 전좌도는 문성공께서 충렬왕 때 원나라에 다녀오시며 함께 가져온 것으로 문성공 재세시(在世時)에는 본댁 별관에 봉안하고 조석으로 우러러 보시던 문선왕 즉 공자(孔子)의 영정이다.

당시 같이 봉안되었면 주자(朱子)의 진상(眞像)은 소재를 알 수 없다. 문선왕 전좌도에는 공자를 중점으로 좌우중단(中段)에 십철(十哲)이 나누어 앉아 있고 하단(下段)에는 칠십제자상(七十弟子像)이 열좌(列座)하여 있다.

이 도형에 나타난 청정(淸淨)한 기상(氣像)과 사성선(寫成線)이 한결같이 섬세한 사선(絲線) 으로 정묘하게 그려져 있다.

주세붕선생의 영정은 범같은 기상으로 당대의 영걸(英傑)로 관하를 호령하던 행정인으로 정명치세(正明治世)의 업적을 상상할 수 있는 기품(氣稟)이 넘쳐 흐르고 있다.

문성공을 성사(聖師)로 우러러 사모하여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회헌선생의 창명교학(倡明敎學)의 정신을 닦게 한 경앙심(景仰心)이 지극한 유학자였다.

 

2014.6.9/소여선생 불로그에서 담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