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 거묵골(태장2리) 「식암 황섬 신도비」 ‘경북도문화재자료’로 지정
황섬은 풍기 희여골 출신으로 대사성, 부제학, 대사간 역임
비문 남태저(한성부우윤) 짓고, 글씨 강세황(서화가) 쓰다.
신도(神道)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신도비(神道碑)란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된 사람에 대해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82-1(거묵골, 여우생태관찰원 인근) 소재 ‘식암 황섬 신도비(息庵 黃暹 神道碑)’가 2020년 11월 26일 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이 비석은 식암 황섬(1544-1616)이 세상을 떠난 지 159년 뒤인 1775년(영조51)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데 귀부(龜趺, 거북받침돌), 비(碑), 가첨석(加檐石, 지붕돌)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높이 162㎝, 너비 89㎝, 폭 25.5㎝의 크기이며, 비문은 남태저(南泰著, 한성부우윤)가 짓고 두전과 비문의 글씨는 강세황(姜世晃, 조선문신, 서화가)이 썼다. 비문은 해서체로 되어 있으나 아랫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이 비석은 비록 박락(剝落)된 부분이 많지만 강세황의 글씨로 새겨진 보기 드문 형태의 신도비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로 지정됐다.
식암 황섬은 누구인가?
황섬은 1544년 풍기읍 백1리(희여골)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명(景明)이고, 호는 식암(息庵)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어려서부터 사리에 밝게 통달하고 뛰어나서 큰 그릇이 될 도량과 소질이 있었다. 명종 19년(1564년)에 생원에 합격하고, 명종 22년(1567년)에 어머니 정부인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선조 3년(1570년) 명경 갑과에 급제하여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제수받고 해운판관(海運判官), 형조·호조·예조랑(郞), 황해도사(黃海都事),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했다. 이후 도승지, 병조참의, 대사성, 부제학, 대사간 등 조정의 요직을 역임하고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낙향하여 희여골에서 일생을 지냈다.
황섬의 고향 희여골에는 그가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수락당’이란 학당이 있다. 이름의 뜻은 광해군이 왕이 되자 고향으로 내려온 황섬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목숨만 온전히 돌아왔다는 유래를 따 목숨 수(壽)와 벼슬을 떠나 시골에서 추수의 풍족함을 기다리는 것이 즐겁다는 즐거울 락(樂)을 합친 것이다. 수락당(壽樂堂)은 2020년 2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바 있다.
식암(息庵) 황섬(黃暹)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原文 公諱暹字景明號息庵。黃氏貫昌原。麗代有諱石柱。起家爲大相。自是世襲冠冕。入我朝有諱貴卿贈戶 曹判書。諱希聖贈贊成。諱士祐文科兼吏判號慵軒。卽公高曾祖三世也。-中略-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南泰著撰。
역문 공의 이름은 섬이요, 자는 경명이며, 호는 식암이다. 황씨의 관향은 창원이요, 고려 때 석주가 벼슬에 올라 입신출세하여 대상이 되었다. 이로부터 고위 고관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귀경이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희성이 찬성에 증직되고, 사우가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를 겸임했는데 호는 용헌이라 하니 곧 이분들은 공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3세이다. -중략-
가선대부 품계로 사헌부대사헌인 남태저 지음.
이원식 시민기자
사진설명
1-황섬 신도비 보호각
2-보호각 안의 신도비
3-신도비 가까이 보기
4-황섬이 후학을 가르치던 수락당
식암 황섬 신도비명(息庵 黃暹 神道碑銘)
서문을 병기함 공의 이름은 섬(暹)이요, 자(字)는 경명(景明)이며, 호(號)는 식암(息庵)이다. 황씨의 관향은 창원이요, 고려 때 석주(石柱)가 벼슬에 올라 입신출세하여 대상(大相)이 되었다. 이로부터 고위 고관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귀경(貴卿)이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고 희성(希聖)이 찬성(贊成)에 증직되고, 사우(士祐)가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임했는데 호는 용헌(傭軒)이라 하니 곧 이분들은 공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3세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응규(應奎)이며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동지돈영(同知敦寧)에 이르렀고 호는 송간(松澗)인데 공의 현달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여흥 이씨(驪輿李氏)이며 의빈도사 수려(壽旅)의 따님이다 가정 갑진(1544)년 10월에 서울 집에서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사리에 밝게 통달하고 뛰어나서 큰 그릇이 될 도량과 소질이 있었다. 겨우 이를 갈 무렵에 어떤 어른이 장한의 ‘강동으로 돌아가는 그림’에 시를 지으라고 명하자, 즉시 대답하기를 “호수에 배 띄워 돌아가 치이(鴟夷) 배우고자 할 새, 가을바람에 돛은 급하고 해는 저물려는 때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경물은 그릴 수 있으나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고상한 마음은 그리기 어렵구나. 사람들이 모두다 그의 조숙함을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약포(藥圃) 정탁(鄭琢) 공에게 수업하여 추앙과 존경을 받으며 갑자(1564)년에 생원에 합격하고 정묘(1567)년에 어머니 정부인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선조 경오(선조3)년 명경(明經) 갑과(甲科)에 올라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제수 받고 해운판관(海雲判官), 형조 ·호조 ·예조랑, 황해도사(黃海都事), 성균관 전적(典籍)을 역임하고 사성에 이르렀다. 정축(1577)에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나갔으며 거기에는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신사(辛巳)년에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고 헌납(獻納), 사간(司諫), 사헌부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역임하고, 계미(1583)년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이때 동서로 처음 분당이 되어 주상께서 세 신하를 내치고 계속해서 또 김응남(金應南)을 관직에서 내몰 것을 명하였는데 공이 간관(諫官)으로서 삼사(三司) 연명으로 이를 잠재우고자 주청하다가 이에 연좌되어 사도(司導) 사섬(司贍) 종부(宗簿)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전직되고 정해(1587)년에 사간에서 승정원(承政院)으로 발탁되었다. 일찍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지금에 당면한 급무는 인재를 수습하는데 있으니 류성룡(柳成龍)의 밝음과 총명함, 김우옹(金宇顒)의 고아함과 해박함, 이기(李墍)의 절약과 검소 같은 친은 모두 다 기대할 만한데, 오랫동안 외직으로 나가 있어 중론이 모두 안타깝다고 일컫고 있습니다.” 기축(1589)년에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신묘년에 병조참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조신(平調信)이 서한을 보내왔는데 말이 심히 모욕적이었다. 거기에 ‘일본은 명나라와 더불어 귀국에 있어서 좌우 손과 같다'는 말이 있었다 공이 명에 응하여 답장을 만들었는데 요약하면 “대명은 하나의 계통으로 온 천하가 신민이거늘 우리 조선과 일본은 나란히 북면(北面)을 하여 당상(堂上)과 섬돌아래처럼 현격한 거리가 있다. 어찌 양손으로 비교를 하는가. 오직 당연히 제후의 법도로 서로 힘쓰고 영구히 변하지 말을 지니, 어쩌자고 홀로 화외(化外)로 자처하여 큰 나라와 더불어 원수가 되려고 하는가?” 말의 뜻이 몹시 준엄하여 조정에서는 이를 의연하게 생각했으나 쓰이지는 않았다. 임진(1592)년에 사은사로 차출되었다가 연로한 어버이로 인하여 특별히 바뀌어졌다. 4월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왕을 모시고 피난을 하다가 모운사(募運使)에 차출되었는데 군사들이 실로 이에 힘입어 부족함이 없었고 승문원의 부제조를 겸하였다. 계사(1593)년에 호조참의로서 어가를 따라 해주에 머무를 때 시급한 일을 조목별로 써서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장수의 재목을 뽑고, 병사의 수효를 정하고, 병기를 주고, 군량을 염려하여 챙기게 하고, 둔전 세금의 과도한 징수, 소금의 이권에 대한 전매권의 남용 등이다. 마침내 서북 변방에 대한 근심을 매듭짓고, 수일을 지내다 또 8조소를 올려 전시에 수비하는 요점을 갖추어 논하니, 주상께서 모두 훌륭하다고 답하고 소에 대한 회답을 말씀하시기를 “황모(黃某)의 상소는 오늘날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 절실하니 작은 책자에 특별히 써서 제일 첫째 왕명으로 거행토록 하라.”고 하였다. 갑오(1594)년에 어버이를 보살피고자 남쪽 고향으로 돌아 왔다가 다시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또 소를 올려 “재정이 텅 비어 백성이 곤궁한 상황과 사신을 받드는데 제공되는 경비와 전쟁에 세운 공로로 고을 수령에 나가는 폐단, 당상, 당하낭직은 오래 있는 것이 마땅함'을 논하고 또 “비변사의 관원이 일없이 열 지어 앉아 있는 것은 육조가 각 관아에 앉아 있는 것만 못하다고 하고. 변방에서 사실과 다르게 공로를 아뢰는 것은 학문상 명망이 있는 보좌관을 기용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고, 마지막에 제왕의 마음 쓰는 법과 경연의 강학(講學)에 대하여 반복하여 힘써 설명했는데 말이 심히 적절한지라 주상께서 뛰어난 비답으로 가납하였다. 병신(1596)년에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안동부사가 되었고, 무술년에 송간공의 상을 당하여 예에 따라 장사를 치르고 슬픔을 극진히 했는데 노쇠한 몸으로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 3년 참상을 마진 뒤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의 참의, 대사성, 부제학, 대사간에 임명되고 임인(1602)년에 주역(周易) 교정청(校正廳) 당상관으로 차출되었고 호성원종일등(扈聖原從一等)으로 녹훈되었다. 병오년에 대간으로서 입시하여 아뢰기를 “지금 난리가 비록 평정되었으나 아직 서울에는 4개 학교가 세워지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무(武)를 숭상함에 여러 고을에서는 모두 무학(武學)을 설치하고 먼 지방에서는 양가집 자제들이 평소에 시험하고 보는 것이 궁시나 총검에 불과하니 예의와 겸손, 시서(詩書)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훈도를 다시 두어 가르치고 나아가는 방향을 설정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장의 부족이 현재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무과에 응시한 수가 천백에 이르러도 그 재능으로서 사람을 쓰지 않고 청탁하는 서한을 통하여 차출되고 추천되니 세도가 없는 먼 지방 출신자는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재주를 지녔다 해도 자기의 재능을 보일 기회가 없습니다. 모두 서울 안에 모이게 해서 다방면으로 무예를 시험하여 그 재능을 적절히 쓸 것 같으면 어찌 인재의 부족이 걱정되오리까?” 하였다. 겨울에 도승지로서 호조참판에 특진되었고 정미(1607)년에 예조 이조 참판을 배수하고 대사헌에 세 번 임용되었는데 이때 상감이 바야흐로 마음에 들어 임용하였으나 조정의 상황이 갈라지고 무너져 시기하고 삐걱거림이 점차로 누적되어 공이 보기에 세상의 도리가 날로 그르쳐 가니 벼슬살이가 즐겁지 않았다.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정승 류영경(柳永慶)을 공격하자 기회를 틈타 화를 즐기는 무리들이 선동을 고취하며 일어나 한 시대를 기울게 하여 무너뜨리고자 하니 공이 큰 화가 장차 일어날 것을 알고 더욱 세상에 뜻이 없었다. 무신(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고 이미 빈소가 차려지자 드디어 장남 병조좌랑과 더불어 남쪽 고향으로 돌아오니, 얼마 안 되어 류정승은 유배되어 죽고 한때의 높은 벼슬아치들이 혹은 주살되고 혹은 귀양 보내졌으나 공은 삭탈관직에 그칠 뿐이었다. 풍기는 대대로 살던 고향이라 선대에서 살던 집을 고쳐서 거처하니 계씨 승지공(承旨公)과 더불어 개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즐겁고 화목하게 생활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병진(1616)년 4월에 평소 거처하던 방에서 임종하니 향년이 73이었다. 겨울에 거먹골 간(艮)방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에 나아간 것이다 인조(仁祖)가 즉위한 초기에 관직이 복구되고 이조판서의 증직이 내렸다. 공은 성질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내면은 강직하고 외면은 온화하며 계획과 생각은 두루 신중했고 일은 구차함이 없었다. 이미 가정교육에 충실하고 또한 스승에게서 받은 힘을 밑천으로 글을 읽는 데는 경전을 귀결로 삼고 묻고 배우는데 길이 분석함을 요체로 삼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로우며 친인척간에 화목하게 하는 것을 행동의 근원으로 삼아. 임금을 받들어 높이고 백성을 두둔하여 보호하는 방법을 발휘하였다. 조정에 선지 40여 년을 한 마음으로 공무를 위해 봉사하고 일에 따라 생각한 바를 다 말하여,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고 조정의 기강을 바르게 함을 근본으로 하였다. 세도가들이 권력을 휘두를 때도 말은 거슬러 노엽게 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고, 조장의 형편이 어그러지고 분열되어 오직 바른 것을 헐뜯기를 좋아하나 공은 전곡(錢穀), 군사, 형벌과 상, 교화에 대해서는 조목을 갖추어 지시하고 설명함에 각기 그 요점을 찌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교육에 관한 행정을 개선해야 한다는 방책과 장수 될 인물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 전란 뒤의 절실한 정무에 관계가 되니 참으로 정치의 대본을 익숙하게 통달하여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은퇴 생활에 있어서는 도서가 꽉 찬 방에서 깊이 사색하고 연구하였고, 양몽재를 지어 후생들을 권장하고 깨우치니 원근의 인사들이 그리워하고 따르며 유학에 관련되는 일이면 반드시 와서 질정을 받았다. 어떤 때는 밭을 갈고 고기 잡는 데에 정을 부치고 시와 술로 회포를 풀었으나, 시대를 근심하고 진심을 다하는 뜻은 일찍이 하루도 잊은 적이 있었다. 이때 이이첨이 뜻을 이루어 연달아 큰 송사를 일으켜 계속해 영창대군의 사건이 있게 되니, 공은 먼저 조정의 옛 신하로서 질책하는 기록에 이름이 들어 있는지라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우울해서 스스로 상심하여 ‘부운탄(浮雲歎)’ 한 절구를 지어 뜻을 부치니 거기에 “밝은 해의 광명은 원래 스스로 있으나 뜬구름은 모였다가 사라지니 매우 덧없구나.”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학문의 어려움은 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 한 여울을 겨우 지나자마자 또 한 여울이 있으니 진실 된 공부는 다만 ‘성성조조(惺惺懆懆)’ 4글자 위에 있을 따름이다.”고 하고 소병명(素屛銘)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한다. 지은 글은 전아하고 평담하며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으며, 시는 성정에 발하여 꾸밈이 없는 타고난 그대로였다. 식암집(息庵集) 몇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정부인 이씨(李氏)는 종실 풍성군(豊城君) 전(銓)의 따님이며 성종의 4세손이다. 부인의 도리에 흠이 없었고 규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는데 공보다 31년 먼저 임종했으며,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유중(有中)으로 병조좌랑이며 도사(都事) 신진(申津)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3남을 낳으니 입진(立震), 입경(立敬), 입원(立遠)이다. 다음은 유길(有吉)이니 해주판관이며, 판관 한효윤(韓孝胤)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3남을 낳으니, 입영(立潁)은 부장(部長)이고, 입신(立信)은 문과 급제하여 현감이며, 입현(立顯)은 찰방(察訪)이며 1녀는 사위가 성취학(成就學) 현감이다. 다음은 유첨(有詹)이니 생원이고 초취는 판서 이성중(李誠中)의 따님이며 재취는 무공랑(務功郎) 강전(姜琠)의 따님인데 자식을 두지 못하여 입현(立顯)으로 뒤를 잇게 하였다. 두 딸은 군수 심억(沈檍)과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맏사위는 송효조(宋孝祚)로 왕자사부인데 아들 길용(吉龍)은 생원이며, 딸 셋은 별좌 홍류(洪琉)와 김명선(金命善), 판관 최백년(崔柏年)에게 출가했다. 둘째 사위는 금부도사 김중겸(金重謙)인데 두 아들은 봉래(鳳來), 봉의(鳳儀)이며 딸 넷은 생원 박조(朴肇)와 권계흥(權啓興), 이항길(李恒吉), 진사 허겸(許謙)에게 출가했다. 셋째 사위는 정랑 심관(沈關)인데 아들 제문(齋支)은 목사이다. 넷째 사위는 윤상원(尹祥元)인데 두 아들은 지화(志和)와 극화(克和)이고, 딸 둘은 봉사 박진악(朴振岳)과 류재기(柳再起)에게 출가했다. 내외 증손과 현손이 많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숙종조 갑신(1704)년에 이르러 많은 선비가 우곡(愚谷)에다 서원을 세우고 공과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창석(蒼石) 이준(李埈), 죽일(竹日) 김광엽(金光燁)을 나란히 제사지냈다. 공이 작고한지 150년인데 아직 묘소에 빗돌을 세우지 못하였다. 후손이 비석을 마련하고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기에 스스로 돌아보니 후생의 하찮은 배움으로 어찌 공의 공덕을 드러내리오. 그래서 여러 번 사양했으나 수용되지 않아 드디어 이에 행장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는데 문득 느끼어 흥기되는 바가 있다. 간교한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힘에 그 정상을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신묘년 답서에서 역(逆)과 순(順)의 분수를 밝게 설명했으니 어찌 그토록 위대했던가. 조정에서는 이제 막 왜구에 대비했으나 계책을 올려 서북쪽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고했으니 어찌 그토록 현명하신지. 류영경 정승은 곧 절친한 인척이었으나 화가 닥침에 미쳐서는 초연히 미리 떠나 있어 홀로 여파를 면했으니 어찌 그토록 기미에 밝으셨는지. 이를 미루어 보면 공의 평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가정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이에 따라 문무의 재략 갖추어 세상의 유능한 신하가 되있다 신하로서 힘써 임금을 섬겨 정성을 다해 글을 올렸다 교화를 근본으로 삼고 군사문제까지 언급했다 왕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참으로 실행할 만하다 특별히 아경(亞卿)에 승진시키니 진로가 바야흐로 형통하였다 성군은 죽고 혼군이 즉위하니 소인들은 기뻐날뛰나 군자는 조짐을 알고 몸을 단속하며 어리석은 척 하였네 세상의 화가 휘몰아 칠 때 고상한 자취는 초연했다 좌우에 도서를 두고 큰 사람은 은거 생활을 하였다 세상을 구하는 학문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가르쳤네 수풀 언덕을 즐기며 그 영예 길이 끝마쳤다 굽힘은 잠깐, 폄은 오래니 이름과 도를 온전히 했다 이 훌륭한 행적을 보고 누가 공경하지 않으리요.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인 남태저(南泰著) 지음.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인 남태저(南泰著) 지음.
息庵 黃暹 神道碑銘 幷序
公諱暹字景明號息庵。黃氏貫昌原。麗代有諱石柱。起家爲大相。自是世襲冠冕。入我朝有諱貴卿贈戶曹判書。諱希聖贈贊成。諱士祐文科兼吏判號慵軒。卽公高曾祖三世也。考諱應奎文同敦寧號松澗。以公貴贈吏曹判書。妣貞夫人驪興李氏。儀賓都事壽旅之女。以嘉靖甲辰十月。生公于京第。自幼明達超詣有器度。甫齔有長者命題張翰歸江東圖。卽對曰泛湖歸去學䲭夷。帆急秋風日暮時。歸鄕物象可摹也。遯世高心難畫之。人皆奇其蚤成。受業于藥圃鄭公琢。爲所推重。甲子中生員。丁卯居貞夫人憂。廬墓以終制。穆陵庚午。登明經甲科。授漢城參軍。歷海運判官,刑戶禮郞,黃海都事,成均典籍至司成。丁丑出守舒川。有去思碑。辛巳入爲司諫院正言。歷獻納司諫。憲府則持平,掌令,執義。癸未兼知製敎。時東西始分。上竄三臣。繼有金應南黜補之命。公以諫官合啓請寢。仍坐遞。轉司䆃,司贍,宗簿,司僕寺正。丁亥由亞諫擢銀臺。嘗於經筵啓曰當今急務。在收拾人才。而如柳成龍之淸敏。金宇顒之雅博。李墍之節儉皆可仗。而久於外。物論稱惜云。己丑左牧星州。辛卯入爲兵曹參議。時馬島主平調信送書。辭甚嫚。有日本與大明。於貴國如左右手之語。公應製修答。略曰大明一統。率土臣民。弊邦與日本。比肩北面。堂陞懸絶。豈兩手比。惟當侯度相勉。永久無替。柰何獨以化外自處。欲與大邦爲讎。辭義嚴截。朝廷毅之而不能用。壬辰差謝恩使。以親老特遞。四月倭賊八寇。扈駕西行。差募運使。軍實賴不乏。兼承文副提調。癸巳以戶曹參議。隨駕駐海州。上時務疏。言擇將材,定兵額,授戎器,慮軍餉。歷陳屯稅之過徵。鹽利之濫榷。終以西北邊憂結之。居數日又疏陳八條。備論戰守之要。上皆優答。命議處備局。回啓言黃某之疏。皆切當今之務。特書小冊。以爲擧行第一策。甲午省覲南還。復除兵曹參議。又疏論財匱民困之狀。奉使供億之費。軍功出宰之弊。堂郞久任之宜。且言備堂之無事列坐。不如六曹之各坐其曹。邊閫之奏功失實。莫若幕佐之擇任文望。末乃以帝王心法。經筵講學。反復陳勉。言甚剴切。上優批嘉納。丙申爲養補安東府使。戊戌丁松澗公憂。服禮致哀。不以衰年少懈。服闋拜吏戶禮兵曹參議,大司成,副提學,大司諫。壬寅差周易校正廳堂上。錄扈聖原從功一等。丙午以大諫入侍。啓曰今者亂離甫定。京城未建四學。國家尙武。列邑皆設武學。外方良家子弟。平居試閱。不過弓矢銃劒。至於禮讓詩書。不知爲何事。請京外刱修學校。復置訓導。俾爲敎迪之方。又啓曰將才方患闕乏。而武科多至千百。調用不以其才。差擬由於請簡。無勢遐遠之人。雖韓白之才。無以自衒。若令咸會京中。多方試藝。適其才而用之。何患乏人乎。冬由都承旨特陞戶曹參判。丁未拜禮曹,吏曹參判。拜大司憲者三。時上方嚮用。而朝象分潰。猜軋漸積。公見世道日非。不樂仕宦。及鄭仁弘疏攻柳相永慶。乘時樂禍之徒。鼓煽而起。必欲傾陷一代。公知大禍將作。益無意於世。戊申宣廟昇遐。旣殯遂與長男騎省郞南歸。未幾柳相竄死。一時朝紳或誅或貶。公則罰止削職而已。豐是世鄕。修葺先廬而居之。與季氏承旨公隔溪相從。優游湛樂。以畢餘齡。丙辰四月。易簀于正寢。享年七十三。冬葬于墨洞負艮之原。從先塋也。仁廟改玉之初。追復官爵。贈吏曹判書。公性質溫粹。內剛外和。計慮周愼。事無苟且。旣服家庭之訓。又資師承之力。讀書以經傳爲歸。問學以窮格爲要。原之以孝友婣睦之行。發之爲尊主庇民之道。立朝四十餘年。一心奉公。隨事盡言。必以格君心正朝綱爲本。權貴用事。言不避觸忤。朝象乖裂。惟好惡是公。至於錢穀甲兵刑賞敎化。指陳條具。靡不各臻其要。學政修擧之謨。將才培養之說。俱係亂後之切務。眞可謂練達治體。不負所學也。及其退居也。一室圖書。沈潛講究。作養蒙齋。奬諭後生。遠近嚮慕。事關斯文。必就質焉。有時耕漁托契。詩酒散懷。然憂時惓惓之意。未嘗一日忘于中。時爾瞻得志。連興大獄。繼有永昌之事。公以先朝舊臣。名在譴籍。未得一言而鬱鬱自傷。作浮雲歎一絶以遣志曰。白日光明元自在。浮雲開閉苦無常。嘗曰爲學之難。難於上水。一灘纔過。又有一灘。眞實工夫。只在惺惺慥慥四字上而已。作素屛銘以自警。其爲文典雅平淡。華實粹如。詩則發諸情性。天然去飾。有息庵集若干藏于家。貞夫人李氏宗室豐城君銓之女。成廟四世孫也。婦道無缺。壼治有法。先公三十一年逝。有三男四女。長曰有中卽騎省郞。娶都事申津女。三男立震,立敬,立遠。曰有吉海州判官。娶判官韓孝胤女。三男立穎部將,立信文科縣監,立顯察訪。一女成就學縣監。曰有詹生員。娶判書李誠中女。無子以立顯爲后。二女沈檍郡守,李時白延陽府院君。女長曰宋孝祚王子師傅。一男吉龍生員。三女洪鎏別坐,金命善,崔栢年判官。曰金重謙禁府都事。二男鳳來,鳳儀。四女朴肇生員,權啓興,李恒吉,許嵰進士。曰沈關正郞。一男文牧使。曰尹祥元。二男志和,克和。二女朴振岳奉事,柳再起。內外曾玄多不能錄。至肅廟甲申。多士建書院于愚谷。與柳謙庵雲龍,李蒼石埈,金竹日光燁並享焉。公沒後百五十年。墓未有顯刻。後孫伐石謀之。屬筆于余。自顧後生蔑學。何足不杇於公。累辭不獲。則遂乃按狀敍次。而抑有所興感者。黠蠻猾夏。情狀叵測。而辛卯報書。昭陳逆順之分。何其偉也。朝廷方備南虞。而綢繆之策。惓惓於西北。先事之圖。何其明也。柳相永慶卽公切姻。而其及禍也。超然先去。獨免於餘波。何其幾也。推此而可以得公之平生矣。銘曰。
服訓于家。師敎是因。文猷武略。爲世材臣。羈紲著勞。函牘效誠。本乎敎化。達于甲兵。王曰乃言。可底于行。特躋亞卿。晉塗方亨。聖陟昏繼。時事睢盱。君子知幾。斂身若愚。世禍駸駸。超然高躅。左圖右書。碩人薖軸。需世之學。惠我羣蒙。樂哉林丘。厥譽永終。乍屈長伸。名完道全。孰不起敬。視此大鐫。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南泰著撰。
아랫부분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접촉으로 마모가 심하고 윗 부분은 비교적 잘 보인다.
지금 순흥 우종복원, 여우생태관찰원 주차장 앞에 있는 비각이 황섬의 신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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