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부석사 곁에 있는 마을 ‘방골·허뭇거리’ | ||||||||||||||||||||||||||||||||||||||||||||||||
우리마을탐방[125]부석면 북지2리(방골·허뭇거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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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창건 전부터 있었던 마을 ‘방동’ 방골·허뭇거리 가는 길 1970년 이전에는 풍기-순흥-단산-부석으로 가는 길 밖에 없었다. 부석면소재지에서 은행나무길을 지나 부석사 주차장 가까이에 이르면 북지2리 표지판이 나온다. 북지2리는 “멋스러운 부석사를 곁에 두고 있는 마을”이라며 “여기서 나는 ‘부석사 사과’는 가장 야무지고, 꿀이 많이 들어있는 사과”라고 소개하고 있다. 지난 7일 오전 부석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분수대 물보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부석사 식당에서 장세호 이장, 이창은 노인회장, 박찬한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 부석사의 전설과 지명유래를 듣고 왔다.
역사 속의 방동·허뭇거리 1849년에 편집된 순흥지(順興誌)에 삼부석면 ‘방동(方洞, 방골)’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당시 삼부석면에는 방동, 임곡(숲실), 대율곡(한밤실), 사문단(사그랭이), 마흘천(남대리), 의풍 등이 있었는데 방동이 지금 방골이다. 그 후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도호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면서 삼부석면이 봉양면(鳳陽面)으로 개칭된다. 이 때 허뭇거리는 신기동에, 방동과 주차장 주변 마을은 북지리에 편입된다. ‘신기동’과 ‘북지리’라는 동명이 이때 생겼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폐합하고, 봉양면, 용암면, 도강면을 부석면으로 통합한다. 이 때 방동, 허뭇거리, 송고, 갓띠 등은 북지리로 통합됐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 ‘방골’이라고 부른다. “방골의 유래가 뭐냐?”고 물었더니 하건홍(68)씨는 “방구(바위)가 많아 ‘방골’이라 한다”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방구(돌)가 많은 마을이 맞다. ‘허뭇거리’마을은 부석사 초입에서 봉화 물야방향으로 300m 가량 가다가 도로 좌측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허문동천(虛門洞天)이라고 새긴 바위글씨가 있는 것으로 봐서 ‘여기에 전통마을이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가보니 이 마을은 인동장씨 집성촌이다.
그 뒤 질서가 잡힌 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신기리’라 명명했다. 이때가 구한말쯤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에 사는 장세홍(69)씨는 “우리 인동장씨를 ‘허뭇거리장씨’라고도 하는데 해방 후에서 6·25무렵까지는 인근에 60여호가 살 정도로 후손이 번창했다“고 말했다. 주차장 주변 상가지역은 100여년전부터 방골, 허문, 갓띠, 송고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송지향의 영주향토지에는 ‘삼부석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방동마을에 오니 창건 당시 ‘부석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가 궁금하다. 방골에 살고 계신 신만례(92) 할머니는 “18살에 시집와서 74년동안 방골에서 살았다”며 “당시 돌과 흙으로 두꺼운 벽을 쌓아 지은 초가집은 기어들어갔다 기어나오는 집이었고, 나물 섞은 보리밥, 조밥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면서 당시 지극히 가난했던 생활상을 털어놓았다. 신 할머니께 “천년전 부석사가 처음 지어졌을 때도 초가집만 몇 채있었다”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그렇지! 예전 천년의 발전은 미미했으나 지금 70년의 발전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인동장씨 허뭇거리 입향 내력은 분파조의 고손자인 장훈이 임진왜란(1592년) 때 순흥부 물야면으로 피난 와서 압동리·두문리 일원에 터를 잡았다. 그 후 장훈의 7대손 수익(壽益)이 1790-1800년 무렵 순흥부 삼부석면 부석사 인근에 터를 잡으니 현 부석면 북지리 ‘허뭇거리’이다. 허뭇거리 출신 장세종(디센크루프 엘리베이터 코리아㈜ 경북지사장)씨는 “수익 선조께서 이곳에 자리 잡으시고 200여년동안 세거해 오면서 후손이 엄청 번창했다”면서 “허뭇거리 출신 저희 장가들은 ‘학문을 중시하라’는 선조님들의 뜻을 받들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나라 각계각층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골에 사는 박찬한(60)씨는 “부석의 반남박씨는 판관공파 동원공의 후손으로 구한말 무렵 방골로 이주하여 100년 넘게 세거해 왔다”며 “1960년대까지는 20여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산업화 이후 도시로 떠나고 현재 10여 가구만 산다”고 했다.
부석사 등화 스님은 “10월 한 달동안 부석사를 다녀간 관광객은 5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안다”며 “한국의 아름다운 절집 부석사는 부동의 1순위”라고 했다. 서울에서 직장 퇴직 후 3년 전 귀향한 이재식(69)씨는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부석’이라고 답했더니 부러워하더라”며 “내 고향 부석사 그리고 우리마을은 참 아름다운 절집이 있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부석사 매표소 앞에서 특산물을 팔고 있는 이정희(67)씨는 “여기 가판에 나온 집은 30집쯤 되는데 농사지은 것(사과, 고추, 산나물, 약초, 달래, 콩 등)은 무엇이든 다 판다”며 “많이 팔 때는 하루 15만원 정도 팔고, 안 팔리는 날은 5만원도 못 판다”고 했다. 방골 하태홍(70)씨는 “해마다 이맘때면 이 자리에서 ‘사과축제’가 열린다”며 “돌이 많은 봉황산((鳳凰山, 818m) 기슭에서 생산된 ‘부석사표 사과’는 돌같이 야물고 꿀같이 달다”고 말했다. [부석사과 010-3543-0761] 김진우(66) 노인회 총무는 “부석사 입구에 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초파일날(부처님오신날) 매표소와 일주문 사이 길가에 포장을 치고 국밥 장사를 시작한 것이 최초”라며 “지금은 600석 규모의 부석사 식당을 비롯하여 종점, 무량수, 자미가, 평화 등 대형 식당이 여럿 있다”고 말했다. [부석사 식당 054-633-3317] 북지2리 장세호 이장은 “우리 마을은 사과·자두 농사와 식당·상가 운영, 특산물 판매 등으로 가구당 평균 8천만원 이상 소득을 올리는 생동감 넘치는 마을”이라며 “현재 70호에 150명 정도가 산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부석면 북지2리 방골·허뭇거리 사람들> ▲ 장세호 이장
▲ 이창은 노인회장
▲ 신만례 할머니
▲ 장세홍 씨
▲ 이재식 씨
▲ 하태홍 씨
▲ 하건홍 씨
▲ 이정희 씨
▲ 김진우 노인회총무
▲ 박찬한 새마을지도자
100년 고택
부석사 마을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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