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언덕에 학이 춤추는 풍요로운 마을 ‘구두들’ | ||||||||||||||||||||||||||||||||||||||||||||||||||||||||||||||||||||||||||||||||||||||||||||||||||||||||||||||||||||||||
우리마을탐방[102]단산면 구구2리(구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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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남양홍씨 집성촌 단산면 구두들 가는 길 새내(사천1리)마을 앞을 지나 1Km 쯤 가다보면 바우마을 가기 직전 ‘홍유한 선생 유적지’ 표지판이 나타난다. 여기서 곧바로 우회전하여 구구교를 건너면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야산자락에 자리 잡은 구두들이 보인다. 마을 앞에 솔둥천이 선명하다. 마을의 집들은 북에서 남으로 기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27일 구두들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서석열 이장, 서정수 노인회장, 최정자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구두들의 역사와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왔다.
역사 속의 구두들 1849년(현종 15)에 쓰여진 순흥지(順興誌)에 보면 구두들은 순흥부 동원면(東園面)에 속했다. 옛 문헌에 ‘구두들은 구고(九皐)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또 구두들 마을 뒷산에 있는 무학봉(舞鶴峰)과 관련이 있다고도 했다. 옛 선비들은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그 소리가 들판에 들려오네 鶴鳴于九皐 聲聞于野」라는 시전(詩傳)에서 따와 ‘구고’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구고, 오현, 이목곡을 병합해 ‘구구리’라 칭하고 단산면에 편입시켰다. 당시 일제(日帝)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구고(九皐)’란 지명을 없애버리고 구구리(九邱里)로 개칭해 버렸다.
마을의 구성 구두들은 마을회관이 있는 사근절을 중심으로 북쪽에 ‘풀미골’이 있고, 동쪽에 ‘새모태’, 길 건너 아랫마에 ‘음지마’와 ‘양지마’ 등 여러 마을로 구성돼 있다. 풀미골은 옛날에 풀무간(대장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사근절은 예전에 사근절이란 절이 있었다 하여 불러온 이름이다. 새모태는 6·25 무렵 인근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새모태(모퉁이란 뜻)라고 불렀다. 길 건너 아랫마는 산쪽이 ‘음지마’이고 들쪽이 ‘양지마’이다. 새모태 동편에 300평을 덮는 300년 수령의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보호수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지명유래 옛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구두들’이라 불렀다. ‘두들’이란 평지보다 높은 언덕(둔덕)을 말하고, 구두들은 두들이 아홉 개가 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무렵 이곳 선비들이 아홉 구(九)자에 언덕 고(皐)자를 써 구고(九皐)라 했다고 전해지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예전에 음지마 뒤쪽 도인봉 아래 구고서원이 있었다. 당시 이곳의 지명이 ‘구고’였기 때문에 ‘구고서원’이라 했을 것이다. 구고서원(九皐書院)은 달성서씨 영주 입향조인 돈암 서한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80년 지역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 훼철됐다. 영주시사에 보면 구두들을 거북이 머리 모양이라 하여 ‘구두(龜頭)들’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으나 원래 이름은 ‘구고’가 확실하다.
달성서씨 입향 내력 달성서씨 영주 입향조인 돈암 서한정(1407-1490)은 계유정란(1453) 때 달성 화원에서 영주 한성동으로 피난했다가 순흥부 등강촌(등영)으로 숨어들었다. 그로부터 200년 후 돈암의 6대손 서정구(1663-1735)가 1690년 등강촌에서 새내로 이주하게 된다. 이 무렵 돈암의 6대손 서천운(徐天運)이 야동(冶洞, 풀미골)으로 살림을 나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니 달성서씨 구두들 입향조가 됐다. 후손 서정수(72)씨는 “천운 선조께서 이곳에 정착한 후 학문에 힘써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고평들을 개척하여 풍요로운 마을을 만드셨다”고 말했다. 달성서씨 구두들 후손들은 구고서원 창건(1780)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창건 후에는 학문에 정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당시 구고서원에는 사당인 상절사, 강당인 존교당을 비롯해 동재와 서재, 주소 등이 있었다. 구고서원이 있던 음지마 뒷골을 지금도 서원골이라 부른다.
남양홍씨 집성 세거지 구구2리 사근절은 남양홍씨(南陽洪氏) 토홍(土洪, 토착홍씨)의 집성 세거지이다. 태백 5현 중 한 분이신 숭정처사(崇禎處士) 개절공(介節公)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이 병자호란(1636년) 때 척화(斥和) 항전을 주장하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참지 못해 벼슬을 버리고 태백산 아래 봉화 두동(띠띠미)마을로 숨어들었다. 그의 둘째 아들 홍윤(洪允)이 두동에서 구두들(사근절)로 이거하여 남양홍씨 구두들 입향조가 됐다. 그의 후손들은 370년 동안 이곳에 세거하면서 효행과 문행을 이어왔는데 노운문집(老雲文集, 홍전, 1804-1865)과 연암문집(硯癌文集, 洪思誠)에 그 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후손 홍승원(56)씨는 입향 내력에 이어 “1960-70년대에는 5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으나 산업화 이후 도시로 나가고 지금은 10여호가 산다”고 말했다.
향학지성(向學之誠)의 마을 조선 정조 때(1780년) 구두들에 구고서원이 창건되어 고종 때까지 약 100여년 간 옛 순흥부 동북부지역 인재육성을 담당해 왔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 치하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배우지 못하자 마을 사람들은 구구서당을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섰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농악패가 구두들, 오현, 배나무실, 오상, 자분, 등영 등 7개 마을을 돌면서 학교 건립금을 모아 1949년 단산국민학교 구구분교장을 설립하여 초가집 교실에서 개교했다. 그 후 1964년 구구국민학교로 승격하여 1999년 폐교될 때까지 졸업생 1,552명을 배출했다. 이상과 같이 구두들은 향학열이 높은 마을로 알려져 향학지성의 마을이란 명성을 얻게 됐다. 이 마을에는 해방 후 현대까지 초중등학교 교원 20여명을 배출하여 영주지역에서 교원을 가장 많이 배출한 마을로 손꼽고 있다. 또한 이 마을 희여골댁(홍정선, 89)은 유가(儒家, 창원황씨)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헌신과 희생으로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켜 학교장, 보건진료소장 등이 되게 하여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다.
구두들 사람들 서석열(61) 이장은 “우리마을은 달성서씨와 남양홍씨의 집성촌으로 1960-70년대에는 100여 가구에 7-800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54가구에 100여명이 산다”고 말했다. 서병극(82) 어르신은 “마을 앞 고평들은 24만평, 쑤비들은 18만평으로 단산면에서 가장 넓은들을 가진 마을”이라고 했다. 허창규(69)씨는 “마을 뒷산 무학봉은 구두들의 상징이며, 옛 선비들의 풍류의 대상이기도 했다”며 “구고(九皐)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무학봉 정상에는 비행기 모양의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했다.
40여년 간 정미소를 운영했다는 조영수(70)씨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통일벼가 나왔을 때 한 가구에 200석-300석을 매상하여 풍요를 맞이했고, 정미소도 신나게 돌아갔다”며 “그 때 농촌은 비로소 보릿고개를 물리쳤다”고 말했다. 최정자(55) 부녀회장은 “우리마을 회관은 영주에서 가장 넓고 현대화 시설을 갖춘 회관”이라며 “마을의 화합과 모든 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주민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왜정 때 처녀공출 당하지 않으려고 16살에 시집왔다는 박옥남(89) 할머니는 “신혼 때 남편이 일제 보국대에 끌려가 북해도 탄광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해방 후 돌아왔는데 돈 한 푼 없이 돌아왔다”며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오래 살지 못하고 42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남편의 고향으로 귀촌한 유경희(72)씨는 “2002년 남편의 고향 구두들로 귀촌하여 텃밭을 가꾸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며 “이 마을은 조상 섬김이 대단하고, 대대손손 유학의 맥을 이어가는 전통마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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