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산 아래 큰 마을 안정면 ‘대룡산’ | ||||||||||||||||||||||||||||||||||||||||||||||||||||||||||||||||||||||||||||||||||||||||||||||||||||||||||||||||||
우리마을탐방[83]안정면 용산1리 대룡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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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년 전 안향의 후손 안리(安理)가 개척 ▲ 안정면 용산1리 가는 길 경북축산기술연구소, 묵동마을 앞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도로 우측에 순흥안씨 서파공묘소 표석에 이어 서파안선생여항비가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대룡산(大龍山) 용산마을’이란 큰 표석이 나타난다. 여기가 558년 역사를 간직한 ‘선비의 마을 대룡산’이다. 옛날에는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50호에 110명이 사는 평범한 농촌마을이다.
▲ 마을의 역사 서성수(70) 이장은 “우리마을은 본래 순흥부 대룡산면사무소가 소재했던 마을”이라며 “1914년 어약을 비롯하여 섬마, 고촌, 재실마를 합쳐 용산1리 큰마가 됐다”고 했다. 순흥지에 보면 「순흥부 대룡산면의 촌명(村名)은 대룡산본리(大龍山本里), 묵동(墨洞), 장항(獐項)[노루고개], 여륵(汝勒), 반산(盤山)[반지미] 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조선 태종 13년(1413) 지방행정구역 개편 당시 순흥도호부에 속했고 세조 3년(1457) 금성대군 거사로 인하여 풍기군에 소속되었다가 숙종9년(1683) 순흥부로 회복됐다. 조선 영조(英祖) 이전에는 대룡산리 대룡산방이라 부르다가 영조 후부터 대룡산면 대룡산본리로 불렀다. 고종33년(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도 순흥군 대룡산면(관할구역 용산·여륵리 일원)이 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안정면 용산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지명유래 용산1리에는 어약, 섬마, 고촌, 재실 등 네 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대룡산 본 마을인 어약(魚躍)은 ‘선비가 낚싯대를 드리우는 형상’으로 풍수설에서는 어약수조(魚躍垂釣)라 하여 명당터로 꼽고 있다. 이곳 지명은 물과 관련된 마을이름을 지으면 ‘자손만대 번창하고 벼슬길이 열린다’는 선조들의 염원(念願)에 따라 ‘어약’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도촌(島村)은 어약 남쪽(용산마을 입구)에 위치한 마을로 개울이 양쪽으로 흐르고 있어 섬같이 보인다 해서 섬마 또는 도촌이라 불렀다. 지금은 마을은 없어지고 지명만 전해지고 있다. 고촌은 어약 북쪽 용암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종2품) 교지를 받은 경주김씨 김수희(金秀喜)가 1836년 선대의 터전인 충주에서 용암산 아래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했다. 이곳에 정착한지 37년만에 13호의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6.25 전 소개령으로 어약(용산1리)으로 이주했다. 6.25 후 한 가구가 외롭게 마을을 지켜왔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고촌(孤村)이 된 것 같다. 재실(齋室)은 어약 동쪽 순흥안씨 서파공 묘소와 재사가 있는 마을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 두 집이 살고 있다.
▲ 서파 안리가 개척한 마을 대룡산은 1457년 순흥안씨 서파(西坡) 안리(安理,1393~?)가 최초로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했다. 안리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5대손으로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의 아들이다. 1453년 의령현감에 부임하여 이듬해 예천군수로 승진했다. 이 무렵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란, 1453)과정과 정축지변(1456)을 지켜보다 단호히 벼슬을 버리고,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아래로 은거했다. 그는 거친 땅을 개척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한 다음 누암산을 용암산(龍巖山)이라 하고 마을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했다. 뒤를 이어 창원황씨가 대룡산에 터를 잡았다. 농고 황언주(黃彦柱)가 1573년 배고개에서 대룡산으로 터전을 옮긴 것은 그가 이곳에 사는 순흥안씨 안윤금의 딸에게 장가를 들게 되어 처가 마을에 세거지지(世居之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 뒤 공주이씨와 경주김씨가 차례로 이곳에 터를 잡았다.
▲ 용암산 바위공원 용암산의 옛 이름은 누암산(樓巖山)이다. 옛 문헌에 ‘풍기군 남쪽 십리에 있으며, 일명 무성(蕪城)이라 하는 곳에 옛 성터와 군마를 훈련시키던 치마장(馳馬場)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주변에서 수습된 기왓장 조각을 확인결과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일대에는 200여기의 삼국시대 고분이 있다. 일명 ‘고려장(高麗葬)’이라고도 하는 이 고분군은 내부 구조가 잘 보존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용암산 바위공원이 관광지로 조성되기까지 용산마을 사람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 권만석(74) 노인회장은 “10여 년 전부터 용암산을 오르내리며 ‘여의주바위’ 등 여러 형태의 기암들을 발견하고 영주시 등 관계기관에 관광지 개발을 건의했었다”고 말했다. 이에 영주시는 2009년 4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용암산 바위공원 관광지조성사업을 착수했다.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많은 등산객들과 학술조사단이 용암산을 찾고 있다.
▲ 김동극 선생의 고향 고촌 지난달 26일 영주문화예술회관 앞 소공원에 김동극 선생 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김동극 선생은 1926년 안정면 용산리 고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고촌마을을 개척한 김수희의 증손이다. 풍기초등학교를 나와 검정고시를 거쳐 고려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선생은 1959년 영주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전국 최초로 글짓기 지도교사 모임인 아동문학소백동인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글짓기 지도와 아동문학 저변 확대에 힘써 영주가 ‘아동문학교육의 발상지’라는 기록을 남겼고 ‘동심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선생은 2014년 작고하여 고촌에 묻혔다. 선생을 추모하고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동문학소백동인회가 시비건립을 추진하여 영주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서천 언덕에 시비를 세웠다.
▲ 대룡산 사람들 지난 1일 오전 용산1리에 가서 먼저 가본 곳이 고촌이다. 마을 입구에 입향조가 심었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고 집터 자리엔 이끼 낀 돌담과 감나무 몇 그루가 마을 흔적으로 남아있다. 이곳에서 고향 옛 터를 조경하고 있는 김장환(동양대)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는 “선대의 고결한 숨결과 성실한 땀이 배어있는 이곳에 고조부(고촌 입향조 金秀喜)님의 유허비를 세웠다”며 “해 뜨는 마을 고촌을 선대의 효성과 우애의 높은 뜻을 기리는 추모지소(追慕之所)로 가꾸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에는 용산경로당에서 어르신 10여분들로부터 마을의 자랑과 고생스럽게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김영환(79) 어르신은 코팅된 어약정 내력을 보여주면서 “어약정 내력은 김장환 교수가 문헌에서 찾아 준 것”이라며 “이 속에는 자손만대 번창을 바라는 선조들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고 했다. 김태순(51) 새마을지도자는 “우리마을 주요 농축산물은 사과를 중심으로 인삼, 한우, 한약재를 많이 생산한다”고 했다. 이석수(62) 씨는 “지난달 26일 김동극 선생 시비 제막식에 다녀왔다”면서 “우리마을 출신 김동극 선생은 아동문학교육의 선구자요 특수교육의 개척자로 마을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장용수(81) 노인회부회장은 “우리마을은 노인이 절반(50명)이 넘는다”며 “매일 10-20명씩 모여 점심을 같이 먹고 운동도 하고 농사일도 서로 돕는다”고 말했다. 권병필(83) 할머니는 마을의 모습에 대해 “마을의 규모는 지금과 비슷했지만 모두 초가집뿐이었다”고 했고 안승용(84) 어르신은 “지금은 좋은 집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의식주를 자급자족해야 되기 때문에 농사짓고 나무하는 일이 주된 일”이라고 말했다. 이연이(88) 할머니는 “우리가 새댁 때는 모든 물자를 집에서 구했는데 무명을 자아 무명 바지저고리나 삼베옷을 입었고, 먹을 것이 부족해 밀기울(밀껍데기)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신현숙 할머니는 “우리마을은 여러 성씨들이 서로 도우면서 근면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농촌”이라고 했다. 서성수 이장은 “대룡산교회는 1914년에 세운 안정면 최초의 교회”라고 했고, 김영환 어르신은 “효자 이택진(공주이씨)의 정려문은 1895년(철종 10) 안동군 남후면에 건립된 것을 안동댐 수몰로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건했다”고 말했다. <안정면 용산1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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