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07] 공주이씨 500년 세거지 ‘두서(杜西, 뒷새)’ | ||||||||||||||||||||||||||||||||||||||||||||||||||||||||||||||||||||||||||||||||||||||||||||||||||||||
영주1동 두서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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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이진(李畛)이 ‘두서’에 정착
영주1동 두서마을의 입지 시외버스터널쪽에서 볼 때 고가도로 우측에 있는 단독주택과 문재도효자각, 서천폭포, 중앙선철도 영암교굴다리 주변지역이 두서마을이다. 두서마을의 옛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지난 5일 오후 두서노인회관(영주1동 23통)에 갔다. 황한준 노인회 총무, 이영도 공주이씨 종친회장, 신숙향 여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근현대사 이야기를 듣고 왔다.
역사 속의 두서마을 옛 두서마을은 조선(태종 13년, 1413년) 때 영천군 망궐리(望闕里)에 속했다. 영주지에는 「망궐리 속방에는 화동방(禾洞坊)과 두서방(斗西坊)과 천서(川西坊)와 북청(北廳坊)과 상현(商峴坊)과 조와(助臥坊)와 삼진(三津坊)과 선암(仙巖坊)이다」라고 기록했다. 즉 읍내의 서쪽 지역으로 뒷새, 장수고개, 진우, 삼진, 선바위 지역이다. 그 후 ‘두서방’은 조선 후기(영조 이후)에 와서 영천군 봉향면 영주동이 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로, 1980년 영주시 영주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서의 지명 유래 영주지에는 ‘두서(斗西)’로 기록하고 있고, 영주시사에는 ‘두서(杜西)’로, 송지향의 영주영풍향토지에는 ‘두릉촌(杜陵村, 속칭 뒷새)’ 또는 ‘두서(杜西)’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고서에 의하면 「공주이씨 영주 입향조 이진(李畛, 호 두은杜隱, 임피현령)이 1455년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는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입향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고 해서 두서(杜西), 두릉촌(杜陵村)이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뒷새’라고 한 것은 두서가 변하여 ‘뒷새’가 됐다는 설과 관아의 뒷마을이란 뜻으로 ‘뒷새’가 됐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이 마을 김성규(80)어르신은 “두서(杜西)는 막을 두(杜)자를 써 ‘서쪽을 막는다’는 뜻으로 ‘하륜(河崙)’이 군수로 재임 시 서편의 제방을 튼튼히 할 것을 역설한데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했다.
공주이씨 입향내력 공주이씨는 신라 박혁거세 때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진 이천일(李天一)을 시조로 삼고 있다. 이후 조선 태종 때의 명신인 명덕(明德, 40세손)을 중시조로 삼아 공숙공파(恭肅公波)로 분파하였는데, 처음 영주로 입향한 진(珍, 43세손)이 그의 증손자다. 이진은 단종 때 임피현령(전북 군산 임피면)을 지냈는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는 벼슬을 버리고 영천 뒷새(현 영주시 영주1동)로 은둔하였다. 이진이 영주로 오게 된 동기는 처가(선성김씨)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 세거해 오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진의 증손자인 석간(碩幹, 46세손)은 천하명의로 팔도에 이름을 떨쳤으며, 석간의 두 아들 정견(庭堅)과 정헌(庭憲)은 동시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시 정견은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고, 정헌은 부산진전투에서 순국하여 좌증지(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이영도(72) 공주이씨 종친회장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하여 시작된 선조들의 영주살이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빛을 발하였고, 구한말에는 임금에게도 꺾임이 없는 굳은 절의를 보임으로써 ‘선비의 고장 영주’를 대표하는 명문가(名門家)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 왔다”고 말했다.
천하명의 이석간 동의보감의 허준(1539-1615)보다 앞선 시기에 살면서 ‘이석간경험방’ 등 여러 의서를 발간하여 지금도 한의학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의술이 고명하여 난치병을 치료한 전설을 많이 남겼는데 대표적인 일화가 아기처럼 작아진 남편를 고쳐 준 이야기나,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의 어머니 황태후의 괴이한 병을 고쳐 준 이야기가 있다. 특히 황태후 치료의 전설이 묻은 천도쌍잔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하사받은 아흔아홉 칸 고택은 뒷새(영주1동)에 아직 그 일부가 남아있다. 이석우(82) 공주이씨 후손은 “이석간 고택은 6·25 때까지 종택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이후 규모가 축소되어 현재 그 일부만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석우씨의 부인 이해순(82, 전주이씨)씨는 “문중에서 전해지고 있는 천도쌍잔, 호패, 인장을 비롯한 민속품, 문중전적, 소장전적 등 120여점은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2009년 소수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이석간의 후손들 그러던 중 석간의 14대손 이정우(81, 영주 천보당한약방)가 한약전문인(韓藥業士)으로 경북북부 지역에서 명성을 얻었고, 15대손 이석우(82, 문중고문)의 손자 이상묵(17대손, 의대 3학년)과 외손녀 김다현(의대 인턴과정修鍊醫)이 의사(醫師)의 길을 가고 있어 명의가(名醫家)의 명성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가 크다.
경림정의 내력 옛 두서마을 뒷산 부용대 옆에 ‘경림정(景臨亭)’이 남동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입향조 이진은 두서에 정착한 후 경림정을 짓고 세상을 등진 채 단종을 흠모하며 산천과 시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그는 후손들에게 “충신은 불사이군 해야 한다”며 “벼슬에 나가지 말고 도학에 힘써 자신을 수양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현재 경림정은 이진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07년 건립하였고, 승문원부정자 황헌이 기를 썼다. 그 후 1989년 중수했다.
문재도 효자각(文載道 孝子閣) 이에 문재도는 황급히 아버지의 등에 꽂힌 화살을 뽑고, 칼을 뽑아 뒤쫓는 왜구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우니 왜구들은 물러갔다. 마을원로들은 “두서마을 옛 흔적은 문재도 효자각 하나뿐이다. 효자각 안에 효자리(孝子里)라는 비석이 있다. 그로 인해 두서가 효자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두서마을 사람들 우리 두서 경로회는 매주 목요일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친목과 회의를 겸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숙향(81) 여부회장은 “노인들을 위한 정부지원에 감사드린다. 우리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교육기회도 박탈당한 세대들이다. 최근 노인대학이 많이 생기고,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행복한 노후가 됐다”고 말했다. 김인영(87) 할머니는 “역이 신영주로 가기 전에는 버스터미널 자리에 기관차수리창과 기차머리를 바꾸는 입환장이 있었고, 주변 웅덩이에는 미나리꽝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희서(82) 할머니는 “버스터미널이 떠나면 그 자리에 영화관과 복합상가가 들어선다는 신문보도에 마을 사람들 모두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박영숙(68) 전 통장은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골목이 좁고 70년대 때 모습 그대로다. 앞으로 소방도로를 내고, 고가도로가 철거되면 마을 환경이 훨씬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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