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훈님의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꽃계에 핀 종가의 향기, 인동 장씨 연복군종택” | ||||||||||
경상북도의 북쪽 끝자락, 충북 단양과 사이좋게 소백산을 나눠가진 영주는 소백산으로 인해 따뜻한 기후, 맑은 물과 공기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덕에 장수면 일대의 너른 들은 지금까지도 풍족한 곡창지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바로 인동장씨 연복군종택(仁同張氏 延福君宗宅)이 자리하고 있다. 알리는 큼지막한 갈색 표지판이 우리를 안내한다. 안내판을 따라 좌회전을 하고,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가로지르는 작은 터널을 지나면, 마을의 당목으로 쓰였음직한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참으로 그러기나 한 것처럼 연복군종택으로 가는 길은 이 느티나무를 피해 반원을 그려 돌아가고 있으니 쉬이 길을 내주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마치 깜짝 등장을 위해 느티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온 듯 놀랍고, 황망하기 그지없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솟을대문 뒤로 산중턱을 가득 매운 안채와 사당, 영정각, 유물각 등 99칸 종가의 흑청색 기와군은 종가를 더욱 웅장하게 만든다. 이집이 바로 ‘인동장씨 연복군종택’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 명칭은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종택이 전체 인동 장씨 문중을 대표하는 종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이집은 연복군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는 종가이므로 ‘인동장씨 연복군종택’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르기까지 활약하였다. 세조 13년(1467)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직접 문무(文武)의 선비와 장군 28인을 선발하여 토벌군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여기에 포함되어 토벌에 참여하였다. 이시애의 반란이 종식되자, 그는 변란을 제압한 공로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그가 생을 마치자, 조정에서 예(禮)를 두터이 하여 장사를 지내주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하였다. - 충신의 후손, 영주에 뿌리 내리다. 문과 급제 후 한양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아들 맹우(孟羽, 1470~1511)를 낳았으며, 맹우는 다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응신(應臣, 1490~1554)과 응필(應弼, 1508~1544)이다. 조정을 농단하던 집권자 김안로에게 핍박을 받아 항상 외직으로만 맴돌았다. 마지막 임지였던 황해도도사(黃海道道事)로 재직할 시 두 아들을 당시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에서 학문으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던 창계 문경동(滄溪 文敬仝, 1457~1521) 에게 제자로 보내면서 영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특히 맏이인 응신이 문경동의 둘째사위가 되어 영주 초곡리(현재의 사일마을)에 뿌리를 내리면서 영주의 입향조가 되었다. - 꽃계에 핀 종가의 향기 건립하였다고 하니 이 집의 역사는 16세기 중엽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 집안의 위세를 나타내듯 웅장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영남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에서 시작된 높은 기단은 영남 반가班家의 상징인 ‘ㅁ’자형 정침을 받치고 있다. 정침의 뒤쪽 왼편 언덕 위에는 단아하게 사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오른편에는 마당과 같은 높이로 정침을 바라보며 유물각이 있고, 유물각의 왼쪽으로는 정침과 같은 높이로 영정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공간은 멋스런 담장으로 각기 생활공간인 정침과 유물각, 제사공간인 사당, 숭모공간인 영정각으로 구분되어 있다. 절묘하게 연결하여 평면상으로는 여느 반가와 다름없는 ‘ㅁ’자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장하고 있는 많은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유물각의 용도로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유물각이 너무 협소하여 2005년 지금의 유물각을 건축하게 되면서 그 기능을 새 건물에게 넘겨주고, 영정각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 宅이 人을 담으매, 人은 寶를 남기네. 다른 하나는 유물각이다. 안동의 학봉종가, 서애종가가 각각 유물각을 두고 있기는 하나, 한 종가에서 영정각과 유물각을 같이 두는 예는 드문 경우이다. 내 조상이 대단하다고 하여 ‘오늘부터 우리집은 아무개종가이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 집이 종가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못한다면 결코 그 집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하더라도 결코 종가라고 불리워질 수 없다. 그 집에 들어서 있는 유물각은 타문중과 유림의 비웃음을 받게 되고, 가문에는 수치가 된다. 그러니 종가라 불린다는 것과 종가에 유물각을 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타 문중들의 인정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적개공신장말손상훈교서」,제881호인 「장말손유품」, 제1005인 「장말손종손가소장고문서」 등 국보급 문화재만 5건 26점이며, 이 외에도 지정되지 않은 고서적과 문서 등도 수백점에 이르고 있어 종가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물론 모두 장말손과 관련된 가문의 유물이기는 하나, 고려시대 문과 급제자에게 내려준 홍패교지, 조선전기의 초상화, 이시애의 난을 역사적으로 검증해 볼 수 있는 교서 등 그 하나하나가 모두 문헌사적, 서예사적, 서지학적, 회화사적으로 우리민족의 역사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중심에 있는 중요한 유물인 것이다.
- 선비의 정취 그윽한 곳으로 손님을 접빈하는 것 역시 종가의 중요한 책무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양성과정을 거쳐 반듯하게 종손을 보좌하고 있다. 찾아오는 접빈객은 그 행색이 어떠하건, 배움이 높건 낮건, 일면식이 있든 없든,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친절히 모시며, 유물각으로 안내하여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선비문화가 21세기 디지털시대의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탈피하고 깨뜨려야만 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어느 사상이 주류가 되던 변하지 않는 인간의 기본 덕목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비문화이자 정신인 것이다. 종가의 향기가 마을 가득 그윽한 곳, 그곳에서 당신도 선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사진 서성훈 ----------------------------------------------------------------------------------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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