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宗家)라는 단어처럼 고풍스러운 단어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세월의 육중한 무게, 법도의 엄숙함 등은 지레 듣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우리는 흔히 종가라는 말을 들으면 커다랗고 오래된 집, 사랑방에 그득한 고서들, 넉넉하고 여유로운 뜰과 그 한켠을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장독들을 떠올린다. 종가는 현대 속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전통과 품격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랜 연륜으로 낡았어도 여전히 광휘로움을 뿜어내고 있다.
안동에는 수많은 종가가 있다. 의성(義城)김씨 내앞 종가, 의성김씨 학봉 종가, 고성(固城)이씨 종가, 안동김씨 비안공 종가, 안동권씨 부정공파 종가, 안동장씨 춘파파 종가, 광산(光山)김씨 예안파 종가, 풍산(豊山)류씨 양종가 등가는 곳마다 종가가 고풍스럽고 의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서원이 양반사회의 정신적 버팀목이라면 종가는 양반가문의 백그라운드다. 아울러 종가의 번창 여부는 그 집안의 결속력의 척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종인(宗人)들이 종가를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양반들은 가문의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인 종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집성촌을 이루고, 그 지역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영남 벼슬 중에 종손 벼슬이 최고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정2품의 지방관보다도 최하위 품계인 종9품의 세습 참봉(명문 집안의 종손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모신다는 이유로 참봉 벼슬이 제수되었다)이 더 영향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가 중에서도 큰 소리칠 수 있는 종가가 되기 위해서는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셔야 한다. 불천위 제사를 드리는 종가가 산재해 있는 안동, 그것이 바로 안동양반이 `내로라'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그렇다면 불천지위란 무엇인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덕이 높은 조상을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특별히 왕이 허가한 신위를 말한다. 그런 종가로는 안동지역에 퇴계종가, 의성김씨 내앞종가와 학봉종가, 하회 풍산류씨 종가 등이 있다. 양반사회에 있어서 종가에 대한 외경심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조상의 제사를 모신다고 종손을 사손(祀孫)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제사를 지낼 때는모든 절차를 사손이 주관한다. 지손(支孫)에게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 나도 서열에 있어서 사손을 추월하지는 못한다. 의성김씨의 경우 내앞이 큰 종가고 검제 학봉종가는 지파다. 그러나 학봉이 워낙 출중하여 내앞 사람들은 검제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우리가 큰집이다라는 우월의식으로 그것을 벌충한다. 안동에서 서후 쪽으로 들어가다보면 봉정사(鳳停寺) 입구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 한 10여 분 정도 달리면 서후면 소재지에서 약간 떨어진 금계리(검제)에 자리한 학봉종가가 눈에 들어온다. 학봉종가를 찾으니 학봉의 14대손인 김시인씨(金時寅.80)가 넓은 종택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 전 와병으로 한동안 자리보전을 했다고 하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으로 객을 맞는다.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이 양반법도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손님 맞는 품격이 유별나다. 검제종가는 400여년 전에 지어졌는데, 널찍한 마당이 고택의 품위를 한결 더해 준다. 명문의 종가는 제사도 많다. 4대 봉제사와 불천위 제사에 명절 때 치르는 제사까지 합하면 일년에 적게는 열 두어 번에서 많게는 열 대여섯 번에 이른다. 그런 만큼 종손과 종부는 몇배의 힘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특히 불천위 제사 때는 제관이 수십 명에서 많으면 백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종부의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 종가는 종부 얻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나보다.
명가는 또 혼인도 까다롭게 한다. 학봉 종가 종손에게 가문의 혼반(婚班)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주로 진성(眞城)이씨, 무실 전주(全州)이씨, 안동(安東)권씨와 혼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결혼하는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한다. 검제 종가를 뒤로 하고 하회로 향했다. 하회에는 유명한 풍산류씨의 양종택이있으니, 양진당(養眞堂)과 충효당(忠孝堂)이 그것이다. 양진당은 풍산류씨의 대종택으로 서애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의 종택이며, 충효당은 서애의 종택이다. 충효당을 찾으니 서애의 유물을 전시한 영모각(永慕閣)을 관리하는 류시주씨(柳時柱)가 반갑게 객을 맞는다. 류씨는 무엇보다 풍산류씨가 불천지위를 6분이나 모시고 있음을 먼저 자랑한다. 입암(立巖) 류중영(柳仲ぃ), 귀촌(龜村)류경심(柳景深),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수암 류진 등이다. 조선조 문과급제자는 21명이나 배출됐다고 한다. 종가를 중심으로 한 양반가문의 자부심, 이는 안동지역에 있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속적인 부가 주는 가치와 또 다른 명예의 척도가 되고 있다. 그래서 각문중들은 자손을 모아 집안 내력을 가르치고 그 뿌리를 찾아보는 행사를 연례적으로 치르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종가를 중심으로 한 안동 양반 사회에 부정적 측면도 없지않다. 안동대 국학부 임재해 교수는 "안동에는 가문은 있지만, 지역은 없다"라고 거침없이 표현한다. 문중 행사에는 유력 종인들이 재정적인 지원을 다투어하면서도, 지역의 행사에는 모른 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동지역은 아직까지 씨족 공동체는 잘 이루어지는데, 지역 공동체는 잘 형성되지 않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안동 지역의 종가를 중심으로 한 씨족 공동체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세태 탓으로 종손보다 권력과 재력이 있는 후손이 각광받는 경향 등이 그것이다. 급격히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체통을 우선하던 안동 양반들과 종가의 영예도 이제 서서히 빛 바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이번 답사에서 얻은 또 다른 감회였다. [1997. 8. 2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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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느티나무 그늘
글쓴이 : 느티나무 그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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