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 [111] 휴천3동 ‘방갓마을'

단산사람 2016. 8. 5. 12:48
우리마을탐방[111] 한양조씨 군수공파 450년 세거지 ‘방갓’
휴천3동 방갓마을
[573호] 2016년 06월 09일 (목) 15:51:02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 방갓 마을전경

1555년경 한양인 조광선이 ‘방갓’에 정착
효제충신 정신문화, 영남의 문벌로 번성

 

 

 

휴천3동 방갓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남산고개를 넘어 문수방향으로 간다. 농협퍼머스마켓에서 우회전하여 적서교를 건너면 노벨리스코리아 영주공장이다. 여기서 좌회전해 적서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대성청정에너지(주) 앞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들(논)을 건너 보이는 마을이 한양조씨 세거지 ‘방갓’마을이다. 강변로에서 논길을 따라 100m 쯤 들어가면 새마을시대 때 개량한 새마을주택 20여 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난달 29일 방갓마을에 갔다. 마을 앞 논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마을 가운데 자리 잡은 느티나무 그늘에서 조도영 한양조씨 전 종친회장, 정숙자 반장, 배선칠 할머니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한양조씨 세거 내력을 듣고 왔다.

  
▲ 한양조씨 적벽재 표석

역사 속의 방갓마을

 

방갓 지역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로 개편할 때 영천군(榮川郡) 남면(南面)에 속했다.

조선 중기 때는 영천군 적포리 아천방(鵝川坊)에 속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영천군 적포면(赤布面) 적서리(赤西里)에 포함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영주군 문수면 적서리에 편입됐다가 1980년 시 승격과 함께 영주시 휴천3동(8통 3반)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적서(赤西)’라는 명칭은 옛날 탑거리 부근(문수·평은 갈림길)에 ‘적벽암(赤壁岩)’이란 붉은바위가 있었는데 적벽암의 적(赤)자를 따 서천을 경계로 동쪽은 적동, 서쪽은 적서라 하였다.

한양조씨와 적벽(赤壁)
한양조씨 군수공파 후손들은 적벽재가 자리 잡은 방갓지역을 ‘적벽’이라 칭한다.

적벽재 중건기에 보면 “영주 입향조 청하공(종琮, 1444-1520)께서 ‘적벽’이라는 마을 이름을 짓고, 강 이름을 ‘적벽강’이라 하고는 후일을 기약하지 않았을까?”라는 대목이 있다.

  
▲ 적벽재(한양조씨 재사)

‘적벽’은 중국 호북성 황강현의 성 밖에 위치한 명승지다. 중국 북송대 소식(蘇軾, 소동파)이 적벽강을 선유(船遊)하고 감회를 쓴 것이 적벽부(赤壁賦)이다. 청하공(淸河公)이 이곳 지명을 ‘적벽’이라 이름 지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후손들이 청하공을 추모하는 글 속에 보면 “수려한 이곳 풍광이 중국의 적벽과 흡사하여 적벽부를 연상해서 지은 것이 아닐까?”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듯 보여 진다.

방갓마을 강 건너 문수면 초입에 적벽암이 있었다. 그 ‘적벽암’이 먼저인지 이곳 한양조씨 ‘적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벽’은 중국 ‘적벽’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도영 전 한양조씨 종친회장은 “어릴 적(8-9세) 문수로 입구에 있는 적벽암을 봤다”면서 “서천의 물줄기가 적벽암에 부딪쳐 큰 호수를 이루었고, 버드나무와 하얀 백사장이 절경이었다. 당시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고 낚시를 했다고 전해진다. 적벽암은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고 신작로가 나면서 없어졌다”고 말했다.

방갓의 지명유래
방갓을 율지(栗枝)라고도 한다. 밤갖(방갓)은 한자 밤 율(栗)자와 가지 지(枝)자의 훈을 빌린 지명으로 ‘밤가지’, ‘밤갖’이라 부르다가 ‘방갓’이 됐다고 전한다.

영주시 지명유래에 의하면 “안동김씨가 250년전 이곳에 이주했을 당시 마을이름이 없어 궁금했는데 마을 뒷산(栗枝山) 한양조씨 청하공 묘 비문에 율지(栗枝)라고 기록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불리어오다가 ‘율지리’가 됐다”고 기록했다.

한양조씨의 본관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현 함경남도)에 세거해 온 토착 사족의 후예로 고려조에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의 후손들은 조선이 개국하자 한양으로 이거하여 크게 번성하였으며, 수많은 명신과 유현을 배출하여 본관을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 1950년대 건축물

한양조씨 세거지 ‘방갓’

 

청하(淸河) 현감을 지낸 조종(9世, 趙琮, 1444-1520)이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 때 난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낙남하여 영천(榮川, 옛 영주) 초곡(草谷, 사일)에 터를 잡았다. 공이 영천에 터를 잡은 것은 처가(평해황씨, 장인 황진손黃震孫)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조종의 조부 련(憐)은 병조참판을 지냈고, 아버지 운종(云從)은 군수를 지냈다.

조종의 1자 인완(仁琬, 직장공)은 봉화 와란 동양, 2자 예완(禮琬, 충의공)은 안동 나천 길안, 3자 지완(智琬, 사정공)은 예천 유동 산골, 4자 신완(信琬, 태련공)은 봉화 대현, 5자 형완(亨琬, 참의공)은 안동 풍천으로 각각 은거 했다. 5자 형완의 2자 제(濟, 1505-1555, 수의공)의 장남 광선(光先, 1535-1564, 어모장군)이 안동 풍천에서 영천 방갓(적벽)으로 이거하여 방갓 입향조가 됐다.

광선이 장성하여 이곳으로 왔다면 아마도 1555년경으로 추정되며, 한양조씨가 방갓에 세거한지는 올해로 461년이 된다.

  
▲ 한양조씨 적벽회관

적벽재(赤壁齋) 내력

 

방갓마을에서 조금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한양조씨 군수공 적벽재(漢陽趙氏 郡守公 赤壁齋)」 표석이 있다. 표석 방향으로 150m 쯤 들어가면 적벽재와 한양조씨 군수공파 회관이 있다. 적벽재는 낙남 시거지(始居地)의 계기를 마련한 군수공(云從)과 청하공(琮)을 추모하기 위해 1872년 후손들이 세운 재사(齋舍)다. 1950년 6·25 때 소실되어 1953년 중축하였으나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퇴락하자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2008년 가을 한옥 재사를 완공했다.

조용환 종친회 총무는 “매년 10월 15일 추향(秋享, 시사) 때는 종중 100여명이 모여 1박 2일동안 선조의 선견지명과 공덕에 깊이 감사하고, 선조숭봉(先祖崇奉), 종족돈목(宗族敦睦), 후손육성(後孫育成)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고 하면서 “종친회 발전을 위해 지난 20여년동안 방갓에 살고 있는 조도영 전 회장님의 노고가 컸다”고 말했다.

조경영 종친회 감사는 “낙남 500년 역사를 가진 한양조문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영남의 문벌(門閥)로 번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 옛 마을회관

방갓마을 사람들

 

방갓에서 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조팔영(73) 어르신은 “1950-60년대에는 65호에 500여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고, 한양조씨도 30여호 살았으나 지금은 넷집만 남았다”고 하면서 “노벨리스와 담배공장, 가스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작아졌다”고 말했다.

정숙자(50) 반장은 “현재 주민등록에는 18집이 사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10여집이 살고 있으며 빈집이 많다”고 했다.
이 마을에서 연세가 제일 높으신 배선칠(91) 할머니는 “평생 살아온 방갓이 제일 좋다. 아들이 ‘같이 살자’해서 부산 아파트에 갔다가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면서 “죽는 날 까지 이곳 방갓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김명원(88) 할머니는 “방갓에는 천년 묵은 동수나무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2아름 쯤 된다”고 말했다.

  
▲ 수령 800년 동수나무

마을 앞에는 떡버드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김경숙(66)씨는 “예전에 마을 앞에 버드나무가 많아 학생들이 소풍을 많이 왔었다”고 하면서 “노벨리스 안에 들어가면 600년 묵은 늙은 떡버드나무가 아직 보호수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방갓마을에 연꽃농장이 있어 눈길을 끈다. 연꽃농장 옆에서 만난 김윤자(55)씨는 “지난 3년동안 3천여평 논에 연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었다”며 “여름이면 연꽃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 최근에 주차장도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 마을 김화식(69)씨는 “우리마을은 예로부터 법도가 살아있고 기강이 바로선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의범절이 사라지고 기강이 흐려져 아쉽다”며 “방갓은 어릴 적 다른 마을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경치좋고 살기좋은 마을이었다”고 말했다.

조팔영(73)·황순년(72) 부부는 방갓 마을에서 50년동안 정미소를 운영해 왔다고 한다.
황순년 할머니는 “방갓은 옛날부터 벼농사가 발달하여 정미소가 잘 됐다”며 “남편의 가업을 이제 아들이 이어가려고 한다. 도로변에 현대식 도정공장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아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휴천3동 방갓마을 사람들>

  
▲ 정숙자 방갓 반장
  
▲ 조도영 한양조씨 전 종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