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토유물
출토유물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기와류로 특히 1~4호 축대 앞쪽에 두껍게
형성된 구릉상부 퇴적층(매몰층) 내부에서는 축대 상단에 조성되었던 건물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량의 완형 평기와(암키와: 장 37∼42cm, 폭 26∼28cm,
후 1.3∼2.6cm. 수키와 장 36∼41cm, 폭 14∼18cm, 후 1.6∼2.3cm)가 출토되었다.
배면에 어골복합문, 집선문, 선문,등이 타날되어 있고, ‘卍 ’․‘直手’명 명문기와도
다수 확인된다. 상기 퇴적층에서는 청동불상좌대, 공양상, 청동경, 청자류, 도기류
등이 출토되었으며, 축대 2호의 동편일부에 덧대어 2차로 조성한 석렬 앞에서는
진단구로 안치한 경상(鏡像)과 경자(磬子)가 발견 되었다. 또 조사지역 서편에 위치한
우물 내부에서는 광명대, 향완, 금동완, 철솥, 나무주걱 등이 확인되었다. 주요유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경자(磬子)
반구형의 경자는 상단의 중앙에 자루나 고리를 고정하기 위한 지름 0.4㎝ 크기의
원형 구멍이 1개 있다. 단조로 얇게 두드려 제작한 것으로 기면의 두께는 0.1~0.2
㎜로 매우 얇다. 하단의 접지면 폭은 0.7㎝이고, 안쪽으로 접어 올려 접합한 것으로
보이는 높이 약 1㎝까지의 단면 삼각형의 공간은 비어있다.
▶ 기고 6.8㎝ 저경 13.7㎝ 두께 0.1∼0.2㎜
2) 선각불상경(線刻佛像鏡, 경상鏡像)
얇은 동판에 양류관음(楊柳觀音)을 새긴 선각불상경은 경면(鏡面)의 상단 중앙부에
직경 0.3㎝의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고정하거나 걸어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류관음을 살펴보면 구름 위의 연화대좌에 앉은상으로 정중앙에 단독으로 배치되어
있다. 구슬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에 화불이 표현되었고, 원형의 얼굴에 눈 ․ 코 ․ 입과
백호를 새겨 넣었다. 수인은 아미타구품인 가운데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손가락 사이에 버드나무가지를 끼워 들고 있다. 등 뒤로 양방향으로 나부끼는
천의가 표현되었고, 양어깨를 덮은 대의는 들어 올린 양팔의 손목 아래로 유려하게 흘려
내려져 있다. 'U'자형으로 드러난 가슴에는 구슬과 화형장식으로 꾸며진 경식을 착용한 모습이다.
대좌는 앙련과 복련이 위아래로 맞붙은 형태로 앙련의 중앙에 3∼4엽의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선각불상경은 양면에 조상되는 경우도 있으나, 금광리 출토 경은 한쪽 면에만 관음상이
단독으로 새겨져 있으며, 관음상의 두광 양 옆에는 후대에 추가로 뚫은 것으로 보이는 직경
0.4∼0.7㎝의 구멍이 2개 확인된다.
▶ 직경 16.0㎝ 두께 0.1㎝
3) 합장인물상
건물지 2호 건물지 기단부의 미석면에서 출토된 민머리의 인물상으로 둥근 얼굴에
선각으로 눈과 입을 간략하게 새겼으며, 소매 자락에 손을 감춘 채 맞대고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려 합장한 자세이다. 뒷면은 납작하고 두부와 하반신 일부가 움푹 파인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부착하여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며, 얼굴과 복부 일부에서 미세하게 금박이
확인된다.
▶ 길이 2.5㎝ 폭 0.7~1.0㎝
4) 불상좌대
앙련과 팔각의 중대, 복련의 상 · 중 · 하대로 구성된 3단 형식이다. 상대 위에는 불입상의
양쪽 발과 양 발뒤꿈치 중간부분에 광배를 받치기 위한 용도로 보이는 직경 0.5㎝의
타원형 홈이 남아있으며, 발목 위쪽의 불상은 결실된 상태이다. 발과 대좌를 연결하는
별도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신과 대좌는 통으로 주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는 단엽의 앙련이 엇갈리게 배치된 형태이고, 종집선문이 촘촘하게 새겨진 단 아래로
8각의 중대가 있다. 중대의 운주 사이의 각 면에는 원문을 빼곡하게 채워 장식하였다.
중대와 하단을 연결하는 단에도 종집선문을 새겼고, 하단의 복련 역시 단엽으로 각 잎의
중앙에 8엽의 화문을 1개씩 배치하였다. 하단 아래로 팔각의 다리가 있고 내부에는 안상이
투조되었다.
▶총고 4.0㎝ 대좌고 3.5㎝ 저경 5.5㎝
5) 광명대
상부가 편평한 원반형 등잔받침(燈盤)위에 등촉을 올려놓도록 구성된 광명대(光明臺)로
복발형 대좌와 간주(竿柱), 그리고 등잔받침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원반형으로 이루어진
편평한 등잔 받침은 테두리를 밖으로 약간 벌어지게 하였고, 상면 중앙에는 볼록한 간주
연결부가 돌출되었다. 죽절형(竹節形) 간주는 마디마디로 구 성되었으며, 아무런 문양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능형의 홈을 3곳에 만들어 놓은 대좌는 2단으로 처리되었다.
원반형 등잔받침의 테두리에는 명문이 돌아가며 음각되어 있다.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亡父安逸戶長禹載夫往生淨界之愿鑄成献金剛寺仏前丙午四月二十九日工一品別將甫石』 ‘돌아가신 아버지 안일호장 우재부가 왕생극락하기를 바라며 구리를 부어 만들어(鑄成) 금강사 불전에 바친다 . 병오사월이십구일 공일품별장보석’ |
원주 법천사지유적에서는 1168년경에 제작된 ‘무자명’ 광명대가 출토된 바 있으며,
본 유적의 출토품과 형식이 동일하고 명문에 언급된 일품 유물에서 보이는 병오년는
1186년인 것으로 추정된다.
▶총고 33.2㎝ 등반구경 14.0㎝ 등반두께 0.1cm, 등반높이 1.8cm(문자가 음각된 곳의
폭은 1.2cm) 간주 폭 1.68~2.3(마디부분)cm, 대좌저경 14.5cm, 대좌두께 0.2cm
6) 향완
청동제 향완 2점이 출토되었다. 한 점은 구연부가 수직으로 내려가 동체에 비해 살짝
벌어졌으며 노신이 둥글게 처리되어 통형 노대에 고정되어 있다. 구연부에 ‘南万五千’이란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또 다른 한 점은 구연부가 외반하고 하단까지 거의 직각으로 처리된 노신이 나팔형 노대에 고정되어 있다. 2점의 향완은 노신과 노대를 각각 따로 제작한 뒤 고정하였다.
▶ 총고 10.6cm 구경 10.7cm 구연두께 0.1cm 저경 7.0cm 저부두께 0.15cm
▶ 총고 15.3cm 구경 14.6cm 구연두께 0.27cm 저경 10.0cm 저부두께 0.26cm
7) 청동경
축대 4호(쌍금당초문팔릉경)와 건물지 5호(칠보문사엽경) 전면에서 출토된
청동경은 평면이 8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듯한 팔능경과 4개의 꽃잎으로
중앙의 반원형 꼭지를 중심으로 앵무문과 당초문, 칠보문이 새겨져 있다.
▶ 직경 12.0~13.1cm, 두께 0.18cm
▶ 직경 9.7~10.3cm, 두께 0.1cm
8) 토제탑
▶ 현고 25.5cm, 폭 31.0
(상단고 11cm, 폭 17.0cm)
(하단고 14.5cn, 폭 31.0cm)
발굴현장
금광리 항공사진
내성천이 금광리를 휘감아 돌아가고 있다.
멀리 영주댐이 보이고 발굴지는 왼쪽 상단 솔숲 아래부분임
발굴지 안내
보물급 유물은 왼쪽 우물에서 발굴됨
발굴지
지하 6m 우물의 모습
아래는 사각형이고 지상은 원형이었다고 함
금광마을 동남쪽 오가피나무밭에서 금강사지 발견
외딴집 윗쪽이 금강사지임
발굴현장/호미로 파서 양동이에 담아 퍼낸다음 채로친다고 함
발굴현장과 우물지
현장조사단(2014.4.16 오후) 방문 현장 설명회
국회관계자, 환경단체 및 취재진
발굴현장
복원된 우물
출토유물
유물 Set 1
유물 Set 2
경자
광명대(우리지역말로 하면 등잔)
금강사(錦江寺)로 전해졌던 절터 금강사(金剛寺)로 확인
기와, 도자기 등 파편
동경1
동경2
불상좌대
선각불상경
솥
토제탑
합장인물상
자료제공:한국문물연구원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 불로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 GNπ http://blog.daum.net/lwss0410/
영주댐 수몰지 금광리서 보물급 유물 발굴
현장 설명회 열려/뭐가 나왔나?
제작시기와 내력 명시된 광명대 국내 첫 출토금강사(錦江寺)로 전해졌던 절터 금강사(金剛寺)로 확인댐 건설과 담수 계획에 차질 있을 듯
영주댐 수몰지예정지인 금광리(금강마을) 산중턱 동남방향에서 고려시대 금강사(金剛寺)라 불린 절터의 흔적을 찾았고 그 우물에서 보물급으로 평가되는 유물 다수가 발굴돼 학계와 환경단체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장하나 의원이 12일 문화재청의 '영주댐 수몰지역 문화재 발굴자료'를 공개한 이튿날 금광리 일원을 발굴하고 있는 한국문물연구원이 발굴․조사 내용을 밝힘에 따라 장 의원의 요청으로 16일 오후 금광리 발굴현장에서 설명회가 열리게 됐다.
이날 설명회에는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을 비롯한 장하나 국회의원의 보좌관 송용한 씨, 황선중 내성천보존회장, 환경단체 관계자, 장이덕 금광리 이장과 지역주민 등이 참석했고 안동MBC TV,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이 취재에 나섰다.
오후 2시부터 현장 설명회가 시작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국문물연구원의 김하나 문물조사 과장은 “한국수자원공사 영주댐건설단 의뢰로 수몰예정지인 금광리 일원 6만7천㎡를 발굴조사한 결과, 고려시대에 금강사라 불린 절의 흔적을 발견했다”며 “여기서 광명대(光明臺, 촛불과 등불을 받치는 기구)와 앙류관음보살 새김 경상(鏡像) 등의 불교공양구 등 고려시대 유물을 다량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김과장은 “이 중에서 광명대는 제작 시기와 동기 등을 확실히 밝혀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며 “제작 시기와 내력을 기록한 광명대가 또 있기는 하지만 출토품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건물 1,2호지의 실측 현장과 대웅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소개한 김과장은 일행을 깊이 6m 우물지로 안내했다.
김과장은 “이번에 발굴된 보물급 유물들이 대부분 이 우물에서 발견됐다“며 “특이한 점은 광명대 원반형 등잔받침의 테두리에는 명문이 돌아가며 음각되어 있다. 명문 내용은 ‘亡父安逸戶長禹載夫往生淨界之愿鑄成献金剛寺仏前丙午四月二十九日工一品別將甫石’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안일호장 우재부가 왕생극락하기를 바라며 구리를 부어 만들어(鑄成,주성) 금강사 불전에 바친다. 병오(1189년)사월이십구일 공일품별장보석’이라고 적혀있다”고 설명했다.
현장을 둘러 본 후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보물급 이상의 유물이 많이 나왔다. 댐 건설은 지표조사를 비롯한 문화유적 발굴조사가 다 끝난 뒤 공사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영주댐은 완전히 거꾸로 진행됐다”며 “문화재 발굴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담수 계획을 한다니 어이가 없다. 문화재청은 이제라도 발굴조사 내용 등 전반을 전면 공개하고 발굴 기간은 연장해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마을 장이덕 이장은 “이렇게 큰 절이 발굴되라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금강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해들었는데 금강사(錦江寺)가 아니고 금강사(金剛寺)라니 예상 밖이다”고 말했다.
김하나 과장은 또 “발굴된 유물(기와, 그릇 등)로 볼 때 금강사는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되어 고려말 폐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현재는 조사단계이기 때문에 추정하고 있을 뿐 확실한 것은 전문위원들의 보고서가 나와 봐야 안다”고 덧붙였다.
발굴된 유물은 광명대와 양류관음보살을 새긴 경상, 합장을 한 인물조각상, 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사발 모양 금동완, 철솥, 절에서 예배드릴 때 쓰는 작은 종인 경자(磬子), 구리거울 등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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