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논(畓)으로 둘러싸인 마을 안정면 ‘너르기’ | ||||||||||||||||||||||||||||||||||||||||||||||||||||||||||||||||||||||||||||||||||||||||||||||||
우리마을탐방[84]안정면 여륵1리(너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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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 순흥인 안선(安璇)이 개척한 마을
안정면 여륵1리 가는 길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은 여륵1리이고 서쪽은 여륵2이다. 여륵1리 표석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농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너르기’마을을 만나게 된다. 지난 8일 오후 ‘너르기’를 찾아 갔다. 마을경로당에서 안유근 이장, 안우근 노인회장, 박옥분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숨겨 둔 이야기들을 듣고 왔다. 마을의 역사 이 지역의 행정구역 변천사를 살펴보면 조선 태종 13년(1413) 지방행정구역 개편될 때는 순흥도호부에 속했고, 세조 3년(1457) 정축지변(금성대군 사건)으로 풍기군에 속했다가 숙종9년(1683) 순흥부 회복으로 다시 순흥부에 속했다. 고종33년(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북도 순흥군 대룡산면이 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영주군 안정면 여륵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형
그렇다. 용암산은 여러 지맥(支脈)이 문어발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여륵1리 쪽으로 갈려나간 산줄기는 고구마 모양으로 길쭉하게 뻗어 있다. 선조들이 오랜 세월 그 주변 골짜기를 논으로 개간하니 마을은 삼면이 논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된 것이다. 지명 유래
행정구역명칭을 ‘여륵’이라 한 것은 마을 뒤쪽 용암산의 형상이 말의 굴레 부위에 해당된다고 하여 ‘너 여(汝)자에 굴레 늑(勒)자를 써 여륵(汝勒)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륵’이란 지명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49년에 기록된 재향지(梓鄕誌)에 ‘여륵’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그 무렵 이전부터 ‘여륵’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마에서 남쪽으로 3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사무실(四勿室)은 미곡(米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실’이 들
어간 마을이름은 고려 때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사무실은 아주 옛날부터 선조들이 살았던 마을이 아닐까 짐작만 해 본다. 마을의 개척 이 마을 안병우(75) 어르신은 “대룡산을 개척(1457년)한 서파(西坡) 안리(安理,1393~?)의 5세손(高孫)인 안선(安璇) 선조께서 1520년 경 대룡산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입향조가 됐다”면서 “순흥안씨가 이곳에 세거한지 어언 500년이 지났고 지금도 집성촌이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란, 1453)과 정축지변(1456)을 지켜 본 안리는 대룡산에 은거하면서 후손들에게 “벼슬길로 나가지 말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안유근 이장은 “안리 선조께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중시하되 벼슬길로 나가지 말라’는 당부 때문인지 벼슬길에 오른 후손이나 과거급제자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연연정(淵淵亭)과 누암당(樓巖堂) 연연정은 철종 때 사헌부장령을 역임한 죽남(竹南) 안치묵(安致默, 1826-1867)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아들 병연·무연 형제가 19세기말에 건립한 정자이다. 권상규(權相圭)는 기문에서 “광천에는 옛날부터 참신하고 아름다운 문장가와 큰 덕망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명산의 맑은 기운이 모아진 때문이리라”고 썼다.
안치묵은 1850년(철종 1년) 24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1851년(철종 2)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1860년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누암당은 마을 뒷산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증참의(贈參議) 안만종(安晩琮)의 유덕을 추모하여 1978년 후손들이 건립하였고 선성(宣城) 김원(金源)의 기가 있다. 대룡산에서 여륵으로 오는 도로변 좌측에 안동권씨 열부각이 있다. 이곳 안윤근(순흥인)과 결혼한 권씨는 남편의 병이 깊어지자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달라’고 하늘에 기원하였으나 끝내 남편이 숨을 거두자 보름간 단식 끝에 남편 곁으로 갔다. 이에 유림에서 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28년 열부각을 세웠다.
여륵1리 사람들
너르기 마을에 갔던 날은 오랜 가뭄으로 기다리던 단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단비 덕분에 마을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곳 여륵1리는 기자가 33년 전 안정남부초에 교사로 근무할 당시 담임을 했던 아이들이 10여명 살던 마을이다. 그 학생들의 나이가 벌써 마흔 다섯이 되었다고 한다.
안준용의 아버지 안우근 노인회장, 안배근의 아버지 안삼수 어르신, 안진근의 아버지 안승봉 어르신, 안웅기의 아버지 안병우 어르신 등이 옛 학부모였다. 여기서 이 분들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세월이 참 빠르게 흘렀다는 생각도 든다. 안우근(76)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50호에 80여명이 사는데 모두가 노인회원”이라며 “60세 이하는 단 2명뿐이고 모두 노인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했다. 요즘 농촌마을이 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 마을은 ‘초고령장수마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노인이 많은 마을이다. 박옥분(68) 부녀회장은 “집안끼리 사는 마을로 서로 돕고 착하게 사는 마을이다. 자녀들이 고향을 방문하는 날은 모두가 반기고 마을 잔치를 연다”고 자랑했다.
안삼수 어르신은 “너르기는 산간 마을이지만 들이 넓고 논이 많은 마을”이라며 “우리마을은 추정벼(아끼바리) 시범단지로 지정되어 180마지기를 농협과 계약재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부녀회장 송귀녀(80) 할머니는 “양반 가문에 시집 왔더니 농사일이나 나무하는 일은 시키지 않았다”고 하면서 “명주 길쌈을 많이 했는데 돈벌어 땅 사는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안호근(79) 어르신은 “너르기는 용암산의 기를 받아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안정-성곡 간 도로 공사로 지맥이 여러 곳에서 끊기는 바람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안승봉(77) 어르신은 “예전에 마을 앞에 큰 우물이 있어 마을 사람 모두 우물물을 길어다 먹고 살았다”고 하면서 “입향조께서 심었다는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는 마을의 동수목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사철 쉼터로도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마을로 귀농한지 1년 됐다는 최영우(77)씨는 “귀농을 앞두고 여러 마을을 둘러보다가 산세가 아름답고 덕망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이 마을에 정착했다”며 “다 좋은데 성곡 석산의 소음과 분진이 옥에 티”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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