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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208] 평은면 오운2리 예고개·새터

단산사람 2019. 3. 18. 21:59

진주강씨 집성촌 예고개(古峴) 아랫마을 새터(新基)
우리마을탐방[208] 평은면 오운2리 예고개·새터(2018.7.1)


예고개, 안동(古抒郡)-영주(捺已郡) 주요 통로
진주강씨, 임진 때 평은리, 1750년 삼거리에


평은면 새터마을 가는 길

영주농협파머스마켓 앞 적서교차로에서 국도 5호선 경북대로를 타고 안동방향으로 간다. 내성천교를 지나 평은터널을 통과한 후 예고개·봉화 방향으로 진출하여 300m 가량 올라가면 도로 좌측에 ‘새터마을’ 표석이 보이고, 계곡 건너로 보이는 마을이 ‘새터’다. 지난 1일 예고개 아랫마을 새터에 갔다. 이날 새터경로당에서 강근수 노인회장, 강호원 총무, 금순규 할머니, 강대욱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진주강씨 입향 내력과 마을의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예고개·새터

영주는 삼국 때는 날이군(捺已郡), 통일신라 때 날령군(捺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 조선 때 영천(1413년)이라 불렀다.

조선 중기(1700년)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예고개 지역은 내성천(옛이름 東川) 동쪽에 있다하여  천상면(川上面)이라 칭했다. 당시 천상면에는 오천리(멀래), 말천리(망월), 평은리, 동막리, 금계리가 있었는데 예고개·새터는 동막리(東幕里)에 속했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상면 삼거리(三巨里)가 정식 행정구역이 됨으로써 새터는 천상면 삼거리에 속하게 된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하운리(下云里,갈분)와 삼거리, 오동리(梧桐里)를 통합하여 오동의 오(梧)자와 하운의 운(云)자를 따 오운리(梧云里)라 불렀다. 이 때 예고개 남쪽은 오운1리, 북쪽은 오운2리라 했으며, 예고개와 새터와 갈분은 오운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예고개(古峴)는 삼국시대 때부터 경주(徐羅伐서라벌)에서 안동(古抒郡고타군)을 거쳐 영주(捺已郡날이군)로 통하는 주요한 통로였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래서 옛 고(古)자에 재 현(峴)자를 써 고현(古峴)이라 하고, 순수한 우리말로 ‘예고개’라 부른다. 예고개에서 영주 방향 500m 지점에 새터마을이 있다. 조선 후기까지 예고개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 천상면 ‘삼거리’였는데 삼거리에 살던 진주강씨 일족이 이곳(새터)으로 옮겨 와 터를 잡으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新基)’라 이름 지었다.

예고개에서 일출암 가는 길로 1.2km가량 올라가면 가장 높은 봉우리가 봉수산(567m)이다. 임진왜란 때 설치된 이 봉수대는 창팔래산봉수(이산면 두월리)-성내산봉수(장수고개)-망전산봉수(안정면 생현리)-죽령산봉수와 서로 응하면서 급한 사항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말 현대식 통신 시설의 설치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터마을 전경
새터 느티나무

진주강씨 새터 입향 내력

진주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도시조로 하고, 강계용(21세,國子博士,박사공)을 중시조로 하는 단일 본관의 성씨다. 강계용의 7세손 강회백(姜淮伯)이 고려(1376년)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에 올랐다. 회백의 아들 종덕(8세,宗德,사헌부감찰)이 고려가 망하자 (1392년)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한다. 그 후 종덕의 현손 학수(12세,鶴壽,1523-1599)가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영천(榮川,영주의 옛 이름)으로 이거하여 평은리에 터를 잡았다. 또 학수의 6대손 만춘(晩春,18세,1726-1786)은 1750년경 평은리에서 삼거리(三巨里)로 이거하였고, 만춘의 현손(5대손) 한찬(漢瓚,23세,1871-1937)이 1890년경 삼거리에서 새터로 이거하여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새터 입향조 한찬(漢瓚)의 증손 (26세손) 강호원(姜鎬遠,76) 씨는 “새터의 진주강씨는 강계용 중시조의 19세손 백(柏) 할아버지의 큰아들 인부(仁富,20세) 선조의 후손과 작은아들 인록(仁祿,20세) 선조의 후손들”이라며 “인부 선조의 증손 한찬(漢瓚,23세) 할아버지와 인록 선조의 증손 한원(漢源,23세) 할아버지께서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새터로 이거했다”고 말했다.

인록의 후손 24세 강근수(姜根秀,81,노인회장) 씨는 “처음에는 2가구가 정착했으나 후손이 번창하여 1970-80년대에는 15가구로 늘어났다. 이후 신세대들은 학업따라 직장따라 도시로 나가고 지금은 노인들 13세대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예고개 봉수산

예고개마을의 형성

예고개 삼거리에서 봉화방향으로 300m쯤 가다가 보면 도로 좌측 아래로 보이는 작은 마을이 예고개마을이다. 자세히 보면 마을 아래쪽 숲속에 옛 고현분교(1972-1992)의 흔적도 숨어있다. 이곳에 사는 이용한(85) 어르신은 “예전에는 마을이 없었다고 한다. 제 선친께서 일제 때(1930년경) 장수 갈미에서 예고개에 와 보니 새터에 살던 진주강씨 한 집이 미리와 살고 있어서 두 집이 살게 됐다. 예고개 삼거리에는 주막집이 4집 있었고, 양조장이 있었는데 나중에 평은면소재지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새터에 사는 강대욱(87) 어르신은 “1920년경 예고개 길을 닦을 때 ‘마을 사람들이 부역했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면서 “이전에는 구루마길 밖에 없었는데 국도5호선 공사가 완공(1930년)된 뒤에는 ‘신작로’로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예고개 3대 닭발집
서정화 씨
강대원 씨

예고개 명물 3대 닭발집

예고개 삼거리 영주방향에 3대째 닭발집이 있다. 닭발 2인분 시켜놓고 “3대째 닭발집 내력을 알아보려고 한다”고 했더니, 사장인듯한 분(서정화,54)이 “제 아버지(고 서대상)께서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1975년) 닭발 장사를 시작하셨다”며 “당시 안동장에 가서 닭발을 사오면, 어머니께서 방칫돌에 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닭발요리를 하셨는데 무척 고생이 많으셨다. 부모님이 하시다 아들딸에게 물려줬고, 지금은 손자가 대를 잇고 있다”고 말했다.

새터 사는 강대원(77) 씨는 “예고개 닭발의 원조 서대상(달성서씨) 씨는 새터에 살다가 예고개에 가서 영업을 시작했다”며 “처음에는 고갯마루 길가에 살다가 고개 남쪽 현 휴게소 자리에서 닭발집을 시작했고, 나중에 현 위치로 이전, 확장했다”고 말했다.

     

이발래 씨

나이 80에 경운기 모는 여장부

이 마을 이발래(80) 씨는 나이 80에 경운기를 직접 몰고 2천평 사과농사를 짓고 있어 주변 사람들이 ‘여장부(女丈夫)’라 부른다. “남편이 사고로 많이 다치는 바람에 농업현장 선두에 뛰어들어 사과농사 50년에 사과 전문가가 됐다”면서 “지금은 농사지으면서 가흥복지관 노인대학, 노인복지관 맷돌체조 등을 하면서 여유를 가진다. 3남2녀를 두었는데 대학을 나와 각각 중간간부로,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집에서 생산된 사과, 대추 등 농산물은 이웃과 나누고 여러 사람들에게 베풀며 산다”고 말했다.

 

새터마을 사람들

새터마을 사람들

권조자 씨
오정임 씨
배만옥 씨

봉화 금봉이 친정이라는 금순규(90) 할머니는 “마을 앞 느티나무는 마을의 동신(洞神)이자 마을의 상징”이라며 “마을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여기가 마을 회관이 된다”고 말했다.

열일곱 새색시가 수구리에서 새터로 시집왔다는 정연희(87) 할머니는 “새터는 논이 귀하고 밭도 안보여 ‘뭘 먹고 사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골이 깊고, 사이에 작은 골이 많아 실제 농토가 많다”며 “조상님들께서 후손들이 먹고 살 땅을 미리 예비해 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청도김씨 재사 앞에서 만난 김진호(83) 어르신은 “이 재사는 청도김씨 선대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齋舍)”라며 “진주강씨가 입향하기 전 청도김씨가 먼저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고 말했다. 오춘자(83) 할머니는 “60년전 새터의 모습은 산밴달에 토담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면서 “도랑가에 동샘이 있었는데 모두 그 물을 길어다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이산 운문에서 18살 때 시집왔다는 김순복(80) 할머니는 “예전에 디딜방아로 보리방아 찧어먹고 살면서 길쌈에 누에치기로 아이들 공부시켰다”며 “고생살이 하면서도 아이들 공부에 성심을 다한 덕에 새터에서 훌륭한 일꾼들이 많이 나왔다”고 했다.

기자가 마을에 갔던 날 폭우가 쏟아졌다. 우중에도 취재에 협조해주신 남정숙(82) 할머니, 권조자(79) 씨, 오정임(77) 씨, 배만옥(76) 씨께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강근수 노인회장
강호원 노인회총무
금순규 할머니
강대욱 어르신
정연희 할머니
이용한 어르신
김진호 어르신
오춘자 할머니
남정숙 할머니
김순복 할머니

20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