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형상이 용(龍)이 누워(臥)있는 것 같아 와룡골(臥龍谷)
우리마을탐방[209] 봉현면 대촌1리 ‘와룡골’[2018.7.9]
경북북부 유일의 ‘신석기시대 야외노지’ 발굴
만복운흥(萬福雲興)의 풍요로운 마을 ‘와룡골’
와룡골마을 전경 |
우리, 120살까지 살 수 있을까 |
오랜 시집살이 친구 |
봉현면 와룡골 가는 길
대촌1리 와룡골은 풍기IC 서편에 있다. 영주에서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풍기IC 방향으로 내리면 이 지역이 바로 대촌1리이다. 와룡골은 봉현초등학교 뒤쪽으로 보이는 마을이다. 지난 9일 와룡골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장진선 이장, 박치환 노인회장, 최봉순 부녀회장, 김기옥 할머니, 권순분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와룡의 전설과 대촌의 내력을 듣고 왔다.
와룡산 |
역사 속의 와룡면 대촌리
대촌리 지역은 조선 때부터 풍기군에 속해 있었다. 풍기의 옛 이름은 신라 때는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태종13년(1413)에 기천현(基川縣)이 됐다가 1450년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1700년)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와룡동면(臥龍洞面) 대촌리(大村里)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풍기군 와룡면(臥龍面) 대촌리가 됐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할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영주의 옛이름)을 통합하여 영주군이라 하고, 풍기군의 와룡면과 노좌면(魯佐面)을 통합하여 봉현면(鳳峴面)이라 했다. 봉현이란 지명은 이때 처음 생겼는데 당시 이곳 유지들이 의논하여 히티재 중간쯤에 있는 봉정지(鳳停地)에서 봉(鳳)자를 따고, 여현(礪峴.히티재의 옛이름)에서 현(峴)자를 따 봉현면(鳳峴面)이라 이름지었다. 1930년경 대촌1,2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의주’바우 |
와룡골의 지명유래
양지마 쪽에서 용강등을 바라보면 와룡의 모습이 보인다기에 박치환(68) 노인회장과 뒷산에 올랐다. 용머리는 대촌들 앞에 있고, 용목이 길게 이어져 있다. 용등은 높이 솟아 삼각형 산봉우리를 이루었고 용등에서 낮아진 허리와 꼬리는 한천리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완연한 와룡의 모습을 갖췄다. 또 용머리 앞에 여의주가 있다기에 다시 박 회장과 차를 타고 용머리 앞 가까이 갔다. 용의 턱 밑에 집채만한 바우가 있다. 옛사람들은 이 바우를 ‘여의주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아, 누가 이 형상을 보고 와룡(臥龍)이라 했을까?” 궁금해 졌다.
박치환 노인회장은 “아마도 1600-1700년경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 용이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恰似)하다 하여 와룡(臥龍)이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고 말했다.
대촌리 한복판을 흐르는 석평천(碩坪川)을 중심으로 북쪽 산기슭을 양지마라 하고 남쪽을 음지마라 했다, 또 학교 뒤 둔덕을 방아두들이라 하였고, 동편 회나무고개에는 영등바위가 있어 영등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와룡골 표석 |
만복운흥(萬福雲興)의 대촌리
대촌은 큰 대(大)자에 마을 촌(村)자를 쓴다. 마을이 크다는 뜻이다.
와룡마을 초입에 2010년 세운 표석이 있다. 「만복운흥(萬福雲興) 대촌리」라고 새겨져 있어 눈길은 끈다. 그 내력을 물었더니, 장진선 이장은 “어릴 적 선친으로부터 들었다”며 “천재운소(千災雲消) 만복운흥(萬福雲興)에서 나온 말로 ‘모든 재앙은 구름이 사라지듯 하고, 만복은 구름이 일 듯 몰려온다’는 뜻이다. 즉 모든 복이 구름처럼 창성(昌盛)하라,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박치환 노인회장도 “선조들의 ‘만복운흥’의 기원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다”며 “예전에 가난한 산전(山田) 농업에서 고소득 과수(果樹) 농업으로 바뀌었고, 1935년에 설립된 봉현초가 자연의 품에서 행복역량을 기르는 명품학교로 발전했다. 또 1952년 대촌교회 설립, 2006년 중앙고속 풍기나들목 개통, 2007년 풍기인견단지 대촌리로 이전 등 만복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말했다.
장영숙(76) 노인회부회장이 쪽지에 적어 온 마을의 내력에 보면 「전직 봉현초 교사이시고 이장을 지내셨던 故 장홍규(張弘圭,현 里長부친) 어르신 말씀에 ‘대촌리는 뒤로 용강등이 둘러있고, 방아두들이 앞을 지켜 부촌(富村)이라’불렀다 면서 ‘마을이 배 형국인데 큰 전나무가 동네 복판에 있어 돛대 역할을 하다가 지금은 교회종탑이 우뚝 솟아 마을 지켜주고 있어 오래오래 창성할 마을’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적었다.
대촌리 신석기시대 유적
아득한 옛날(신석기시대:기원전 6,000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경북 북부지역 최초로 2004년 대촌1리 속칭 방아두들에서 발굴·조사됐다. 동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대촌리 유적은 문화마을 조성(2004) 사업 때 그 모습이 드러났다.
이미 훼손 부분이 많아 야외노지(野外爐址:취사나 난방을 위해 불을 피운 자리) 1기와 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만이 조사됐다. 야외노지의 경우 전체 형태는 원형(圓形)이며 깬돌을 둥글게 깔아 만들었다. 박치환 회장은 “오래 전 과수원 배수로 공사 때 토기, 숟가락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며 “대촌리 주변 지역에는 고분, 고려장 등이 산재해 있어 이 주변에 ‘고대왕국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일제와 6.25 겪은 어머니 세대
와랑골에서 태어나 지금도 와랑골에서 살고 있는 김기옥(92) 할머니는 “살아온 지난 날 이야기를 다 하려면 밤을 새야한다”면서 자리에 누우시더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는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신다. 김 할머니는 1926년 와룡골에서 5남매 막내딸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가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 밑에서 컸다. 할머니는 “당시는 모두 못살았다”면서 “양치는 손가락에 소금 묻혀 우물우물 대충했고, 짚신도 없어 남이 버린 헌 짚신을 신고 다녔다. 10살 무렵 유전리에 사는 언니집에 갔더니 언니 시아버지께서 짚신을 삼아주셨는데 그게 첫 내 신발이었다”고 말했다. 16살 때 이웃 아저씨의 중매로 한마을에 사는 5살 위 신랑을 만났다. 딸4, 아들1를 낳았다. 내 나이 36살 때 남편은 논 3마지기만 달랑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살길이 막막해 겨울철에는 묵장사를 했다”며 “딸 넷 데리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와야 묵장사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덕에 5남매 모두 봉현초등학교 졸업 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권순분(88) 할머니는 6.25 이야기를 했다. “음력 5월 1일 첫 아이를 출산하고 9일만에 전쟁이 일어나 핏덩이를 안고 피난길에 올랐다”면서 “처음에는 잠시 숨어있다 돌아올 작정이었으나 안정면 여륵리, 문수면 무섬으로 이동하는 도중 포격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는 남으로남으로 피난을 가게 됐고, 가다 보니 대구를 지나 청도까지 갔다 왔다”고 말했다.
와룡골마을 사람들 |
와룡마을 사람들
권오훈 씨 |
기자는 탐방 2일전날인 7일 와룡골에 먼저 가봤다. 봉현초 교문 앞에서 권오훈(71) 씨를 만났다. “와룡이 어디에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권 씨는 한천리 방향 도로따라 300m가량 올라가서 “저기가 용머리이고 그 뒤로 용목이 길게 뻗어있고, 용등은 불룩 솟아 산봉우리가 됐다”고 가르쳐 줬다. 권 씨는 “자세한 유래나 전설은 장진선 이장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 길로 마을 회관에 가서 김기옥 할머니의 짚신 이야기, 권순분 할머니의 6.25 이야기, 김순희(92) 할머니의 봉현사과 이야기, 김중남(91) 할머니의 방아두들 이야기, 장덕노미(89) 할머니의 일본에서 태어난 이야기 등 옛날 이야기를 듣다보니 점심때가 됐다. 할머니들이 “반찬은 없지만 점심 같이 먹자” 해서 힘들게 차려주신 점심을 함께 먹게 됐다.
탐방날(9일)은 비가 많이 왔다. 이날 회관에는 장진선 이장을 비롯한 박치환 노인회장, 최봉순(65) 부녀회장, 이종남(64) 전 부녀회장, 이옥희(67) 전전 부녀회장 등 21명이 모였다.
흰색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입고 오신 정용기(94) 할머니는 “나이들어 깨끗하게 보이려고 흰옷을 입었다”며 “예전에는 시조모, 시부모, 시누이, 시삼촌 등 13식구가 한집에 살았다. 오늘날과 같은 세상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예전에는 산넘어 시집 간 딸의 소식을 모르고 살았는데 지금은 안방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안춘기(79)·김옥순(82)·이영순(87)·김경희(89) 할머니는 ‘오랜 시집살이 친구’다. “예전에 초가삼간 단칸방에 살면서도 7-8남매 낳고 살았으니 참 신통한 일”이라고 했다. 전금순(81)·정용기(94)·이남순(84)·권순화(86)·이식이(82) 할머니는 “일제 때 태어나 모진 고생을 했고, 6.25 때는 심한 보리고개를 넘어야 했다”면서 “지금은 좋은 세상을 만나 늘그막에 호강하며 산다”고 말했다.
장진선 이장 |
박치환 노인회장 |
최봉순 부녀회장 |
정용기 할머니 |
김기옥 할머니 |
김순희 할머니 |
김중남 할머니 |
권순분 할머니 |
장영숙 노인회부회장 |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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