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207] 상망동 윗보름골 ‘봉산마을’

단산사람 2019. 3. 18. 21:52

닭(鷄)의 존대어 봉(鳳)에서 유래한 마을 ‘봉산(鳳山)’

우리마을탐방[207] 상망동 윗보름골 ‘봉산마을’


예전에 망동-순수한 우리말 보름골, 지금 봉산
모든 것 다 팔아 교육에 투자한 봉산 어머니들


 

봉산마을 전경

 

봉산교회

윗보름골 봉산 가는 길

윗보름골 봉산마을은 봉산교회와 영광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봉화통로 상망교차로에서 좌측 길로 접어들면 영광고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학교가 자리 잡은 산자락을 따라 길쭉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 윗보름골의 원조 양지마이다. 그리고 봉산교회를 중심으로 그 주변과 성불사 방향으로 형성된 마을을 ‘봉산마을’이라고 한다. 지난 달 30일 봉산마을에 갔다. 이날 봉산경로당에서 이병석 통장, 김제영 노인회장, 전윤식 동(洞)부녀회장, 김옥녀 3통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망동의 역사와 봉산마을 내력을 듣고 왔다.

 

 

봉산경로당

역사 속의 망동(望洞)

우리 사는 영주는 삼국 초기부터 신라, 백제, 고구려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격전장이었다. 아마도 군사 요새인 죽령을 차지하려는 다툼으로 보여 진다. 영주는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땅 날이군(捺已郡)으로 나온다. 통일신라 때 날령군(奈靈郡)으로 바뀌고,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로 불렀다. 조선 초 1413년(태종13년) 행정구역 정비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보름골 지역은 조선 중기(1600년)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봉향리(奉香里) 망동방(望洞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무렵(170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봉향면 망동리가 됐다. 그 후 조선말 1896년(고종33) 봉향면 망동이 상망동(上望洞)과 하망동(下望洞)으로 분리되면서 상망동에 편입됐다가 1914년 일제 때 영주군 영주면 상망리가 됐다.

1940년 영주읍 상망동에 속했다가 1980년 시 승격으로 영주시 상망동 3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현(戈峴,진우고개)

망동-보름골의 유래

보름골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시대별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름골의 본래 이름은 망동(望洞)이었다. 망동의 망(望)자에서 ‘보름골’이란 이름이 생기게 됐다. 먼저 망동의 유래를 옛 문헌에서 찾아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炤知麻立干 十一年秋九月 高句麗襲北邊至戈峴 冬十月陷狐山城」이란 기록이 있다.  ‘소지왕 11년(489)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진우고개)에 이르고, 겨울10월 호산성(狐山城.영덕)을 함락했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과현은 진우로 넘어가는 고개다.

망동의 내력을 살펴보면 「고구려 군사가 과현(진우고개)을 넘어 신라로 쳐들어 왔다. 신라성(龜城)을 지키던 군사가 현 동산교회 뒷산 망대에서 고구려 군사의 동향을 살피는 곳, 즉 ‘망(望)을 보던 곳’이라 하여 바라볼 망(望)자 망동(望洞)이 됐다」는 이야기다.

다음은 ‘보름골’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망(望)’자의 상형(象形)은 ‘亡+月+壬’이다. ‘찌그러진(亡) 달(月)이 임신한(壬) 것’ 즉, ‘장차 보름달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망(望)’은 ‘임신하여 만삭을 기대한다’는 뜻으로 ‘보름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망동(望洞)’은 순수한 우리말 ‘보름골’된 것이다. 

 

 

배상익이 개척한 보름골

마을 앞 ‘윗보름골’ 표석에 보면 「‘배상익’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여 치바위 아래 살았는데 거기서 마을이 넘어다 보인다고 하여 망동 또는 ‘보름골’이라 했다」고 새겼다.

마을을 개척한 배상익(裵尙益.1581-미상)은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호가 치암(癡巖,치바위)이다. 치암은 성주배씨(星州裵氏)로 나주목사를 지낸 안촌(安村) 배응경(裵應경,1544-1602)의 아들이다. 안촌이 본향 성주로부터 1570년경 영주 보름골(望洞)에 옮겨 정착함에 따라 치암이 보름골에 살게 됐다. 치암은 1624년(인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1629년 황해도사와 1631년 진주판관에 임명된 영주 출신 선비 중 한 사람이다.

 

 

윗보름골 양지마(원조마을)

봉산마을의 유래

윗보름골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 189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1920년경 교통이 발달하고 5일장이 서면서 인구가 증가하여 윗보름골에도 양지마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봉산(鳳山)이란 지명은 1960년대 초 ‘봉산농장’이 설립되면서부터 사용됐다. 봉산이란 지명을 처음 사용한 김진영 전 시장은 “뒷산의 형상이 봉(鳳)을 닮았다는 전설에 근거했다”면서 “양계단지(현 봉산교회 뒤)를 조성할 당시 닭(鷄)의 존대어로 봉(鳳)을 생각했고, 사업 성공을 위해 봉(鳳잡았다)자가 머리에 떠올라 ‘봉산농장’이란 간판을 걸게 됐다”고 말했다.

봉산교회 성도들은 “1963년 마을 사람들이 모여 가정집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봉산교회 전신인 기도실을 지을 때 성도들이 손수 벽돌을 찍어 건축을 시작했다”면서 “이 때 김진영 전 시장님께서 이 과정을 지켜보시고, 교인이 아니면서도 헌금을 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1965년 봉산농장이 설립된 후 곧 이어 1968년 봉산교회가 정식교회로 설립됐다”고 말했다.

신기순 씨

이 마을 신기순(78) 씨는 “봉산이란 지명은 봉산농장에서 유래하여 봉산교회, 봉산어린이집, 봉산주유소, 봉산경로당 등 널리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봉산마을 어머니들

이병석(66) 통장은 “우리마을의 자랑은 훌륭한 어머니들이 사는 마을”이라며 “1960-70년대 보릿고개를 넘으면서도 자녀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한 봉산어머니들이 자랑스럽다. 어머니의 기도로 자녀들은 대기업 이사로, 중소기업 사장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기관단체 장이 되는 등 각계각층의 지도자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김제영(77) 노인회장은 “우리마을 이수자(84) 할머니는 남편이 일찍 3남 2녀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소 팔고 집 팔고 모든 걸 다 팔아 자녀 교육에 투자하셨다”며 “그래서 장남 전제석 씨는 ROTC 장교 제대 후 삼성에 들어가 상무로 퇴직하였고, 지금은 중소기업 사장으로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또 “이희자(79) 할머니는 소팔아 자식 공부시켰는데 그래도 모자라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채소장사를 하면서도 자식들 공부 끈을 놓지 않아 아들 전만기 씨는 박사 학위를 받아 대기업 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또 “류병희(83) 할머니의 아들 강석좌 씨는 영주시보건소장이고, 따님은 상망동사무소 강매영 사무장”이라고 말했다.

전윤식(64) 동(洞)부녀회장은 “통장님도 말씀하셨지만 봉산은 어머니의 자녀사랑이 지극하고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며 “풍기읍장을 지내신 강신학 선생께서 우리마을 출신이고, 김신선(이설자 할머니 따님) 만수촌 원장, 강장화(류병희 할머니 따님) 박사, 박성수(호수목장) 박사 등 박사도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고 말했다. 

 

 

봉산마을 어머니들
봉산마을 사람들

봉산마을 사람들  

이병석 통장은 “윗보름골 봉산마을은 1960년경 영주 최초 양계단지가 조성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전원마을로 변모하고 있다”면서 “이곳에 처음 양계단지를 설립한 분은 전규채(이수자 할머니의 남편) 씨였다”고 말했다. 

김옥녀(63) 부녀회장은 “이병석 통장님은 마을을 두루 살펴 물, 전기 등 불편이 없도록 해 주시고, 풍수해나 폭설 등 사소한 피해가 발행해도 즉각 마을 사람들과 현장에 오셔서 복구에 최선을 다하신다”면서 “새마을 동산을 조성하고 협의회 활동을 활성화 하는 등 상망동 전체를 위해서도 많은 봉사를 하신다”고 말했다.

이수자(84)·이설자(79) 할머니는 “김제영 회장님이 노인회를 잘 이끌어 주시고, 이병석 통장님과 부녀회장님이 후원을 잘 해 주셔서 늘 화목하고 즐거운 경로당이 됐다.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도순자(79) 할머니는 “오늘도 점심은 국수로 해먹고, 화투도 한판 치고, 시원하게 쉬고, 늘 재미있게 산다”면서 “경로당을 만들어 주시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게 해 주신 장욱현 시장님, 이병석 통장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조명옥 부녀회총무
황영숙 씨
전금순 씨

귀농 10년차라는 조명옥(58) 부녀회총무는 “오늘 경로당에서 ‘자녀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봉산 어머니’들의 이야기을 듣고 감동 받아 코끝이 찡했다”며 “참 고생 많으셨던 우리 어머니 세대들, 이제 편안하게 지내시도록 부녀회에서도 더욱 관심을 갖겠다”고 말했다. 김춘자(79) 할머니는 “마을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전윤식 동부녀회장과 김옥녀 부녀회장이 앞장서고, 조명옥 총무, 황영숙·전금순 새댁네들 수고해 주어서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병석 통장
김제영 노인회장
전윤식 동(洞)부녀회장
김옥녀 3통부녀회장
이수자 할머니
류병희 할머니
이설자 할머니
도순자 할머니
이희자 할머니
김춘자 할머니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