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산 기운 받은 장수(長壽)마을, 여륵2리 ‘너르기’ | ||||||||||||||||||||||||||||||||||||||||||||||||||||||||||||||||||||||||||||||||||||||||||
우리마을 탐방[86]안정면 여륵2리(너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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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이 많아 80% 이상 사과 농사에 주력 여륵2리 ‘너르기’ 가는 길 과수원길을 따라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도로 우측에 수백년 수령의 느티나무와 여륵정(汝勒亭)이 나타나는데 이 마을이 여륵2리 ‘너르기’이다. 버스승강장 옆에는 ‘여륵2리 너르기’표석과 ‘범죄 없는 마을 여륵2리’ 표석이 마을을 상징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오후 용암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덕망 갖춘 선비들이 살았다는 여륵2리를 찾았다.
황도명 이장은 “여륵 2리는 미산에 15가구, 새마에 10가구, 탑골에 12가구, 산재해 있는 단독주택 등 총 55가구에 60세대가 살고 있으며, 사람 수는 130명 정도 된다”고 했다. 마을의 역사 당시 대룡산면에는 대룡산 본리와 묵동, 장항[노루고개], 여륵, 반산[반지미] 등이 있었다. 그런데 대룡산면이 풍기군 경계를 뛰어 넘어 순흥부에 속한 내력이 궁금하여 어르신들께 물었다. 이에 홍맹희 노인회장은 “당시 순흥안씨들이 대룡산을 비롯한 여륵, 묵리 지역에 널리 세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흥부에 속하기를 원했을 것으로 보여지며, 순흥부 또한 토반(土班) 세력에 대한 예우 같은 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지역의 행정구역 변천사를 살펴보면 순흥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순흥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당시는 대룡산면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됨] 세조 3년(1457) 정축지변(금성대군 거사)으로 풍기군에 속했다가 숙종9년(1683) 순흥부로 회복되면서 다시 순흥부에 속하게 됐다. 그 후 고종33년(1896년) 전국을 8도 23부에서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북도 순흥군 대룡산면이 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영주군 안정면 여륵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 유래 황순희(78) 노인회부회장은 “마을 이름을 ‘너르기’라고 하는 것은 너르다는 뜻”이라며 “이곳에서 태어나 다른 마을로 시집가면 ‘너르기댁’이라 부르고, 골짝마다 마을이 많아 열 두 너르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점마(店村)는 봉현면 유전리로 넘어가는 무릎재 남쪽 채석장 자리에 있었다. 옛날 옹기를 구워서 파는 옹기점(店)이 있었다 하여 점마로 불렀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점마 아랫쪽에 새마가 생겨 현재 10여호가 살고 있다. 탑골은 미산에서 성곡 방향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예전에 탑이 있어 탑골이라 불렀는데 1935년 경 일제가 경복궁으로 이전해 갔다고 한다. 마을의 형성 내력 이 마을 창원황씨 종중 어르신은 “여륵에 사는 창원황씨는 배고개 귀암(龜岩) 황효공(黃孝恭) 선조의 후손”이라며 “대룡산에 터 잡은 농고 황언주(귀암의 손자) 선조의 후손들이 대룡산에서 여륵으로 이주해 왔다”고 했다. 황언주의 5대조 황지헌이 배고개에 터를 잡은 것은 세조 말년 무렵(1468)이고, 황언주가 배고개에서 대룡산에 들어 온 것은 1575년이다. 황언주(黃彦柱)의 증손(曾孫)대에 여륵으로 이주했다고 하니 1700년 경 여륵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륵 공주이씨들은 100여 년 전 대룡산에서 옮겨 왔다고 하며, 영해박씨는 150년 전, 풍산홍씨는 120년 전에 여륵에 들어왔다고 한다.
무릎재와 지네바위 안정면 여륵2리(너르기)에서 봉현면 유전리(버드랭이)로 넘어가는 재 이름이 무릎재다. 용암산과 주마산이 몸을 낮추어 사람들이 넘나들 수 있게 길을 열어 준 곳이기도 하다. 고개가 높고 경사가 급해서 무릎을 꿇고 넘어야 한다는 뜻에서 무릎재라는 이름이 생겼다. 전설에 의하면 「여륵리에서 무릎재로 오르는 길 왼편에 봉우리가 하나 우뚝 솟아있다. 이 봉우리를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지네바위’라고 부른다. 이 지네바위 아래 연못에는 천년 묵은 구렁이(이슴이)가 살고 있었고, 못 위에 있는 큰 바위에는 천년 묵은 지네가 살고 있었는데 이 두 괴물이 지나는 행인을 감쪽같이 해치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행인도 나무꾼도 얼씬하지 않는 적막한 곳이 되고 말았다. 이 괴물들의 못된 소행을 괘씸히 여긴 용암산 산신령은 먹구름과 비바람을 몰고 와 천둥과 번개로 바위를 두 동강내고 못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지네바위의 전설은 오래 전부터 마을에 전해지고 있으나 지네바위의 실체는 찾을 길이 없다. 이 전설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예전에 무릎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도둑이나 산적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경로당과 찜질방
미산마을 중심에 경로당이 자리 잡고 있다. 경로당 앞에 있는 머릿돌에는 ‘이 건물은 영주시 보조 3천만원과 동네기금 6천만원으로 1997.3.17 착공하여 6.30 완공했다’라고 새겨져 있다. 경로당 옆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아담한 건물 한 채가 있다. 주민 복지를 위해 지어진 ‘찜질방’이다. 김송수(70) 이장 부인은 “찜질방 공사가 지난 봄(2015년 3월) 시공하여 가을에 건물이 완공됐다”며 “찜질방에는 운동기구도 설치된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개소식 때 기자님께서 꼭 오셔서 마을자랑 많이 해 달라”고 말했다. 여륵2리 사람들
기자가 마을 경로당에 도착하니 황도명(71) 이장과 부인 김송수 씨가 반갑게 맞아 주시니 감사했다. 경로당 사랑방에 마을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모이기 시작했다. 홍맹희(81) 노인회장을 선두로 김하식(84) 어르신, 이종건(69)씨, 이종기(73) 노인회 총무, 이학일(77) 어르신, 황병천(70) 어르신, 이용호(80) 어르신 등이 모였다. 모두 낮 익은 얼굴인 듯 반갑게 맞이해 주시니 고향마을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학일 노인회부회장은 “우리마을은 용암산의 정기를 받아 학식과 덕망있는 사람이 많이 태어났다. 지금은 명산의 기운으로 장수(長壽)마을이 되어 80세 넘는 어르신들이 25명이나 된다”며 “우리마을의 자랑은 장수마을”이라고 말했다. 김하식 어르신은 “우리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명이 ‘용주로’”라며 “용암산과 주마산의 첫 자를 따서 ‘용주로’라고 이름 지었다”고 말했다.
이종기 노인회 총무는 “여륵2리는 80% 이상이 사과 농사를 짓는다”며 “용암산 자락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해발이 높아 사과 공판장에 가면 높은 등급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용호 어르신은 “예전에는 먹고 살기 힘든 지역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사과 생산이 본격화, 대량화 되면서 농가 소득이 많이 늘어났다”고 했다. 황병천 어르신은 “1960년대 농촌 인구가 많을 때는 현재 3배 이상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며 “당시 마을 입구에 양조장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종건 씨는 “여륵1리는 순흥안씨 집성촌인 반면 여륵2리는 창원황씨 집성촌이라 할 수 있다”며 “순흥안씨, 창원황씨, 공주이씨 등은 대룡산에 살다가 분가하여 여륵에 새로운 터를 잡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경로당에 오시지는 않았지만 창원황씨 입향 내력을 알려 주신 황병석(80) 어르신, 교회 설립 역사를 설명해 주신 이명희(67) 목사님, 승강장에서 마을길을 안내해 주신 고금자(74) 할머니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여륵2리 황도명 이장 연락처 010-3785-3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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