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작업 중 사리 장엄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백제의 아름다움에 경탄과 존경을 보낸다.
백제의 아름다움은 지난 50년 동안 다섯 차례의 발굴 덕분에 우리 앞에 왔다.
1959 서산마애불, 1971 무령왕릉, 1993 금동용봉대향로, 2007 왕흥사 사리함, 2009. 1 익산 미륵사에서 출토된 순금사리호(높이 13Cm)이다.
6층까지 간신히 남아있던 미륵사 서탑이 붕괴 위험에 놓여 해체 수리하던 중 1층 사리공에서 출토된 이 환상적인 사리호는 말할 수 없이 화려하면서도 고귀한 품위가 있어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둥글넙적한 뚜껑이 달린 듬직한 기형의 몸체에는 아래위로 가지런한 연판 무늬를 두르고 가운데에는 물고기 알처럼 생긴 어자문(魚子紋)과 인동꽃의 넝쿨무늬를 빼곡히 넣었다. 그리고 석 장으로 구성된 연꽃잎을 주문양으로 삼아 당당하면서도 시원스럽게 새겼다.
무늬의 구성이 치밀할 뿐만아이라 점, 선, 면의 새김 기법도 더할 나위없이 능숙했다.
사리공에는 194자의 순금사리봉영기도 들어있었다. 이에 의하면
무왕 40년(639)정월 29일에 좌평(佐平) 사택덕적(沙宅積德)의 따님인 백제 왕후가 이사리를 모셨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하였으니 앞뒤 사정을 정리해 보면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착공되었으나 거대한 탐을 만드는 동안 선화공주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무완이 새로 맞이한 후비(사택덕적의 딸)가 이 사리호를 봉안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공에는 글자를 새긴 얇은 금판 등 탑의 안전과 개인의 복을 기원하면서 넣은 각종 진단구(鎭檀具)가 400여점이나 들어있었다. 그 중에는 고관들이 자신의 머리에 꽂았던 은제 관식(冠飾)을 즉석에서 넣은 것도 있으니 봉안식 또한 사리호 못지않게 화려했을 것이다.[보충 유홍준의 국보순례 72/1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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