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불천위가
취사 이여빈
1. 선비의 고장과 취사 이여빈
우리의 선조들은 학문을 대단히 중요시했고 명분과 의리를 존중하면서 살아왔다. 소백의 정기가 서려있는 영주에는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한 대학자 안향이 태어난 고장이며 500여 년 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는 선비의 고장으로 수많은 명현(名賢)ㆍ거유(巨儒)를 배출하였음은 물론 충(忠)ㆍ효(孝)ㆍ예(藝)ㆍ학(學)이 살아있는 학문 탐구의 요람(搖籃)이다. 또한 취사 이여빈을 비롯한 문절공 김담, 민절공 김륵, 연복군 장말손 등 불천위제사 불천위제사, 불천위제사는 4대봉사의 대수가 넘어도 체천하거나 그 신주를 매주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모시고 봉사하는 일종의 기제사이다. 불천위에는 국왕이 하사한 국불천위와 문중과 향내의 유림에서 결정한 사불천위가 있다. 따라서 국불천위를 하사받은 후손은 가문의 영광이며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를 올리는 명현ㆍ명가들이 15가나 있어 선비의 고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사진 취사 묘, 소수서원]
2. 취사 이여빈은 누구인가
취사, 이여빈’이라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영주지를 최초로 쓴 분이다”라면 “아! 그런 분이로구나!”하고 생각할 것이다. 취사 이여빈은 1556(명종 11)∼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 참봉 효신(孝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4대손인 귀윤(貴胤)의 딸이다. 이여빈은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으로 나갔으나 1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전적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문란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1614년 옥사가 일어나 이이첨과 정인홍이 폐비(인목대비 폐모론)를 주장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옳지 못함을 상소하고 7일 동안 합문(閤門)앞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감곡(鑑谷)에 은거하며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취사문집 6권과 영주지가 있다. [사진 취사문집, 영주지, 인수정]
3. 취사가 입향 시조 이억
이억(李嶷)은 취사가 영주 입향 시조로 고려말의 무신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특별히 뛰어났으며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유장(儒將,선비인 장수)으로 강계 원수로 있을 때 1388년 음력 5월 이성 원수 홍인계(洪仁桂)와 함께 먼저 요동에 들어가서 적군들을 죽이고 돌아오니 우왕이 금정아(金頂兒)와 무늬있는 비단을 하사했다. 1392년 음력 6월 김용초(金用超), 김을귀(金乙貴), 김균(金稛) 등과 함께 밀직부사(정삼품 벼슬)에 임명됐다. 그 후 재차 원정한 요동정벌 때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을 개국했다. 이 때 가정대부중추원부사 겸 도평의사사사를 제수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 하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小白山) 아래 순흥으로 퇴거하였다. 태조(이성계)는 여러 차례 소명하였으나 불응하자 태조는 교지를 내려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하였으며 원공공신으로 포장되었다. 선생은 순흥에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소백산의 최고봉에 올라 개성을 향하여 절을 하고 가슴에 품고 있는 의분을 느껴 슬퍼하고 한탄하며 옛 임금을 생각하는 충절을 다 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 후 사람들은 당시 선생이 올랐던 소백산의 산봉우리를 국망봉이라 불러 오고 있다.[국망봉 사진]
3. 취사가의 별묘
취사가의 별묘는 사당과 제청을 겸하는 장소로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면 세 칸 측면 칸 반 정도 되는 소박하고 단아한 건물로 마을 앞에 있던 것을 지금 위치로 옮겨 왔다고 한다. 평면 구성은 전면에는 벽체가 없는 퇴칸으로 되어있고 내부 통칸에는 우물마루(井 모양의 마루)를 깔아놓았으며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어놓았다. 별묘에는 동문과 중문, 서문이 있는데 서문은 신주가 드나드는 신문이며 제관들의 동문으로 들어가 중문으로 나온다. 별묘 내당에는 높은 제상 위에 신주함이 있고 아래에는 향로와 향합이 있다. 별묘 밖 처마 밑 툇간에는 네 개의 툇기둥이 있는데 헌관이 내당으로 들어올 때는 동편 기둥에서부터 역S자로 기둥을 돌아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별묘 서문(신문) 밖에 준소(제주, 술을 두는 곳)를 차리고 사준(술을 관리하는 사람)이 술과 잔을 보관하고 있다가 술(정종)을 술잔에 따르면 봉작이 전작에게 전하고 집사가 제관에게 잔을 드리는 매우 복잡한 단계를 거쳐 술이 올려지는 것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또한 마당에는 불을 밝히는 높은 화로가 있는데 나무로 삼각대를 만들고 그 위에 화로(높이 1m 20Cm 정도)를 얹어 나무를 태워 불을 밝히도록 한 조명 장치이다. 담장은 토석 담장이고 하고 있어 전형적인 사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바로 옆에는 우계이씨 감실 마을 입향 시조인 취사 이여빈 선생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건립된 제사(祭舍)가 자리하고 있다. [별묘 및 제사 사진]
4. 취사의 숟가락
취사가에는 길고 묵직한 숟가락이 있다. 취사가 생시에 사용하던 숟가락으로 400여년 동안을 보존해온 숟가락으로 선조들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둥근 부분이 길쭉하고 숟가락총이 길어 보이는 놋숟가락으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는 숟가락으로 매우 귀한 보물로 여겨져 보인다. [숟가락 사진]
5. 인수정(因樹亭)
실마을 동쪽을 휘감아 마을 우측 초입에서 멈춘 야산끝자락에 터를 잡았 다.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방형(方形)정자로 좌측은 마루칸이고 우측은 온돌방 칸반, 툇마루 반칸을 앞뒤로 놓았으며, 전(?)좌측면에는 툇마루를 내밀 고 헌함을 돌렸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이 정자는 이 여빈(李汝馪)이 1600년경 (광해초)에 건립하였다 하니 현 재의 건물은 그후 수차례 중 중건을 거치면서 조선후기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여빈(李汝馪)(1556˜1631)의 본관은 우계(羽溪)이며 호는 취사(炊沙)이다. 선조 28년(1605)에 증광시 문과에 합격하고 광해 2년 (1610)성균관전적으로 승진되었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없어 전은소를 지어 올리고 궐문 밖에서 복합한지 3일이 지났으나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하여 곧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며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학덕이 높 고 유집이 있어 눌은 이 광정이 행장을 찬하고 갈원 김 희주가 찬갈했다. 인조 1631(辛未)년 3월 28일에 졸하니 수76세이다. 사림(士林)에서 도계서원 에 배향하였는데 그 상향문에 힘은 무너져가는 기강을 붙잡을 수 있고 손으로 달리는 번개를 잡을 수 있다. 사나운 범이 관문을 지키니 뜻을 이루지 못했으 나 의로운 행동은 일성과 같도다. 당호인 인수(因樹)란 나무에 기대어 집 을 만들었다는 뜻과 숨어산다는 뜻도 있다.
6. 취사 종가 가는 길
영주시내 중심에서 원당로를 따라 봉화방향으로 가다가 의상로 부석방향으로 좌회전하면 보름골, 영광고등학교 앞을 지나 진우재를 넘는다. 잠시 봉화 땅을 지나기도하면서 대마산목장재를 넘고 화전리 너운티재 넘으면 또 낮은 콩밭재가 나온다. 낮은 재 네 개를 넘으면 감곡1리에 와 닿는다. 여기서 봉화 수식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낙화암천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좌회전하여 뚝방길로 접어들면 저 멀리 우측 산자락에 인수정이 보인다. 농로를 따라 인수정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인수정 좌측 골짜기 방향으로 백운당과 취사가 별묘와 종택이 보인다. 종택 주변은 얕은 계단식 논과 밭으로 이어져 있고 종택 뒤쪽에는 야산줄기로 이어져 있다. 100 여 년 전 이 종택을 지을 때만해도 주변이 온통 머루 다래덩굴로 꽉차있는 오지였다고 원로들이 전했다. 100여 년 전이 그러할 진대 취사가 살던 400년 전엔 첩첩두메산골이었을 것이다.[멀리서 본 인수정]
7.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온 종가 사람들
어느 종가든 종손과 종부의 긍지와 자부심은 대단하다. 취사가 또한 문중의 기대와 사회의 기대가 크기 때문에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임 듯한 인상이 깊다. 허물어진 담장과 깨어진 기왓장을 보면서 보존과 관리의 소홀함에 조상에 대한 미안함과 사회에 대한 부끄러움이 배어나온다. 취사가도 어느 종가와 마찬가지로 불천위 제사와 4대 봉사까지 5대 봉사를 해야 하므로 비용과 시간에 많은 애로가 있다. 종손과 종부의 솔직한 심정은 시대 변화에 따른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만 원로 종친들은 가문의 명성과 전통을 이어가려는 집념이 완강하여 당분간은 지금의 의례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종손은 원로 세대와 신세대 간의 교량 역할을 하여야 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깊은 고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취사가의 사람들은 아직도 도덕과 윤리가 살아있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 [사진 종가 전경] 3. 취사가(炊沙家)의 종부(宗婦) 취사가 15대 종부 김정필(金正必,61세)은 안동 김씨로 풍산 소산 출신이다. 14대 종부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14대 종손인 남편(珽善)은 13년 전 교통사고로 사별했다. 슬하에 아들 삼형제(16대 종손 이동하, 한화그룹 과장, 둘째 회사원, 셋째 회사원)를 두었으며 지금은 장성하여 서울 소재 대기업에 입사하여 중간 간부로 있다. 종부의 할 일은 참으로 많다. 4대 봉사에 불천위까지 5대 봉사를 하여야 하니 그의 노고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종부의 솔직한 심정은 제사도 줄이거나 통합하고 묘제도 생략하고 하였으면 좋겠지만 취사가의 어른들은 아직도 떡짐을 지고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조상을 섬긴다면서 투정 섞인 자랑을 털어놨다. 결혼 후 한 번도 감곡을 떠나지 않았다는 종부는 이 곳에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조상을 섬기며 40 여년을 살아왔다 한다. 필자가 처음 찾아간 4월18일에는 논에서 못자리 준비하다 만났고 두 번째는 불천위 제사 전 날(5.10) 부엌일에 골몰하였고 세 번째 날은 불천위 제삿날(5.11)이고 네 번 째날(5.24)은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다 만났다. 그는 자식들을 훌륭히 교육시킨 맹모 같은 분이시고 농촌을 지키는 농부이고 조상을 지성으로 모셔온 효부였다. [종가와 제사 사진]
8. 취사문집 (炊沙文集)
조선 중기의 학자 이여빈(李汝碌)의 시문집으로 6권 3책의 목판본이 있다. 증손 기정(基定)이 편집하여 1831년(순조 31년)에 간행하였으며 권두에 정중원(鄭重元), 이인(李仁), 유심춘(柳尋春)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권두경(權斗經)과 채헌징(蔡獻徵)의 발문이 있다. 권 1・2에 부(賦) 2편, 시 78수, 표(表)・책(策) 각 1편, 소(疏) 4편, 서(序) 3편, 기(記) 5편, 전(傳) 1편, 권3에 제문 3편, 행장 3편, 잡저 3편, 권 4・5에 잡저 상・하 2편, 권 6에 부록으로 연보, 행장, 가장, 만사, 뇌문, 서원봉안문, 상향축문, 묘갈명, 인수정중수기(因樹亭重修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계사춘癸巳春>을 비롯해 <제문경마포원석굴2수題聞慶馬浦院石窟二首><난리이래기근연속亂離以來飢饉連續><음증우동제우吟贈愚洞諸友> 등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읊은 것으로, 전쟁의 참상을 잘 나타내고 있어 야사로서 가치가 있다. <양선생변무소兩先生辨誣疏>는 이언적(李彦迪)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이이첨(李爾瞻)을 공박하고, 두 사람이 학계에 끼친 공로와 덕망으로 보아 문묘 종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언한 것이다. 잡저의 <용사록龍蛇錄>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1598년 끝날 때까지의 사실들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다. 궁중과 민간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을 낱낱이 기록한 뒤 그 결과를 부기하고 원인을 규명한 곳도 있어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시사잡록時事雜錄>은 상・하편에 달하는 많은 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난과 정인홍(鄭仁弘)・이이첨의 전횡, 정온(鄭蘊)・정구(鄭逑)의 학문에 대한 이야기 등, 광해군 당시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여러 가지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우록師友錄>은 스승 한우(韓佑)를 비롯해 그 제자 허충길(許忠吉), 이희득(李希得), 박승임(朴承任) 등 30여 명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 밖에 자기의 취미와 학문 연구를 표현한 <인수정서因樹亭序>・<석양와기夕陽窩記>・<취사옹전炊沙翁傳>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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