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한복에 짚신 신고 다니던 보통학교 시절
6·25 때 피난길 참혹상, 참전에서 휴전까지
해마다 추석이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조상 산소를 둘러보고 옛 친구를 만나며 골목길을 걸어보기도 한다. 올해도 변함없이 고향마을 뒷산에 올라 옛 생각에 잠겨있는 이해경(87) 어르신을 8일(추석날) 오후 단산면 병산3리 젓돌마을에서 만나 잔혹했던 일제 강점기 때 생활 모습과 6,25 참전 이야기를 들었다.
잔혹했던 일제 강점기
이해경 어르신(이하 어르신)은 1928년 단산면 병산리 젓돌마을에서 이세용(유학)·강릉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어르신의 할아버지가 의생(醫生, 한의업) 이어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천자문 등)과 예절 공부를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병산1리에 단산공립보통학교(1935년 개교)가 생겨 학교 교육을 받게 됐다.
“그 때 학생들은 어떤 옷에 어떤 신발을 신고 학교에 다녔느냐?”는 질문에 “그 때는 무명 바지저고리에 짚신이나 게다(일본 나막신)를 신고 다녔다”며 “당시 일제가 싱가포르를 점령한 기념으로 고무신을 한 켤레씩 배급 받았는데 고무신을 신고 한참 걸어가다 보니 고무신이 찢어져 발가락이 튀어나왔다”고 하면서 웃었다.
“당시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한 학년에 학생수가 30여명은 넘었는데 여학생은 5명 이하였다”고 했다. 학교 공부는 한글과 일본어 공부를 했고 3시간쯤 수업하고 나머지 시간은 일제의 전쟁물자 조달 작업에 동원되어 산에 가서 ‘솔공이’를 땄다고 했다. “솔공이가 뭐냐?”고 했더니 “솔공이는 관솔이라고도 하는데 소나무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옹이로 기름(석유) 대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일제는 대동아 전쟁을 하느라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식량을 모두 빼앗아 갔기 때문에 농민들은 송구죽이나 나물죽으로 연명해야 했으니 당시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놋그릇, 수저 등 모든 쇠붙이를 다 거두어 가서 총알과 대포를 만들었다고 하니 일제의 착취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제는 숨겨둔 곡식을 찾아내기 위해 일본 순사(경찰)를 보내 집 안팎을 샅샅이 뒤지기도 하였다고 하니 잔혹했던 일제 만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했다고도 했다.
또한 일본식 성명을 강요(창씨개명)해 우리 이름까지 모두 일본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어르신은 성은 고목(高木, 다까기)으로 이름(海京)은 가이께이로 강제 개명하여 ‘다까기 가이께이’가 됐었다고 했다. 당시 학생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면서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농사철에는 학교에 가지 못했으며 새보는 일과 꼴 베는 일 등으로 결석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했다.
6.25 피난길에 본 참혹상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이념 대립이 극심했다. 빨갱이들이 마을을 습격하고 지서를 공격하는 만행이 잦아지자 나라에서 소개령을 내려 작은 마을들을 소개시켰다. 어르신은 집을 뜯고 면소재지로 이사했다. 혼자서 집을 뜯는데 사흘이나 걸렸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한 전쟁이 발발했지만 우리 지역 농촌에서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군이 단양까지 진격하고 국군이 죽령에 방어선을 구축할 때 쯤(7월 중순으로 기억)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알고 피난을 서두르게 됐다고 한다.
어르신도 친척 형님 두 분과 남쪽으로 피난길에 나섰다. 걸어서 영주를 지나 안동까지 갔다. 7월의 낙동강은 황토물이 흐르고 있었고 강을 건너려고 할 무렵 전투기가 날아오더니 영호루로 건너는 안동교를 폭격했다.
당시에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공산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미공군이 낙동강 다리를 폭격한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다리가 끊어지고 폭격으로 인한 폭음과 검은 연기, 사람들의 비명소리, 아수라장이 된 안동역, 참혹한 장면을 목격한 피난민들은 “더 이상 피난을 가다가는 중간에서 죽을 것 같다. 피난 가다 죽느니 고향에서 죽자”며 일행은 “고향 단산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발길을 고향으로 돌렸다.
그 때는 이미 공산군이 죽령을 넘어 영주까지 점령한 때라 예안 방향 산속으로 숨어들어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이동하여 3일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뒷산에 움막을 치고 피난 생활을 했다고 했다.
6,25 참전용사가 되다
그 해 여름 두 달 간 치열한 낙동강 전투가 전개됐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했다. 1.4후퇴 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전투가 한창일 때 군입대 영장을 받게 된다.
1953년 2월 단산면사무소에서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트럭에 올라 입대길에 올랐다. 영주군청에서 각 면 장정들과 합류하여 포항으로 갔다.
포항에서 운전병으로 분류되어 보병은 제주도로 가고 특과병은 논산훈련소로 갔다. 당시 논산은 훈련소가 창설 될 때라 사격, 포복 등 기본교육은 조금만 받고 대부분 훈련소 건물을 짓는 일과 시설을 구축하는데 투입됐다. 한 달 간 신병교육을 받고 1953년 봄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전선에 투입됐다. 당시 춘천중학교에서 505수송단이 창설되어 그 예하부대인 뱀밭골 237대대로 배속 받았다. 이 때 춘천역에서 군용물자를 받아 각 사단 사령부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하루는 영주에서 온 까까머리 이등병들을 최전방으로 수송했는데 며칠 뒤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해 주기도 했다. 전쟁 중이라 구급차가 별도로 없었고 군용트럭에 가마니를 깔고 환자들을 후송했다고 한다. 그 해 여름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고 치열한 전투가 있을 때였다. 당시 작전 명령은 “모든 탄약을 다 소모하라”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아야 한다.”였다. 많은 병력이 전사했지만 시체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현장에서 묻어주는 간소한 장례를 치루어야 했다. 그러다 수송단에 배치 된지 3개월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됐다. 휴전 후 속초항에서 군수 물자를 받아 고성, 동대리, 인제, 홍천, 원주로 수송하는 임무를 완수하다가 1954년 3월 2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의가사제대 했다.
제대 후 부산, 문경, 태백 등지에서 산업용사로 새마을 역군으로 활동하다 현역에서 은퇴했다. 어르신은 제2의 고향인 강원도 태백시에서 참전유공자회 부회장, 게이트볼협회 회장, 노인회장 등을 역임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그립다는 어르신은 “이제 친척도 친구도 모두 떠나고 없는 고향이지만 언제나 가고 싶은 곳이 고향”이라며 “내 평생 한 일 중 6,25 참전 용사가 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