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왕과 벽화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소지왕은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겼을 뿐만 아니라 겸손과 공손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감복(感服)하였다고 한다. 한편, 소지왕은 재위 22년(500) 가을 9월에 날이군(捺已郡: 현재의 경북 영주)에 거동하였는데 그 고을의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미모의 딸, 벽화(碧花)에게 수놓은 비단옷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는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 그에게 바쳤다. 소지왕은 파로가 음식을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열어보니 어린 소녀여서 괴이하게 여기고는 받지 않았다.
그가 왕궁에 돌아와서는 그리운 생각을 가누지 못해 두세 차례 몰래 그 집에 가서 벽화를 침석에 들게 하였다. 어느 날 소지왕은 고타군을 지나다가 늙은 할멈의 집에 묵게 되어 그녀에게 ‘지금 사람들은 나라의 왕을 어떤 임금으로 여기는가?’ 라고 물으니, 늙은 할멈이 대답하기를 ‘많은 사람들은 성인(聖人)으로 여기지만 저만은 그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듣건대, 임금께서는 날이군의 여자와 상관하러 여러 번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고기잡이에게 잡히고 맙니다. 지금 왕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을 성인이라 하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왕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럽게 여겨 곧 몰래 벽화를 아내로 맞아들여 별실에 두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늙은 할멈이 왕에게 충고한 것은 귀한사람으로 가볍게 돌아다니면 천한 사람에게 곤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시골 늙은 할멈의 충고를 만승지위(萬乘之位: 전쟁에 전차 1만대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지위)에 있는 소지왕이 기꺼이 받아들인 점을 생각해 볼 때, 소지왕은 우리에게 어떠한 충고라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벽화부인(485년 ~ ?)
ㅡ 소지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경국지색
벽화부인은 날이군의 섬신공 파로와 벽아부인 사이에서 485년에 태어났으며, 그녀 밑으로 위화랑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인물이 출중하여 어린 나이에 신라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500년 9월에 소지왕은 몸소 날이군에 행차하였다. 이때 소지왕은 이미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은근히 벽화의 미모가 보고 싶어 허연 수염을 날리며 직접 날이군에 거둥한 것이다.
소지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파로는 벽화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웠다. 그리고 채색비단으로 그녀를 치장하여 소지왕에게 바쳤다. 소지왕은 파로가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가마를 열어젖혔는데, 그 속에 아리따운 벽화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소지왕은 주변의 눈을 의식하여 차마 벽화를 취하지 못했다. 소지왕은 성군으로 이름이 높은 왕이었다. 그런 그가 증손녀뻘밖에 되지 않는 열여섯 살 소녀를 후비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20여 년 동안 성군으로 추앙받던 그가 하루아침에 추잡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소지왕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까스로 욕망을 억제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은 이미 벽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버린 뒤였다. 그는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 벽화가 보고 싶은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평복 차림으로 몰래 대궐을 빠져나가 파로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벽화와 관계를 맺었다. 소지왕의 그런 행각은 수차례 계속되었다. 마침내 성안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소지왕은 벽화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고 몰래 궁궐을 빠져나왔다. 평상복을 입고 날이군을 향해 가던 그는 도중에 고타군의 한 노파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그때까지 소지왕은 백성들이 자신의 미행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노파에게 물었다.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성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나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게 되어 있어요.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소지왕은 노파의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해도 벽화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벽화를 몰래 궁궐 별실로 불러들여 후비로 삼았다.
그때 벽화는 이미 소지왕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지왕은 그녀가 입궁한 지 두 달 만에 죽었다. 결국, 벽화는 소지왕이 죽은 뒤에 그의 아이를 낳았다. 벽화가 낳은 소지왕의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화랑세기』에는 소지왕 사후에 벽화가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되어 있다.
소지왕이 죽자, 벽화는 소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지증왕의 태자인 원종(법흥왕)을 섬겼다. 당시 원종에겐 태자비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소지왕의 딸 보도부인이다. 그런데 원종은 보도부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원종이 좋아하는 여자는 보도의 동생 오도였다. 그러나 오도는 벽화의 남동생인 위화랑을 좋아하여 서로 사통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법흥왕은 화가 나서 오도를 아시공에게 줘 버렸다.
그런데 벽화 또한 법흥왕 외에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법흥왕이 총애하던 인물 중에 비량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벽화를 좋아했다. 벽화 또한 그를 몹시 좋아하여 그들은 늘 뒷간에서 몰래 사랑을 나눴다. 비량은 벽화를 너무 사랑하여 궁궐에 오기만 하면 늘 벽화부인의 뒷간으로 가서 그녀와 정사를 나누곤 했다. 법흥왕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비량을 너무 아낀 나머지 벽화더러 비량에게 시집가도록 했다. 결국, 벽화는 처음에 소지왕의 후비가 되었다가, 다시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가, 비량의 부인이 된 것이다. 그녀는 비량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구리지다. 구리지의 아들은 화랑의 제5세 풍월주 사다함이다.
신라 왕실의 여인들은 이처럼 여러 남자를 거치며 결혼 생활을 유지하였고, 이 때문에 신라 사회에선 여자가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 사회에서 모계를 중시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지왕 시대의 세계 약사
소지왕 시대 중국에서는 남조의 유송이 멸망하고, 소도성이 제를 건국하였다. 이에 따라 북위와 남제가 대립하는 형국이 전개되어, 초기에는 남제가 주로 북위를 격파하였다. 이에 자극된 북위는 494년에 낙양으로 천도하여 대대적으로 남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남제에선 몇 차례 반란 사건이 발생하여 혼란이 야기된다.
이때 서로마를 장악한 오도아케르는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와 전쟁을 벌였고, 테오도리쿠스가 서고트의 후원에 힘입어 오도아케르를 격파했다. 그리고 493년에 테오도리쿠스가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을 건설했다. 프랑크족은 클로비스가 즉위하여 메로빙 왕조를 개창하고, 486년에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클로비스는 496년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서갈리아를 정복하는 등 세력을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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