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186]안정면 묵리(노루목·한고개)

단산사람 2018. 7. 9. 20:18

뒷산 형국이 노루의 목을 닮아 노루모기(獐項)

우리마을탐방[186]안정면 묵리(노루목·한고개)


숲이 무성하여 대낮에도 깜깜하여 까막골(墨里)
어디서 오든지 고개 하나 넘어야 하는 ‘한고개’

노루목 마을전경

안정면 묵리 가는 길
영주 영일사거리에서 영주교를 건넌다. 법원사거리-영주종합터미널-명품요양병원-반지미교차로에서 우측 용암산 방향-경북축산연구소에서 300m 가량 올라가서 좌측 묵리교 안쪽 야산자락에 숨어 있는 마을이 노루모기다.

지난달 28일 묵리에 갔다. 이날 노루목회관에서 황우근 이장, 안재선 노인회장, 황사락 전 노인회장, 안양숙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내력과 전설을 듣고 왔다.

노루목 버드나무(수령500년)

역사 속의 묵리(墨里)
묵리 지역은 태종13년(14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에 속한 방(坊)이었다. 조선 중기(1700년경) 무렵 부(府)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재편할 때 순흥도호부 대룡산면(大龍山面) 묵동(墨洞,까막골)·장항리(獐項里,노루목)로 편성됐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대룡산면이 풍기군에 이관되면서 용산면으로 개칭됐다. 이 때 묵동과 장항리가 묵동으로 통합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폐합되고, 용산면, 생현면, 동촌면을 통합하여 새로운 안정면을 탄생시켰다. 이 때 노루목, 한고개, 윗반지미, 새마를 ‘묵리’로 통합하고 안정면에 편입시켰다.

황우근 이장은 “지금 묵리는 노루목, 한고개, 까막골(묵동), 윗반지미로 구성됐다”며 “60년대에는 노루목에 80가구, 한고개에 20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합쳐 37가구에 60여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 됐다. 순흥안씨·창원황씨 오랜 세거지다”고 설명했다.

黃永悳 大法師 永慕碑

지명유래
조선 때 이 지역을 대표하는 마을이 묵리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묵리는 ‘검다’ ‘어둡다’란 뜻을 가진 먹 묵(墨)자를 쓴다. 전설에 의하면 한고개 서편에 있는 골짝이 골이 깊고 숲이 우거져 한낮에도 어두컴컴하다 하여 ‘까막골(墨谷)’이라 불렀는데 이 곳 선비들이 먹 묵(墨)자 묵동(墨洞)이라 칭했다고 한다. 묵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노루모기는 마을 뒷산의 형국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 하여 ‘노루목’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편한대로 발음하다 보니 노루모기가 됐다고 하며,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이곳 선비들이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자를 써 장항(獐項)이 됐다고 한다. 노루모기 앞산 넘어에 있는 한고개는 조선 때 묵리의 중심지로 유력한 가문이 세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은 어디에서 가든 고개 하나를 넘어야 갈 수 있다 하여 ‘한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또 형세가 항아리 목 모양으로 짤록하다 하여 항고개(項峴)라 했다는 세보 기록도 보인다. 한고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반지미는 윗반지미 또는 순흥반지미로 부른다. 노루모기 마을 앞에서 용산 방향에 일제 때 생긴 새마(시장)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60년대 한고개 소나무

순흥안씨 노루목 입향
안재선(70,순흥인,1파후손) 노인회장은 “경북지명유래편에 보면 「순흥안씨 3파 후손 일족이 을사사화(1545) 때 화를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 마을 개척했다」라는 기록으로 봐서 순흥안씨가 노루목에 세거한지 473년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현재 후손들이 모두 떠나고 없어 입향조의 내력을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노루모기 순흥안씨는 제3파 후손으로 고려·조선조에 걸쳐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으며, 특히 순흥 사현정에서 태어난 안축(安軸)·안보(安輔)는 고려 문신(文臣)으로 소수서원에 배향됐다.

황영시 장군 생가

창원황씨 장항 세거 내력
창원황씨 후손 황사락(77) 전 노인회장은 “예전에 순흥안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이어 창원황씨가 입향했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며 “창원황씨 노루목 입향은 시조의 13세손 수강(壽崗,1655-1724 壽69) 선조께서 1680년(숙종6년) 대룡산에서 이곳으로 살림을 나 정착한 후 338년간 세거해 왔다”고 말했다. 노루목 창원황씨는 황석기(黃石奇)를 시조로 하는 창원황씨 일맥으로 단종절신 황지헌(知軒,4세,1411-1462)의 후손이다. 예빈시사정을 지낸 지헌은 계유정란(1453) 때 영주로 귀양 왔다가 배고개(가흥2동,택지)에 눌러 앉아 영주 입향조가 됐다. 아들 무소(茂蘇,5세,1431-1481,생부의현)-손자 진(璡,6세 1451~1506,진해 현감)-증손 효공(孝恭,7세,1496~1553,)은 문과급제 춘추관편수관을 지냈다. 효공의 아들 흠(欽,1512~1590)은 (유일로) 상주목사-흠의 둘째 아들 언주(彦柱,1553~1632)가 대룡산 순흥안씨 딸에게 장가를 들어 대룡산에 큰 터전을 열었다. 노루목 입향조 수강(13세)은 언주(9세)의 현손이다. 세보에 보면 「壽崗 文華富瞻에 累擧鄕貢」이라고 적혀 있다. 수강은 「문장이 아름답고 뛰어나 향시(백일장)에 여러 번 급제하여 만인이 우러러 칭송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묵곡(墨谷), 까막골 전경
우경호 씨

단양우씨 한고개 세거
한고개에 사는 단양우씨 후손 우경호(72,33세손) 씨는 “저의 8대조 찬규(贊圭,25세,1727생) 선조께서 1750년경 장수면 성곡에서 이곳 항현촌(項峴村)으로 이거하여 입향조가 되셨다”며 “선조 묘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라고 새겨져 있으나 자세한 공적은 알 수 없다. 후손들은 산업화 이후 도시로 떠나고 지금은 몇 집만 고향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한고개 단양우씨는 문희공파로 역동(易東) 우탁(禹倬)下, 영주 입향조 수암(秀巖) 우숭려(禹崇呂)下, 장수 성곡 애일당(愛日堂) 묵와 우전(禹甸,1523-1588)下, 한고개 입향조 25세 찬규로 이어지는 갈래로, 유(儒)의 도(道)로 향리발전에 크게 기여한 가문이다. 마을 동구에는 500년 수령의 소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홍윤기 씨

이 마을 출신 홍윤기(70,전 영주초교장) 씨는 60년대 사진을 보며주면서 “이 소나무는 밑둥이 4m 20cm로 지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라며 “예전에는 정월대보름날 성황제를 지냈고, 어른들의 쉼터요, 아이들의 놀이터로 추억이 많은 나무다. 또 1970년대 초까지 한고개에는 초가집 20여 채만 있었다”고 말했다.

60년대 한고개 초가집
보호수, 한고개 소나무

황영시 장군 고향마을
황영시(92,1926生) 장군은 안정면 묵리 노루목 출신으로 창원황씨 20세손이다. 이 마을 황사락 씨는 “황 장군은 어릴 적 마을 서당에서 공부했고, 안정심상소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안정국민학교 용산분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육사에 진학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황 장군은 1980년 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1985년 감사원장을 역임했다. 마을 가운데 황 장군의 생가가 있고, 어릴 적 공부하던 골방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장군의 조카가 가끔 집을 돌아보는데 올해 93세에 드는 장군은 “아직 건강하시다”고 했다.

노루목 사람들
황우근 이장
안재선 노인회장
안양숙 부녀회장
안성희 새마을지도자
황사락 전 회장
구태우 전 노인회총무
안복희 할머니
안순분 할머니
김옥출 할머니
황우봉 할머니

노루모기 사람들
마을 앞에 500년 수령 고목 버드나무가 있다. 아마도 순흥안씨 입향조가 심은 나무로 추정하고 있다 한다. 그 옆에 마을회관이 있다. 안양숙(56) 부녀회장과 이장님 사모 강종선(65) 씨께서 계란을 삶고 다과상을 차려 모두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안성희(67) 새마을지도자는 “묵리의 농업은 벼농사 중심이며 고추, 생강 등 밭농사를 많이 한다”고 했다. 구태우(76) 전 노인회총무는 “예전에는 담배와 누애치기를 많이 하다가 인삼과 사과로 바뀌더니 지금은 벼, 고추, 생강, 축산, 양계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여륵에서 노루목으로 시집왔다는 안복희(85) 할머니는 “18살 처녀 때 6.25가 났다. 인민군에 끌려가 식량을 여다 날라주는 부역을 했는데 낮엔 숨고 밤에만 이동하고, 시체를 타넘어 다니면서 안동, 의성까지 갔다 왔다”면서 “그해 동짓달 노루모기로 시집왔다”고 했다. 김옥출(79) 할머니는 “예전에는 살림에 보태기 위해 길쌈과 누애치기를 많이 했다”고 했고,

임계희 씨

임계희(78) 할머니는 “6.25 후 보릿고개를 넘을 때 송구죽, 나물죽, 조당수, 수꾸풀대기로 연명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안순분(83)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 회관가는 재미로 산다”면서 “황우근 이장님과 안재선 노인회장님이 살기좋은 마을로 이끌어 주시고, 안양숙 부녀회장님과 강종선 이장사모님이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경로를 잘 해 줘서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황우봉(79) 할머니는 “맞아요. 황 이장님이 전기, 수도, 보이라, 무거운 짐 등을 잘 챙겨 주고, 농사일까지 잘 돌봐 주셔서 노후가 편하다”고 했다. 오후 4시경 회관에서 나와 황우근 이장, 안재선 노인회장, 황사락 전 노인회장과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마을은 소쿠리형 아늑한 터에 자리 잡았다. 황영시 장군 생가, 황진사 고택, 선사부태각당황영덕대법사영모비「先師父太覺堂黃永悳(20세손)大法師永慕碑」, 옛 우물터 등을 둘러봤다. 이튿날은 우경호 씨, 안재선 씨, 홍윤기 씨의 안내로 한고개 마을과 단양우씨 선영, 老소나무의 내력을 알아봤다.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