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128] 문수면 월호1리(다락골·성잠)

단산사람 2017. 2. 18. 21:26

산(山) 등성이 달(月) 마을 ‘다락골’

우리마을탐방[128]문수면월호1리(다락골·성잠)

 

   
▲ 다락골 전경
산위에는 ‘다락골’, 강가에는 ‘성잠마을’
다락골, 함창김·수원백·영월엄씨 세거지

 

월호1리 다락골 가는 길
시내에서 남산고개를 넘어 문수방향으로 간다. 적서교를 건너 노벨리스코리아-환경사업소-월호교를 지나 와현 방향으로 가다보면 도로 좌측 언덕 위에 ‘월호1리 다락골’ 표석이 보인다.

표석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급경사 오르막길을 500m 가량 올라가면 산등성이에 터 잡은 다락골을 만나게 된다. 또 다락골에서 동구(洞口) 수구막이 방향으로 1.5km쯤 내려가면 서천 강변에 성잠동이 있다.

2016.11.27  다락골에 갔다. 마을 회관에서 김학원 이장, 엄기갑 노인회장, 김달영 전 노인회장, 우달구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다락골의 유래를 듣고 왔다.

   
▲ 다락골 표석
역사속의 월호리
월호리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영천군(榮川郡, 영주의 옛이름) 권선전리(權先田里) 전두전방(纏頭田坊)에 속했다.

 

영주지에 보면 「권선전리 속방(屬坊)에는 전두전방 하나가 있다. 마을이 외지고 백성이 드물다」고 썼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영천군 권선전리가 권선면(權先面)으로 개칭되면서 권선리, 월호리(月呼里), 벌사리(伐賜里)로 분리된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하고, 영천군의 적포면, 권선면, 진혈면을 ‘문수면(文殊面)’으로 통합한다. 이 때 다락골은 영주군 문수면 월호1리에 편입됐다. 그 후 1980년 영풍군 문수면 월호1리, 1995년 영주시 문수면 월호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성잠마을
지명 유래
월호리의 중심마을인 다락골은 예전에 달천(達川) 또는 월곡(月谷)이라 불렀다. 지명유래 문헌에 보면 다락골의 ‘다락’은 고구려어 달(達)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달을 소리나는대로 적으면 ‘다라’가 되어 ‘다락골’이 됐다는 것이다. 달(達)은 나중에 산(山)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즉 달(達)은 산(山)의 옛말이다. 후세 사람들은 달(達)을 월(月)로 이해하여 월곡(月谷) 또는 월호(月呼)라는 지명이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하면 ‘다락골’이란 높은 산위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다락골 지역은 조선말(1896년경)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지역 유지들이 상의하여 월호리(月呼里)라 칭했다. 뒷산의 형국이 반달을 닮아 ‘월호’라 했다는 설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달(月)을 닮았다’하여 월호라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 다락골 우물
이 마을 강신천씨는 “다래나무가 많아 ‘다래골’이 ‘다락골’로 변했다는 전설도 있고, 지대가 높아 물건을 ‘달아올린다’는 뜻으로 ‘다락골’이 됐다는 유래도 있다”고 말했다. 월호1리는 산위에 있는 다락골과 강가에 있는 성잠동(盛蠶洞)이 있다.

 

다락골 뒷산에서 임도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면 서천 강가에 ‘성잠동’이 있다. 예전에 이곳에 숲이 우거져 수안(숲안)이라 불렀는데 일제말 입주민들이 양잠(養蠶, 누에치기)을 장려하여, 뒷산 잠두산(蠶頭山)의 잠(蠶)자를 따 ‘성잠(盛蠶)’이라 했다고 한다.

   
▲ 성잠 전나무길
다락골에 누가 살았나?
다락골은 조선초 함창김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이어 수원백씨와 영월엄씨가 입향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다락골 함창김씨는 고령가야 고로왕을 시조로 하는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후손들이다.

 

조선 명종 무렵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부호군(龍양衛副護軍)을 지낸 종려(從麗, 24세손)가 을사사화(1545년) 때 난을 피해 함창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후손 김달영(80) 어르신은 “종려 선조께서 이곳에 입향하신지 470년이 넘었다”며 “당시 부인과 어린 딸 등 세 식구가 왔었다고 전하며, 따님은 성장하여 고랑골 반남박씨 가문에 출가시켰다”고 했다. 이 마을 김세영(77)씨는 “1950-60년대 다락골에는 60여 가구가 살았는데 그 중 절반이 함창김씨였다”고 말했다.

   
▲ 다락골 동수나무
다락골의 영월엄씨는 시조 엄임의(嚴林義)의 12대손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의 후손들이다. 엄흥도는 영월 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와 승하(1457년)하자 몰래 시신을 수습해 장릉에 안치한 후 어디론가(문경) 잠적했다.

 

엄흥도의 8대손 준걸(俊杰)이 문경에서 다락골로 이주한 것은 1700년대 초로 보여 진다. 후손 엄기혁(80) 어르신은 “다락골 입향조이신 준걸 선조는 저의 9대조”라며 “엄흥도 선조께서 숨어 살던 문경군 산양면 위만리에서 명당을 찾아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약 300년 전”이라고 말했다.

엄기갑 노인회장은 “영월엄씨가 이곳에 세거한 후 자손이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지만 많을 때는 15호 정도 살았으며 지금도 5세대가 살고 있다”고 했다.

수원백씨 후손 백승만(83, 동산골) 어르신은 “저의 15대조 수채(秀菜) 선조께서 400여년 전 다락골로 입향하셨으며, 그 아드님 기(基) 선조께서는 상주목사를 지냈다”면서 “우리 엄가는 함창김씨 다음으로 많은 세대가 다락골에 살았다”고 말했다.

   
▲ 수구막이 소나무
강가마을 성잠
월호교에서 자전거 데크로드를 따라 무섬으로 가다보면 강가에 보이는 작은 마을이 ‘성잠’이다. 예전에 마을 앞에 외나무다리가 있어 월호리, 조제리 일대 주민들이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 영주장보러 다녔다고 한다. 성잠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끝 무렵인 1943년 승문리 버드랭이에 살던 봉화정씨 정문섭(鄭文燮)이 이곳에 와 갈대숲을 걷어내고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해방(1945년) 후 일가 6가구가 더 이주하여 모두 7집이 작은 집성촌을 이루게 됐다. 이 마을 정기하(79)씨는 “1947년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이 마을로 이주했었다”며 “당시 누에치기가 성하여 집집마다 누에를 쳐 마을 이름을 ‘성잠(盛蠶)’이라 했다”고 말했다.

   
▲ 신랑각시바위
지금도 봉화정씨 7집이 옛 모습 그대로 살고 있다. 정기하씨 부인 임화춘(75)씨는 “50년전 이 마을로 시집와 초가삼간 토담집에서 살았다”며 “누에를 집집마다 10장 넘게까지 치면서 온통 누에와 함께 살았다”고 했다. 이 마을 큰 어른이신 여춘호(84) 할머니는 “우리 마을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식들 공부에 정성을 다했다”며 “모두 열심히 공부하여 도시로 나가 사장도 되고, 회장도 되고, 면장도 나왔다”고 말했다.

 

이 마을 출신 정기대 전 평은면장은 “고향자랑은 아무리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내고향 성잠은 금빛 모래강변이 자랑이다. 모래강에서 깜둥고무신으로 송사리를 잡던 추억이 생생하고, 마을앞 갯벌에 뽕나무가 무성할 때면 여러 동네 총각처녀들이 성잠으로 몰려와 뽕도 따고 돈도 벌었다”고 말했다.

   
▲ 100년전 고택
다락골 사람들
입향조가 심었다는 450년 수령의 느티나무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을 가운데 공동우물이 있고, 30여채의 집들은 남향하여 옹기종기 모여 있다. 김달영 어르신은 “마을이 산위에 있어 달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길어 ‘달마을’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회관에서 나와 마을을 둘러볼 때 김학원 이장, 엄기일씨, 강신천씨, 우달구씨가 동행했다.

 

김 이장은 “1950-60년대 다락골은 65호에 450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다”며 “한옥기와집과 까치구멍 초가집이 골짝과 비알에 가득했었다”고 말했다. 마을 앞 우물가에 섰다. 엄기일씨가 두레박 우물을 가리키며 “예전에 마을사람들은 모두 이 물을 먹고 살았다”며 “이곳은 지하 10-20m 지점이 접시모양 암반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대가 높지만 물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 짐실바위
“마을 규모에 비해 농토가 부족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달구씨는 “농토는 이곳뿐만 아니라 마을 밖 월호리 전 지역에 분산돼 있다”고 말했다.

 

마을 동쪽 수구막이에 있는 노송(老松)은 ‘천연기념물 문화재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농로인지 임도인지 숲길이 산책로 같다. 내려다보는 풍광도 멋지다. 한참을 걸어가서 삐죽바위 앞에 섰다.

엄기일씨는 “이 삐죽바위는 신랑바위이고 저쪽 둥근바위는 각시바위”라며 “다락골은 이 바위의 효험으로 자손이 번창하고 마을이 무사태평하다”고 말했다. 소가 짐을 실은 형상의 짐실바위, 해발 300m 망월봉 등을 둘러보고 마을로 내려왔다. 김 이장과 마을 건너편 옛 학교터로 갔다.

김 이장은 “이 자리가 문수공립보통학교 터”라며 “당시 지역 유지 김여곤(金汝昆, 다락골)씨를 중심으로 학교 설립운동이 추진되어 1935년 12월 12일 다락골(간선공제조합집회소)에서 훈도1명, 학생 68명(1,2학년)으로 개교한 후 1939년 와현으로 이전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문수면 월호1리 다락골 사람들>
 

   
▲ 김학원 이장
   
▲ 엄기갑 노인회장

 

   
▲ 김달영 전 노인회장
   
▲ 김세영 어르신

 

   
▲ 엄기일 씨
   
▲ 우달구 새마을지도자

 

   
▲ 강신천 반장
   
▲ 여춘호 할머니

 

   
▲ 정기하 씨
   
▲ 임화춘 씨

 

   
▲ 정기대 전 평은면장
   
▲ 엄기혁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